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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삼변(富平三卞). 좌로부터 변명만(卞榮晩)·영태(榮泰)·영로(榮魯) 형제.
ⓒ 변호달
부평삼변(富平三卞). 변명만(卞榮晩)·영태(榮泰)·영로(榮魯) 등 변씨 3형제를 일컫는 호칭이다. 인천 부평은 이들의 지리적 기반이다. 삼변을 어울러 이르는 이유는 이들 3형제가 자기 영역에서 남들과 비교되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누구 한 명을 앞세워 대표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뒤처지지 않았다. 이들은 철저히 한 시대를 풍미했고,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특히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해방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격정적으로 살다간 풍운아였다. 세 명의 천재는 그래서 부평삼변으로 불렸다.

@BRI@부평삼변의 궤적을 소상히 찾기로 결심한 동기는 뜻밖에도 돌아가신 아버지(故 유석하(柳錫夏)) 때문이다. 산강재(山康齋) 변영만 선생(1889~1954, 삼변에 대한 호칭은 즐겨 쓰던 호로 통일한다)은 이철자 여사(여성의 호칭은 '여사'로 통일한다)와 사이에서 정희(丁姬)와 상수(商壽), 1남 1녀를 두었다. 선친은 정희 여사의 슬하에 4형제 중 둘째다. 따라서 산강재가 선친의 외조부다.

선친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태어난 해다. 족보상으로는 내가 세상에 나오기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생후 약 백일 후쯤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선친은 어머니와 5남매를 남겨둔 채 35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는 것 이외는 아는 것이 없다. 집안 분위기상 선친에 대한 이야기는 암묵적 합의에 의한 금기나 다름없었다. 5남매 뒷바라지에 혼이 빠진 어머니에게 선친의 기억을 되살리라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송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흘러가던 세월 속에 가둬진 금기가 어느새 호박(琥珀)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가끔 어머니의 넋두리 속에 섞여 나온 선친에 대한 기억 몇 조각만이 맴맴 맴돌 뿐이다. 좋은 기억보다는 진저리쳐지는 것들이 많았다.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찾게 된 부평삼변의 궤적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아이를 얻고 키우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몸소 느끼다 보니 자연히 선친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아이를 혼낼 때나 아이들 앞에서 처신할 때 '과연 내 아버지는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하는 자문이 늘어났다. 그것의 실체는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게다가 선친과 동갑으로 칠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금기를 깨고 서둘러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함이다. 5남매를 길러낸 어머니의 불꽃 같은 삶과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자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할머니 정희 여사의 불행한 삶을 알게 됐고, 자연히 관심 영역이 그의 아버지 산강재, 그리고 일석(逸石) 변영태, 수주(樹州) 변영로의 삶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온전한 나의 가족사인 선친과 어머니의 삶 이야기가 부평삼변으로 확대되면서 다소 부담스러웠다.

▲ 족보와 가계도.
ⓒ 유성호
직계존비속관계인 할머니와 산강재는 몰라도 일석과 수주의 삶까지 쫓기에는 벅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단은 산강재를 중심으로 자료를 모았다. 인터넷을 뒤지던 중 귀중한 신문기사 한 꼭지를 만났다.

<경인일보>에서 2006년 6월에 '인천을 빛낸 인물 100인' 중 49번째로 수주를 조명하면서 옛터를 지키고 있는 변호달 선생과 인터뷰한 기사를 실은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선생은 다름 아닌 산강재의 종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할머니(변호달 선생과는 고모와 조카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부랴부랴 기사를 쓴 김아무개 기자에게 연락해 선생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물론 사전에 나의 존재와 연락하려는 이유에 대해 선생의 양해를 구한 후였다.

기쁜 마음과 달리 연락처를 받아 쥐고 난 후 다시 며칠을 생각했다. 뿌리를 알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야 모르는바 아니지만 과연 할머니의 아버지, 또 그 형제 이야기까지 담아야 하는지. 자문하고 또 자문했다.

그 사이 김 기자에게 두어 차례 전화가 왔다. 선생과 연락했는지, 또 언제 만나기로 했는지 등을 물었다. 연락을 취하지 않은 상태라고만 답했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김 기자에게는 중간에 징검다리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김 기자는 나중에 만나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성은 다르지만 명색이 혈족이고 다른 이도 아닌 부평삼변 후손들의 만남이 작은 뉴스거리가 됨직해 보인 모양이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에야 변호달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책을 엮는 데 있어서 선생에게 1차로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다. 전화를 받은 선생은 내 소개를 듣기도 전에 알아챘다. 휴대전화에 나의 이름과 번호를 입력시켜 놓은 터였다. 김 기자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그 정성에 무척 놀랐다. 따뜻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정연한 논리로 응대한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부평삼변 이야기를 한 곳에 엮는 여정 시작

선생과 통화를 통해 나는 기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꾸는 결심을 하게 됐다. 부평삼변에 대한 후대의 기록이 없어서 후손으로서 죄스럽게 생각했는데, 책을 쓰겠다고 하니 고맙다고 했다. 부평삼변에 대해 개별적인 조명작업은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3형제의 삶을 한 곳에 모았던 작업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팽팽하게 잠겨있던 봇물이 터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구상했던 작은 가족사는 터진 봇물에 완전히 잠기고 '부평삼변'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부평삼변을 한 곳에 모아보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써왔던 기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기에 약간의 긴장감도 있다. 무엇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산강재, 일석, 수주가 곳곳에 깊게 찍어 놓은 발걸음을 좇는 흥미진진함이 나를 들뜨게 했다. 이 글을 시작으로 부평삼변을 한 권의 책으로 고이 모시는 여정이 시작됐다. 다만 그들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기도할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2회는 변호달 선생과의 통화 내용을 중심으로 여정의 방향을 잡는 <글을 시작하며②>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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