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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 아차산? 망우산?
| | ▲ 그래도 가을은 가을입니다. | | ⓒ 이희동 | |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 집에서 빈둥빈둥 그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는데 동네 뒷산을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한 말씀하신다.
“바람이 불어선지 깨끗한 게 멀리까지 잘 보이던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이것저것 챙긴 뒤 길을 나섰다. 올 가을 들어 단풍을 구경한 적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서울 날씨가 좋으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서울 중랑구 중곡동과 면목동을 끼고 있는 용마산이다.
용마산을 처음 갔던 것은 올 5월이었다. 처음 아차산을 오르겠다고 시작한 산행이었지만 그 산행의 끝은 용마산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동네 사람들에 따라 산의 이름이 제 각각이었다. 광진구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아차산의 정상을 용마산이라고 불렀고, 중랑구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계곡을 사이로 아차산과 용마산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저 멀리 구리시나 망우리 쪽에서 올라온 사람은 그 지역의 산들을 통틀어 망우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이곳 산들이 국립공원 등으로 지정되지 않은 까닭에 구전으로 내려온 각 지역의 호칭들이 난립한 결과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표준화를 거치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해석과 견해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다양함은 때론 도약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삶의 풍요로움을 보장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려니.
어쨌거나 5월 초, 처음 올라간 용마산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산이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산을 타기도, 보기도 좋았지만 정작 날씨가 뿌연 바람에 산밑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어렴풋이 보니 불암산부터 시작해 수락산, 봉화산, 도봉산, 삼각산, 북악산, 인왕산, 안산, 남산, 관악산, 청계산까지 서울의 준봉들이 모두 보이는 위치이건만, 너무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러니 오늘같이 날씨가 좋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날 수밖에.
용마산 폭포공원의 명암
| | ▲ 용마산 폭포. 인간의 오만함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한 오만함. | | ⓒ 이희동 | |
| | ▲ 채석으로 잘려나간 빈 공간은 공원으로 치유될까요? | | ⓒ 이희동 | |
전철로 1시간이나 걸려 7호선 용마산역에 도착했다. 거울에 비치는 캐주얼 복장의 내 모습이 참으로 낯선 만큼 반갑다. 그 복장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란.
지하철역에서 올라와 용마산 등산로로 곧바로 가기보다는 용마산 폭포공원에 먼저 들렀다. 지난번엔 너무 늦은 탓에 폭포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은 혹시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역시 섣부른 기대일 뿐, 폭포는커녕 물방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축구장에서 열심히 공을 차는 이들의 고함소리와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 공원으로 산책 나와 망중한을 즐기는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폭포는 매일 11시부터 13시까지, 15시부터 17시까지 가동되지만, 10월부터 4월까지 동절기에는 아예 가동을 않는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물이 쏟아지면 그나마 나으련만 그 조형 틀만 앙상하게 남은 용마공원 인공폭포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썰렁했다. 폭포는 채석이 끝나고 우툴두툴하게 남겨진 바위 층과 함께 어우러져 오히려 괴기스러움을 조성하고 있었다. 1961년부터 시작해서 1988년까지 이어져 온 채석으로 패일 대로 패인 용마산. 채석이 한창일 당시 서울 시내의 돌은 모두 용마산 것이라 했다니 그 규모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리고 남겨진 흔적.
그곳에 폭포공원을 조성한 것은 과연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관료들은 다 망가진 산을 폭포 공원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채석장으로 뭉그러진 지역 민심을 다잡고 생색도 낼 수 있다고 계산했겠지만 정작 그 결정엔 산 자체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망가진 자연에게 회복할 시간마저 주지 않고 인공폭포를 조성함으로써 인간의 오만함을 덮으려는 그 오만함. 앙상하게 서 있는 인공폭포의 흔적은 현대문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폭포 밑의 고인 물이 썩을까 물까지 빼내는 그 세심한 배려라니.
용마산을 오르며
| | ▲ 이 시대의 욕망, 아파트 숲. 그나마 저 뒤로 보이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위안입니다. | | ⓒ 이희동 | |
공원을 지나 산 중턱에 올라서니 산밑으로 요즘 한창 말 많은 아파트 숲이 펼쳐졌다. 성냥갑 같은 삶. 다른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일진데, 우리 사회에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아파트를 그리도 선호하는 것일까. 생활이 편해서? 아파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시적 기능 때문에?
그건 어쩌면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터득해 나갔던 생존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주거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열악한 사회 안전망 속에서 내 집 하나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소수의 벼락부자가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나도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의 만남.
게다가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채 원칙을 지키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우리 역사의 교훈은 사람들을 너도나도 부동산 시장으로 내몰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파트 가격이 버블이 될 수밖에. 저 멀리 보이는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로 우뚝 서 있는 타워펠리스 바로 그곳이 이 시대 욕망의 절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을 접고 다시금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갑갑한 도시의 회색 공간 너머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의 명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5월에는 뿌연 날씨로 실루엣 밖에 보이지 않던 준봉들 이었건만 오늘은 색색의 모습으로 우리네 삶의 공간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명산의 파노라마만으로는 천하명당이 될 수 없는 법. 그곳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로부터 유유히 흐르는 중랑천과 그 중랑천과 합세하는 청계천. 그리고 그 만남의 끝에는 도심을 가로질러 도도히 흐르는 한강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흐르며 이 땅의 온갖 애환을 품에 안았을 한강.
| | ▲ 묵묵히 흐르는 강물. | | ⓒ 이희동 | |
산을 좀 더 오르다 보니 한 무리의 돌무더기가 나왔고 그 앞에는 고구려 보루성의 유적이니 발굴하기 전까지 훼손치 말아 달라는 게시판이 놓여 있었다. 아차산성을 비롯해 신라·고구려·백제의 주요 요충지로서 많은 이들의 피를 요구했던 이 곳. 그러나 그 치열함은 온대간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우두커니 서 있는 회한뿐이었다. 이미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남아 있는 존재의 미련.
용마산에서 바라본 일몰
| | | ▲ 석양녘에 비친 좁은 산길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만듭니다. | | ⓒ 이희동 | 정상께 올라가니 해가 지기 시작했고, 온 천지는 빨갛게 물들어 갔다. 저무는 태양을 보며 다시금 뒤돌아보는 나의 궤적들. 떠오르는 태양이 희망이라면 지는 태양은 곧 반성이요, 성찰이다. 하루에 한 번씩 벌어지는 기적은 혹자에겐 지겨운 일상의 시작이요, 끝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것은 또 다른 내가 태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매일 보는 기적이라도 역시 느낌은 그 장소에 따라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빌딩 숲 사이로 보는 일몰과 산 위에서 보는 일몰이 어디 같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알맞게 뿌연 날씨는 저무는 태양의 노을 색깔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용마산을 자주 오른 듯 보이는 주위의 사람들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실로 오랜만인지 모두들 탄성에 탄성을 거듭하고 있을까. 오늘 이 시각의 용마산행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저물기 시작한 태양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다음의 기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잔영 만이 남아 산에서 내려오는 나의 발걸음을 비추었다. 하나 둘씩 켜지는 도시의 불빛들. 비록 보고 싶은 서울의 야경이었지만 아무 장비도 없이 올라온 내가 언감생심 바랄 바는 못 되었다. 아쉽지만 내려오는 수밖에.
용마산. 아마도 해 지는 기적을 떠올린다면 오늘 용마산에서의 그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듯싶다.
| | ▲ 용마산에서 바라본 일몰. | | ⓒ 이희동 | |
덧붙이는 글 | 유포터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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