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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폭풍이 지나갔다. 내 손으로 직접 14개월 걸려 지은 '안성 일죽 더아모의 집'을 일주일 걸려 직접 철거한 일이다. 생각하면 참 징글징글하다.

경기도 안성 일죽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와서 7년을 살면서 3번씩이나 살던 땅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았으니 나도 어지간한 사람인 모양이다.

2000년 12월에 안성 일죽으로 이사 왔다. 장애우 20여 명과 함께 장애인 시설을 지어 오게 된 것이다. 내가 건축하는 데 개입한 것은 아니고, 다만 종전에 경기도 광주시 시골마을에서 장애인 시설의 원장이 나에게 '원목'으로 부임해 시설을 책임지고 맡으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오자마자 이상한 전운(?)의 분위기가 감돌더니 마을 사람들이 '장애인 시설 입주를 반대한다'며 데모를 하고 난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우리 측에서 양보하기로 하고 장애인들은 원래 살던 경기도 광주시로 철수했고, 내 가족만 달랑 일죽에 남아 다른 곳으로 피신하다시피 이사 간 곳에 '일죽 더아모의 집'이 생기게 되었다.

▲ 처음 이사갔던 시골집. 여기에서 일죽자원봉사문화센터와 교회가 탄생했다.
ⓒ 송상호
2001년 4월 무일푼인 우리 가족(본인, 아내, 딸, 아들)은 신용카드로 1200만원을 대출받아 강 건너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천만원으로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을, 200만원으로 부친(지금은 고인이 된)의 집을 마련했다. 시골집이 많이 그렇듯 땅은 1년 임대료(도지세)를 주는 곳이었고, 집만 우리 건물이었다. 1천만원을 준 집이지만, 시골 흙집이었다. 물론 부친의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이사를 해야 했기에 찬 밥 더운 밥 가릴 여유가 없었다.

@BRI@그렇게 부리나케 이사하고 나니 당장 그 다음 달부터 나오는 카드 명세서엔 100만원 넘게 찍혀 나왔다. 가진 돈이 없어 막노동을 하며 갚아도 카드빚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학습지 교사를 해서도 다 갚지 못해 결국은 친척의 도움으로 2003년이 되어서야 그 빚을 다 갚게 되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있던 시골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일죽자원봉사문화센터'(일죽 더아모의 집의 예전 이름)를 함께 열어 독거노인과 지역 청소년,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를 섬기는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빚을 갚게 되고 난 2003년 4월에 또 한 번의 폭풍이 불어 닥쳤다. 우리가 사는 마을의 땅이 법원 경매로 넘어가게 된 것. 마을 종정 땅의 대표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마을 땅을 담보로 하여 대출을 받았다가 제때 갚지 못하고 법원 경매로 넘어가는 바람에 마을의 14가구가 걸려든 것이다. 도지세(1년 임대료)를 주던 집들은 모두 새로운 주인에게서 헐값으로 땅을 구매하여 위기를 넘겼지만, 우리는 가진 돈이 없어서 고민하며 1년을 보내었다.

1년을 고민하다가 드디어 2004년 4월에 땅을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살던 집을 허물면서 '봉사센터 겸 마을 청소년 공부방' 건축을 감행했다. 마을 아이들이 찾아왔지만 쉴 때도 없고 시골 재래식 화장실이라 다들 꺼리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아는 모든 곳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모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결국 '더아모의 집'을 짓지 못했다. 할당받은 땅이 90평이었건만 우리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땅은 70평도 채 안 되었던 것이다. 다니는 길이 앞뒤로 빠지고, 이웃집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땅 10평을 양보하고 나니 그렇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형 차량이 들어와야 건축을 할 터인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웃에 접해 있는 노부부들의 등쌀에 못 이긴 것도 한몫을 하게 되었다. 건축을 시도하려고 괜히 구건물만 허물어 토지만 평탄케 하고 나온 셈이었다(여기에도 수많은 사연이 있지만 생략한다).

그래서 다른 곳을 알아보다가 직전의 '일죽 더아모의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마을의 아저씨가 우리를 딱하게 여겨 땅을 빌려 준 것이다. 그 땅에다가 '더아모의 집'을 건축해도 된다는 허락과 함께.

그래서 2004년 7월에 직전의 '더아모의 집' 터에 옮겨서 공사를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공사는 누구의 도움 없이 나와 내 동생, 삼촌 셋이서 직접 시공한 것이다. 한 번도 건축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돈이 있어서 시작한 게 아니었기에 후원이 들어오면 후원이 들어온 만큼 짓고 쉬었다가 또 들어오면 지으니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건축 초보자들이라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더욱 시간은 지체되었다.

▲ 교회와 사택을 허물고 나니 갈 곳이 없어서 일죽 당촌리 아버지 집 한쪽에 있는 시골 흙집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화장실도 부엌도 보일러도 안되는 곳에서 14개월을 살았다.
ⓒ 송상호
그러던 와중에 일죽 당촌리에 모셨던 부친이 돌아가셨다. 2004년 8월의 일이었다. '더아모의 집'이 완공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폐쇄성 질환으로 돌아가신 게다. 그래도 우리의 공사는 계속되었다(더아모의집 홈페이지에 자세한 내용 참조).

짓다가, 짓다가 결국 다 짓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2005년 6월이 되어서야 완공을 하게 되었다. 완공을 한 후 직전의 '일죽 더아모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같은 마을 내에서의 이사였다.

'일죽 더아모의 집'에 입주하기 전에 우리 가족 4명은 6평 되는 시골 흙집 단칸방에서 14개월을 보내었다. 화장실도 부엌도 없어서 모두 임시로 만들어 사용했고, 겨울엔 보일러가 안 되어 전기장판 하나로 네 식구가 생활한 것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지냈나 싶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했던가. 51평 정도 되는 조립식 집에 들어오니 궁궐이 따로 없었다. 마을 아이들도 너무 좋아했다. 마을 아이들이 놀러 와서 마음껏 놀고 마음껏 자곤 했다. 그렇게 10개월 동안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 2005년 6월 완성된 '일죽 더아모의 집'에 놀러온 독거노인 분들과 마을 아이들이 더아모의 집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서의 약 10개월 동안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 송상호
하지만 그것은 정녕 꿈이었다. 2006년 3월에 땅주인이 또 바뀌었다. '더아모의 집' 땅이 1년 도지세를 주던 곳이었는데, 땅이 넘어간 것이다. 건축할 때에 땅주인의 허락을 받았던 게 아니라 땅 관리인과 계약을 맺어 허락을 받았던 게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 마을아이들이 '일죽 더아모의 집'에 와서 한 통의 비빕밥을 먹고 있다. 놀러와서 자고 가는 것도 다반사였다.
ⓒ 송상호
▲ 가끔 독거 할머니들을 더아모의 집에 모셔 온천 목욕을 시켜 드린 후 식사를 대접했다.
ⓒ 송상호
2006년 3월부터 새로운 땅주인과 승강이를 벌였다. 우리 측에선 우리가 깔고 있는 땅을 사고자 원했고, 새로운 땅주인은 거절해오면서 '자진철거'를 독촉해왔다. 2006년 12월 초에 드디어 새로운 땅주인이 법적 소장을 보내왔다.

▲ 내손으로 지은 '일죽 더아모의 집'을 내손으로 철거하는 중이다. 마음이 쓰리고 아파서 차마 철거 작업에 끝까지 동참하지 못하고 나머지 철거는 다른 분에게 전적으로 이임을 했다.
ⓒ 송상호
나는 땅주인이 우리에게 절대 땅을 팔 생각이 없음과 동시에 법적으로 처리하여 우리를 밀어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감지하고 우리가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이상 법적으로 진행되면 전 땅 관리인도 다치게 될 뿐더러 내 것을 좀 더 차지하겠다고 (보상을 더 받는 등의) 법적 투쟁을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 2006년 12월 27일 철거 이틀째 날 뼈만 앙상한 '일죽 더아모의 집'이다.
ⓒ 송상호
그래서 2006년 12월 24일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안성 금광면 시골 빈집으로 이사를 한 후 '일죽 더아모의 집'을 본인의 손으로 철거했다. '내가 뿌린 씨이니 내가 거둔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나의 무지가 한몫을 하긴 했지만 배타성의 고리는 생각보다 질기고 단단하지 않았나 싶다.

▲ 2006년 12월 24일 이사간 안성 금광면의 새로운 집이다. 지인이 소개해준 시골 빈 집이지만, 실내에 들어와보면 이모저모 아담하고 좋은 집이다.
ⓒ 송상호
내가 그동안 싸웠던 배타성, 그리고 그걸 넘어서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더아모의 뜻)'의 꿈은 일죽에선 일단 실패한 듯 보여진다. 하지만 지금 옮긴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집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듯하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말이다.

"사라졌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정신과 함께.

▲ 일죽에서 찾아오려면 버스를 2번 갈아타고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데도 일죽 더아모 아이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떡국을 먹고 있다. 이삿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어수선한 집인데도 아이들은 이틀 밤이나 자고 갔다.
ⓒ 송상호

덧붙이는 글 | * 경기도 안성 일죽에 위치한 '더아모의 집'은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으로써 본인의 가정집, 마을 아이들의 쉼터와 놀이공간, 독거노인과 마을 어르신을 섬기는 센터, 외국인 근로자 섬김 센터, 교회당 등의 다목적용 집입니다. 본인은 이곳의 목사입니다. (더아모의 집 http://cafe.daum.net/du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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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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