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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당들과 달리 대만의 중국국민당이 90년 가까이 존속하는 데는 자체 재정구조가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상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민당의 당영재산(黨營財産), 해외자산, 국내 부동산이라는 항산(恒産)이 국민당 당원들의 항심(恒心)을 유지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정당들은 자체 재정구조가 취약하기 때문에, '돈을 잘 만들어 오는' 보스에 의해 당이 좌지우지될 수 있었다. 보스가 당을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만들자고 하면, 당원들은 좋든 싫든 간에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3김 정치가 그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BRI@그런데 한국적 전통에서는 정당이 직접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정당 기업의 정치권력 남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을 것이고, 또 "정치 하는 사람들이 무슨 장사까지 하느냐?"는 조롱의 목소리도 나올 것이다.

그럼, 중국 대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만 국민당이 수익사업을 직접 경영할 수 있는 문화적 요인은 무엇일까? 한국 같으면 터부시되었을 '지배층의 상업 겸영'이 중국과 대만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 이유 중 두가지를 중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황제들 산림천택 등 직접 소유

첫째,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산림천택(山林川澤) 등을 직접 소유하고 거기서 재정 일부를 충당했다. 이 점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다 적용되는 점일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국가(혹은 황실)가 상당히 많은 재산을 직접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사>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명나라 홍치(弘治) 15년 즉 서기 1502년 현재 전국 경지면적 422만경(頃) 중에서 관전(官田)이 총 60만경이었다. 전국 경지면적의 7분의1이 관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건륭제 때는 황실이 소유한 황장전(皇莊田)의 규모가 7만경이었다. 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림천택은 역대 황실에서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재산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경우에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조세 외에도 자체적으로 충당하는 재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배층의 재정자립도가 높다는 것은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지배층은 본래 피지배층에게 기생하기 마련이다. 생산은 흔히 피지배층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지배층의 재정자립도가 높다는 것은, 지배층이 피지배층에 대한 기생에 의존하는 비중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수탈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 한편, 그것은 황실이나 국가가 민간경제에 개입함으로써 사회의 경제질서를 왜곡할 가능성도 높아짐을 의미한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전통 문화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중국은 서세동점 시기에 전통 문화를 비교적 잘 지켰기 때문에, 국가나 지배권력이 주요 재산을 직접 소유하는 전통이 국민당에게도 계승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과거 중국에서는 지배층 관료가 상업을 겸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지배층이 겉으로는 돈을 천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상인도 지배층의 천대를 받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관료와 상인을 겸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하드라마 <주몽>에서 소서노 부녀가 한나라 고위 관료 겸 대상인에게 접근하여 청탁을 하는 장면이 얼마 전에 방영된 적이 있다. 물론 이 드라마 자체는 픽션이지만, 과거 중국에서 지배층이 상인을 겸하기도 했던 정황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오이화 가문의 사례

관료와 상인의 겸직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로서 청나라 시대의 유명한 관상(官商)인 오이화(伍怡和) 가문을 들 수 있다. 중국 학자 장원칭(章文欽)이 1984년에 <근대사연구>에 기고한 '봉건 관상에서 매판상인으로 - 청대 광동행상 오이화 가족 분석(상)'[從封建官商到賣辦商人-淸代廣東行商伍怡和家族剖析(上)]을 살펴보면 그러한 분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오이화'란 표현은 이 가문의 성인 오(伍)와 기업의 명칭인 이화행(怡和行)을 조합한 말이다.

청나라 시대의 유명한 광동 13행(行) 중 하나인 오이화는 오국영(伍國瑩)에 의해 창설된 상인 기업으로서, 중국 근대사에서 정치와 상업을 오가면서 큰 발자취를 남긴 가문이다. 특히 1840년 아편전쟁 당시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가 해임된 후에는 현장인 광주(廣州)에서 중국-영국 양쪽을 오가면서 투항과 타협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이화 가문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한국의 상인 전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집안 사람들은 연납(捐納)을 통해 관직을 사기도 했고, 또 재력을 바탕으로 자녀들에게 과거 준비를 시키기도 했다. 중국에서 연납은 상인과 관료의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상인이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한국적 전통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 집안의 오원규(伍元葵) 형제가 남긴 시를 보면, 중국에서는 상인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춘관 시험에 다시 응시했다가(春官再試)
돌아오니 기나긴 밤뿐이로구나!(歸長夜)
십년을 걸어 온 길이 막혔으니(十年來道途梗塞)
애석하다, 고작 진사시험 두 번 본 것 뿐인데(惜只能兩試禮闈)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진사 시험에 2차례 응시하는 동안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최근 시험에서 또 낙방한 사실을 두고 애석해하는 것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시의 작자가 상인 집안 사람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 같으면, 상업과는 무관한 선비 집안 사람이 쓴 시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조선 상인의 집안에서 남긴 시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입은 것에 대해 애통해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상인의 자녀들이 과거에 실패해서 애통해하는 것은 한국적 전통에서는 상당히 낯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와 상인의 겸직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중국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적 전통에서는 지배층 관료가 상업을 직접 경영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민당도 이러한 전통의 영향을 받아 사업을 직접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황제가 산림천택을 직접 소유하고 또 관료가 상인을 겸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의 영향 때문에, 중국국민당이 직접 회사 경영에까지 나서고 나아가 고도의 재정자립에 성공했으며, 또한 그 때문에 지난 90년간의 외풍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배층이 관직의 명의를 내걸고 수익사업에 고도로 참여하는 이러한 전통에는 장단점이 모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점으로는 지배층의 피지배층 수탈이 그만큼 완화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단점으로는 황제나 관료의 경제활동으로 인해 민간경제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재정적 구조가 취약한 한국의 정당들이 보스의 전횡이나 정치적 외풍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정강·정책을 지키면서 '장수하는 정당'이 될 수 있으려면, 일정 정도는 재정 자립을 위한 제도적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원들의 항심(恒心)을 확보하려면, 한국 정당에도 항산(恒産)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당이 꼭 수익사업에 나서지 않더라도, 선거득표율에 관계없이 진보정당 등을 재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당이 당원들의 당비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당의 재정자립을 확보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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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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