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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만(卞榮晩)·영태(榮泰)·영로(榮魯) 3형제가 현대사에 남긴 업적과 자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터넷만 뒤지더라도 수없이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정보는 다양하고 흥미롭다. 지식의 경계 또한 넓고 해박하다. 세 천재의 행적을 좇다보면 어느새 격동의 현대사 속으로 빨려드는 듯 하다.

산강재, 전집발간·학술대회 등 조명 활발

▲ 변영만전집(2006)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다른 형제에 비해 대외 활동이 적게 비쳤던 산강재 변영만. 이 때문에 남은 자료가 별로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입견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의 산강재 전집 발간으로 기우가 됐다.

2006년 6월 전집 발간을 기념해 인천시 구월동 인천문화재단에서 '근대 문명과 산강 변영만'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산강재의 인물관, 문명관, 문장관 등 방대한 학술자료와 1910년대 해외행적 등이 발표됐다. 산강재에 대해 활발히 재조명하는 이정표가 된 학술대회였다.

이 학술대회를 누구보다 반기고 자랑스러워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산강재의 종손 변호달 선생이다. 부평삼변의 향제(鄕制, 옛 고향)인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을 지키고 있는 선생의 감회는 남달랐다. 학술대회를 개최한 사실을 아느냐고 묻는 선생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소리지만 기쁨이 묻어났다.

어렵사리 전화한 마음을 아셨는지 선생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선생은 먼저 당신의 고모, 다시 말해 나의 할머니 정희 여사의 존재를 확실히 확인시켜 주었다. 단 한번도 그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할머니가 저벅거리며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오는 듯 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빚은 잃어버린 역사의 연결고리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시집을 오기 전에 이미 친정에 가 있던 터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유다. 이 때문에 어머니조차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소간 이쪽저쪽에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일 뿐이다. 백부 역시 1994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에 대한 역사는 점점 희박해져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생이 가진 '기억 자료'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고모라지만 같이 살지 않았고 선생 또한 어린 나이였기에 흐릿한 기억 몇 조각만 파편처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선생의 고종사촌인 나의 작은 숙부에 대한 기억 한 자락을 전했다.

공통된 삶의 철학·개성 있는 삶 그릴터

▲ 제일 앞이 수주 변영로, 뒤가 일석 변영태. 그 뒤로 모윤숙과 김광섭.
ⓒ 변호달
숙부가 외가인 부천에 놀러 갔을 때 일화다.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폭격이 심해지자 외숙모(선생의 모친)가 만류했지만 길을 나섰다는 이야기다. 당시는 한국전쟁 통이었던 모양이다. 조카의 귀향길을 불안해하는 외숙모를 뒤로 하고 돌아선 길. 그 길을 되돌아보는데 5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선생은 50여년 만에 어머니를 대신해 숙부의 안위를 물었다. 혈육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숙부가 느껴야할 남다른 감회를 고스란히 대신 느낀 것이다. 선생은 숙부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직접 연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세월이 주는 서먹함일 뿐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아무래도 다른 이들보다 할아버지인 산강재에 대한 기억이 많았다. 일석과 수주에 대한 것은 고모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작았다.

산강재와 관련해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난 사실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얽힌 일화다.

이승만 정부가 조각(組閣)을 위해 인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산강재에게 법무장관을 맡아 줄 것을 청했다. 이때 산강재가 대뜸 "법무장관 말고 당신 자리를 내 놓으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산강재의 동생 일석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일석을 임명한 속뜻에는 산강재에 대한 회유가 담겨 있었다.

이는 건국초기 인재풀에서 부평삼변이 차지한 비중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산강재의 고집과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이승만의 청을 왜 거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변호달 선생과 통화내용을 정리하면서 부평삼변에 대한 글쓰기 방향이 얼추 잡혀가기 시작했다. 산강재를 중심으로 일석과 수주 3형제의 공통된 삶의 철학과 각자의 개성 있는 삶을 분리해 찾기로 했다.

이들의 삶은 세상에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대한 중복을 피하되 형제가 공통적으로 두각을 보인 반일 애국애족, 청빈낙도, 학문하는 삶을 조명할 계획이다.

특히 저서들을 꼼꼼하게 챙겨보려고 한다. 필요에 따라선 선대의 책에 대해 서평을 써보고자 한다. 학문의 깊이에 못 이겨 허우적거릴지언정 부평삼변과 교감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노자 교수 "부평삼변에 대한 좋은 저술 기원"

@BRI@한쪽에선 부평삼변과 우리 집안 사이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 등을 찾아 기록할 작정이다. 신변잡기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두 집안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시대적 배경을 중시해서 담을 것이다. 아울러 부평삼변을 연구한 학자들을 통해 그들이 우리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될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는 욕심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사실 그보다는 끝맺음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다. 이 와중에 산강재 연구에 열심인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도타운 격려가 힘이 됐다.

"부평삼변은 제게 당동벌이 식의 패거리주의가 난무했던 난시의 외로운 양심으로 인식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강재는 독립심이 매우 강해 그러한 역할을 모범적으로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변영태 선생이 1공 때의 국무총리직을 수락하자 산강재가 그를 만나주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을 보면 진정한 선비를 보는 것 같은 감입니다. 형제간의 정과 의리보다도 보편적인 양심을 먼저 생각하셨던 분이신 듯합니다. 부평삼변에 대한 좋은 작품을 쓰시기를 기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3회는 본격적으로 부평삼변의 궤적을 좇습니다. 산강재 가족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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