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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과 국권침탈 이후 농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조선 지주계급의 상당수는 일제시대에 자본가 겸 지주가 되거나 혹은 자본가로 전환하였다. 김성수 집안도 그중의 하나였다. 이 집안은 1920년대 이후 지주 겸 공업자본가로 변신했다.

1910년대 중반 일본에서 돌아온 김성수는 방직회사 설립을 의욕적으로 준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 속에서 일본의 섬유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개항 이래 김성수 집안은 일본의 동향에 안테나를 맞추고 있었다.

와세다대 출신의 젊은 재원(才媛) 김성수(당시 28세)의 의욕적인 준비 끝에 경성방직(지금의 주식회사 경방)은 1919년에 일제 당국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창립총회는 1919년 10월 5일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에서 열렸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경성방직

▲ 경성방직 창립총회가 열린 명월관 지점 태화관.
ⓒ <경방 80년>
설립 당시의 자본금은 100만원(圓)이었고, 제1회 납입주금(納入株金)은 25만원이었다. 실질적인 사업 밑천은 25만원이었던 셈이다. 사장에는 친일파 귀족인 박영효(철종의 사위, 1861~1939년)가 임명되었다. 김성수는 취체역(이사)을 맡았다. 실질적인 책임자인 김성수 자신은 뒤로 물러서고 대신 박영효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갑신정변(1884년) 이후 일본에 체류할 때에 야마자키로 개명한 바 있는 박영효는 동학농민전쟁(1894년) 이후 제2차 김홍집 내각(친일내각) 하에서 내무대신을 지냈고,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대신이 되었으며, 일제 강점 이후에는 후작·중추원 고문·일본귀족원의원이 된 인물이다. 그는 경성방직 초대 사장일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초대 사장이기도 하다.

박영효가 경성방직 사장으로 추대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총독부와 상대해 까다로운 회사설립절차를 통과하자면, 박영효 같은 친일파 거두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 경성방직주식회사가 발행한 <경성방직 50년>에서는 "이 분(박영효)을 사장을 모신 것은 동지적인 뜻만 아니라, 회사 설립의 어려움을 커버하기 위한 뜻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박영효에 이어 제2대 경성방직 사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였다. 이후 일제에게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의 친일행위를 한 그는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반민특위가 사실상 와해된 이후에 무죄 판결을 받고 옥문(獄門)에서 나온 인물이다.

그런데 창립 초기부터 김성수와 경성방직은 난관에 직면했다. 1차 대전 당시만 해도 호황을 띠던 섬유산업이 막상 전쟁이 끝나자마자 공황·불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섬유산업이 불황에 접어선 국면에서 경성방직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업에 들어가기 전에 모험삼아 시도한 삼품(三品, 면화·면사·면포) 선물거래에서도 경성방직은 큰 손실을 입었다. <경성방직 50년>에 따르면 그 손실은 회사로서는 너무 큰 것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뜻밖의 손실 때문에 여러 가지 차질이 빚어졌다. 본사 건축마저 중지해야 했다. 공사 중지에 대한 댓가로 3600원의 손해배상금까지 지불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 사내(社內) 중역진에서마저 일대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때는 자폭론까지 대두되는 형편이었다. …… 아직 공장을 세우기도 전에 당한 일이라,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생기기 전에는 자폭론이 대두되지 않았더라도 도양(倒壤, 무너지다)될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경성방직 50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창립 초기의 경성방직은 섬유계의 불황과 선물거래 실패로 회사 문을 도로 닫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처했다.

사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이 일본인과 경쟁해 자본가로 성장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시원(방송대 총장, 경제학 전공)의 논문인 '일제하 대지주의 존재형태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일제시대의 조선인 대지주 880명 중에서 1942년까지 자본가로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도 안 되는 43% 정도다. 조선인의 기업 경영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통계 자료다. 경성방직 설립 초기의 김성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경성방직은 무너지지 않고 되살아났다. 좌초의 위기에 처한 경성방직호(號)를 건져낸 인물은 설립자 김성수였다.

"여기서 다시 큰 무게로 나타난 것이 김성수 씨다. …… 앉아서 회사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경성방직 50년>.

정상적인 경우라면 파국을 면치 못했을 텐데, 경성방직은 회사 설립 7년만인 1926년경부터 결국 조업에 들어가게 된다. 어찌보면 기적적인 일이고, 또 어찌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럼, 김성수는 어떻게 경성방직을 살릴 수 있었을까? 그가 1920년 7월 조선식산은행에서 8만원을 대출받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업이 정상화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인 1926년경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김성수의 의지와 능력이 경성방직이 살아나는 데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

당시 김성수가 처한 객관적 조건은 ▲신흥 섬유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과 ▲식민통치 하의 조선인 자본가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수의 주관적 의지로 1920년대의 객관적 조건을 극복하였음을 보여주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데 이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 김성수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경성방직을 되살렸을까?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경성방직이 좌초의 위기에 처한 1920년경부터 조업이 정상화된 1926년경 사이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 6년여의 시간 동안에 동아일보(설립자 김성수)와 총독부, 김성수와 총독부, 경성방직(설립자 김성수)과 총독부 사이에서 묘하고도 활발한 관계 맺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제시하면 이렇다. 1920년경부터 1926년경 사이에 ▲동아일보는 총독부를 제한적으로 비판했다. ▲김성수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과 부적절한 만남을 자주 가졌다. ▲일제 당국은 경성방직에게 지원금을 제공했고 경성방직은 조업 정상화에 성공했다.

김성수와 조선총독부와의 묘한 관계맺기?

▲ 1921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인 ‘조선인 본위 산업정책의 의의’.
ⓒ <동아일보 사설 선집>
김성수가 설립한 <동아일보>는 1920년대에 조선 총독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동아일보> 1922년 11월 12일자 사설 '경제적 도태', 1924년 11월 11일자 사설 '조선인의 빈곤문제', 1925년 8월 15일자 사설 '경제정책의 원인- 현상 및 대책' 등에 나타난 <동아일보>의 총독부 비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의 조선경제정책은 조선의 경제를 도태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 대자본은 조선인 소자본을 압도함으로써 조선의 부원(富源)을 장악하고 조선 산업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조선 민족이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으므로 일본의 경제정책은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인을 보호하는 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동아일보> 사설은 한편으로는 일제를 비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조선인을 보호하는 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부분은 '조선인 자본'을 보호하라는 주문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1921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인 '조선인 본위 산업정책의 의의'를 보면, <동아일보>가 총독부에 무엇을 주문하는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핵심 2가지는 ▲조선의 경제적 이익을 조선인의 수중으로 돌리라 ▲일본인 대자본과 조선인 소자본의 자유경쟁을 차단하고 조선 자본을 특별히 보호하라는 내용이다.

1920년경부터 1926년 사이에 또 다른 사건도 있다. <동아일보> 설립자 겸 제2대 <동아일보> 사장인 김성수는 제3대 일본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와 잦은 만남을 가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누군가를 글로 비판하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직접 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직접 <동아일보> 사설을 쓰지 않았다 해도 자신이 세운 신문사에서 총독부를 비판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 총독을 바로 코앞에서 대면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김성수와 사이토 총독의 잦은 만남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편으로 <동아일보>사장과 총독이 자주 만나는 것 자체가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다. 그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더군다나 3·1운동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조선인 신문의 실력자와 신임 일본 총독이 만남을 자주 갖는 것은 분명 남의 눈총을 살 만한 일이다. '부적절한 만남'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도대체 몇 번이나 만났을까? 종래 비공개로 남아 있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서한 및 관계 서류 등을 분석한 일본 츠쿠바 대학의 강동진 교수(현재 작고)는 1980년에 저술한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에서 김성수와 사이토 총독의 면회 횟수를 제시하였다.

김성수와 사이토 총독의 만남

▲ 김성수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면회 횟수. 밑줄 친 부분이 김성수의 면회 횟수다. 여기서 재등실은 사이토 마코토의 한자 발음이다. 김성수 부분을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간 부분을 편집했다.
강동진의 연구에 따르면, 1919년 8월부터 1921년까지 사이토 총독과 면회한 조선인은 총 219명이었다. 이 시기에는 김성수의 면회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음 시기인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사이토 총독과 면회한 조선인은 총 247명이었다. 이 시기에 김성수의 면회 횟수는 6회였다. 면회 횟수를 놓고 볼 때에, 조선인 중에서 공동 31위다. 그 다음 시기인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사이토 총독과 면회한 조선인은 총 373명이었다. 이 시기에 김성수의 면회 횟수는 7회였다. 조선인 중에서 공동 46위다. 그러므로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김성수는 사이토 총독과 도합 13회 면회한 것이다.

그럼 사이토 총독은 김성수을 왜 만났을까? 이는 사이토 총독이 1920년경에 구상한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대책은 3·1운동으로 파괴된 친일세력을 재구축하고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동진 교수가 요약한 부분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명히 가려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걸고 일을 해낼 핵심적 친일 인물을 골라 귀족·양반·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친일단체를 만들게 한다.
②조선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 인물을 많이 얻는 데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③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소작쟁의를 통해서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기도 하고, 또 일본 자본을 도입시켜 그것과의 맥락을 통해서 매판화시켜 일본쪽에 끌어들인다.


이에 따르면 신임 조선총독은 3·1운동으로 파괴된 친일세력을 재건하기 위하여 "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명히 가려내고" 또한 이들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해 친일 인물로 양성하고, 조선인 부호에게는 "일본 자본"을 연결시켜 주겠다는 구상이 담겨 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사이토 총독은 3·1운동 이전의 구(舊)친일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젊은 피'를 친일파로 대거 수혈하는 데에 착수하였다. 그가 취임 후 6년 동안 839명의 조선인들을 면담한 것은 바로 그러한 목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총독을 면회했든지 간에, 30대 초반의 ‘젊은 피’ 김성수를 만나는 일본 총독은 위와 같은 구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총독을 면회한 조선인 중에서 김성수가 공동 31위와 공동 46위에 올랐다는 것은 일본 총독이 자주 만나보고 싶어할 만큼 그가 가치 있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아일보>가 일본 총독부를 비판하던 그 시기에 총독과 김성수가 이처럼 자주 만났다는 것은 <동아일보>의 비판이 총독과 김성수의 관계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20년경부터 1926년경 사이에 경성방직과 총독부 사이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총독부의 경성방직 자금 지원

▲ 경성방직이 좌초 위기에 처한 때로부터 완전 정상화를 이룬 시기까지 동아일보-김성수-경성방직 대 조선총독부 사이에서는 석연치 못한 관계형성이 이루어졌다.
ⓒ 김종성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19년에 설립된 경성방직은 출발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설립 7년만인 1926년경부터 완전 조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불가사의한 기사회생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경성방직의 회생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 당국의 자금 지원이었다.

일본은 1924년부터 매년 경성방직에 자금을 제공하였다. 1924년에는 2만 8천원, 1928년에는 2만 7천원을 지원하였다. 경성방직 설립 당시 사업 밑천이 25만원이었으니까, 사업 밑천의 10%를 웃도는 거금이 매년 일제 당국에서 경성방직으로 지원된 셈이다.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을 그냥 적기가 쑥쓰러웠던지, <경성방직 50년>은 그 부분이 다음과 같이 처리돼 있다.

"(그 돈은) 표면상으로는 산업장려금의 명목을 띠고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우리나라의 산업을 감시, 개입하고자 하는 배포가 있었던 것이다."

자금 지원을 받은 경성방직 입장에서도 어딘지 개운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924년부터 일제의 자금이 투입되었고, 경성방직은 1926년경부터 완전 정상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경성방직이 좌초의 위기에 처한 1920년경부터 1926년경까지 동아일보-김성수-경성방직 대 총독부 사이에는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다. 이 시기에 <동아일보>는 일제를 제한적으로 비판했고, 김성수는 일본 총독을 13번이나 면회했으며, 경성방직은 일제 당국의 자금 지원 등에 힘입어 회사를 살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김성수의 옹호자들은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은 전혀 별개"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내용들은 이를 인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자신이 세운 <동아일보>가 일본을 비판하는 시기에, 역시 자신이 세운 경성방직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쪽으로 비판하면서, 또 한 편으로 지원을 받는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선인이 자본가로 성공하기 힘들었던 일제시대에 김성수가 조선의 대표적인 자본가로 성장한 데에는 위와 같이 이해하기 힘든 과정들이 있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 미스터리를 해명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5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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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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