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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게 문을 닫은 고모역
ⓒ 이동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노래 '비나리는 고모령'! 이제 그 노래의 모티프가 되었던 중요 배경 중 하나인 고모역이 81년의 역사를 묻고 아득한 망각 속으로 떠나갔다.

지난 2006년 11월 1일 오전 9시 정각, 고모역에서 근무하던 철도청 직원들은 각종 장비와 도구들을 싣고 완전히 철수했다. 흉가처럼 버려져 있는 그 고모역을 나그네는 일부러 찾아가 보았다. 주인 잃은 우편물은 문틈에 끼워져 있고, 썰렁한 역사 사무실 내부는 마치 수몰지구 주민들이 떠나버린 집처럼 여러 물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개발과 근대화의 회오리가 이 땅을 휘몰아친 지 어언 몇 해이던가. 그러한 폭풍은 이곳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에 있는 고모역에 까지 불어닥쳤다. 고모역을 가슴 속에서 언제나 살뜰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 그리고 한국인의 대표 가요 '비나리는 고모령'의 무대가 된 배경지역을 찾아가 보려는 사람들에겐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 주인 잃은 우편물
ⓒ 이동순

늦가을 은행나무가 온통 노란 치장을 하고 있는 계절, 고모역은 찾는 이의 발길이 뚝 끊어진 채 홀로 쓸쓸히 서 있었다. 이따금 질풍처럼 통과해 가는 열차의 굉음만 요란할 뿐, 굳게 문을 닫은 고모역은 마치 홀로 된 늙은이의 적막한 표정처럼 철로 변에 서 있었다.

▲ 텅 빈 대합실
ⓒ 이동순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분주히 오고갔을 역 대합실은 텅텅 비었다. 차표를 끊기 위해 대기하던 창구 위의 마이크에선 금방이라도 "어디까지 가십니까?"라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 매표소 창구 위의 마이크
ⓒ 이동순

고모(顧母)는 말 그대로 어머니를 보살핀다는 뜻이 담겨 있는 지명이다. 이곳 고모는 원래 경북 경산군에 속했으나 행정통폐합 때 대구시 수성구로 편입되었다. 고모 지역 주민들은 고모역에서 통근차나 완행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대구역까지 시내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특히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집안의 텃밭에서 가꾼 채소와 곡식을 머리에 이고 대구의 번개시장으로 나가서 푼돈을 만들어오곤 했었다.

한국전쟁이 나고 많은 피난민들은 이곳 경부선 고모역을 거쳐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열차가 고모역에 멈추었을 때 그들은 틀림없이 고향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지었으리라. 어머니를 남겨두고 홀로 떠나온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프고 서러운 심정을 가누지 못했으리라.

작사가 유호씨는 부산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이곳 고모역에서 잠시 멈추었을 때 멀리 산모퉁이 부근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무명수건을 목에 두르고 먼길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자꾸만 따라나왔다. 아들은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짐짓 앞만 보며 "어무이요! 어서 들어가시이소!"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따라가며 "어떻게든 네 한 몸 잘 건사해야 한데이, 부디 몸조심 하거래이!"라고 말씀하셨으리라. 두 사람이 주고받던 대화 속에는 경상도 특유의 정겨움이 담뿍 서려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유호씨는 고모령을 가지도 않고 지도에서 우연히 찾은 고모란 지명에서 착상을 얻어 가사를 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어느 설이 정확한 지는 확인할 길 없다).

▲ 부산 영도다리 입구의 현인 노래비와 동상
ⓒ 이동순
이런 장면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는 노래가 바로 '비나리는 고모령'(유호 작사·박시춘 작곡·현인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50년대 한국전쟁에 시달리고 지친 당시 민중들의 가슴을 쓰다듬고 위로해준 대표적인 가요 중의 하나다. 1960년대의 재 취입된 음반에서는 성우 이창환과 고은정이 모자간의 대화를 정겹게 엮어가고 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이 노래가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던가? 험한 세월에 험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 노래를 눈물로 부르며 그들의 아픈 가슴을 달래곤 했었다. 심지어는 이 노래가 발표되기 훨씬 전인 일제 말 조선여자정신대란 이름으로 끌려가서 온갖 굴욕을 강요당했던 이른바 위안부 할머니조차 이 노래를 가슴이 꽉 메어올 때마다 즐겨 부르곤 했었다는 어느 TV 프로그램을 본 적도 있다.

1969년에는 김희라, 문희, 박노식이 등장하는 영화 <비나리는 고모령>이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 제작된 적도 있었다.

대구의 파크호텔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현재 '비나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서 있다. 호텔 옆쪽으로 돌아서 팔현 마을로 이어지는 높은 고개가 바로 고모령(顧母嶺)이라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펼쳐진 이후 고모령 높은 산길은 많이 낮추어졌다. 죽령, 이화령 따위의 높은 고개에 비하면 감히 '령(嶺)'이란 이름을 붙이기가 낯간지러울 정도다.

해발 70m 정도는 될까? 하지만 한국인이 넘어왔던 가파른 세월의 높고 아슬아슬한 고개를 상징하듯 고모령은 한국인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산언덕이다. 우리 겨레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언덕을 넘어야 할 것인가?

▲ 페인트 빛깔이 선명한 소방도구들
ⓒ 이동순

쓸쓸하고 텅빈 고모역 주변을 다시 한 바퀴 둘러본다. 비상시에 사용하려던 소방도구는 붉은 페인트 빛깔이 선명한 채 여전히 벽에 걸려 있다. 역사 앞마당의 화초들은 꽃망울을 매단 채 말라 시들어가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뚝 끊어졌다. 구름다리로 올라가는 계단도 출입금지 푯말이 붙은 채 차단되었다.

고모 지역 주민들은 몹시 허탈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이 고모역 앞마당은 마을사람들의 쉼터 였심더. 아이들의 단골 놀이터이기도 했지예. 계집애들이랑 첫사랑의 추억도 서려있어예."
"이곳보다 의미가 훨씬 적은 동촌역도 보존운동을 펼치고 있다는데, 고모역을 단지 식당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은 너무도 서운한 발상입니더."


▲ 몹시 허탈한 심정의 고모동 주민들
ⓒ 이동순

용도 폐기된 고모역을 철도청에서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여기에 관심을 가진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은 민족의 노래인 '비나리는 고모령'을 기념하는 기념관이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철도청 당국이 이곳을 식당 운영하려는 사업자에게 불하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무덤처럼 고요한 고모역 앞 쓸쓸한 광장으로는 먼지 바람만 휩쓸어갔다. 가수 현인도 가고, 고모역도 추억 속으로 떠나가 버렸다. 제발 허물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파괴만이 능사는 아니질 않은가? 너무도 적적하다 못해 괴괴하기까지 한 고모역 대합실 앞에 선 나그네는 질풍처럼 통과해 가는 열차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고모역을 통과하는 무심한 열차
ⓒ 이동순

덧붙이는 글 | 인터넷 다음카페 <생명과 사랑의 시>(http://cafe.daum.net/leedongsoon)에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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