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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때 나는 처음 쓰는 동화 한편을 붙잡고 계속 '씨름'중이었다. 유년부 반사 시절 나를 거쳐 간 아이들이 그리워서 선물로 주려고 시작한 작업이었다(유년부 부장 집사님은 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반사를 맡겼었다. 아마도 교회가 작아서 그랬으리라).

ⓒ 창작과비평사
내가 속한 교단의 지도자가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여해서 독재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낀 나는, 목회자의 꿈을 접고 재수를 해서 다시 일반대학에 들어갔지만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했던 내가 교회도 발길을 끊었다. 대학 1학년을 그렇게 혼돈 속에 보내고 나서 붙잡은 것이 동화 쓰기였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막혔다. 얘기는 머릿속에서 뱅뱅 돌 뿐 글자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혹시 동화 쓰는 법 같은 게 나와 있나?"하는 생각으로 책방을 뒤지다가 찾은 것이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작과비평사)이었다.

아동문학평론집이라고 해서 읽으면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는데, 한참 읽어가다 보니까 문학평론이라기보다는 '도리도리 어린양'하는 아동문학(책에서는 '유희정신'으로 쓴 것이라고 했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내가 쓰려던 동화에서 허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수개월동안 준비해 온 나의 동화가 한 쪽 두 쪽 찢겨져 나갔다. 섭섭하지만 속이 후련했다. 결국, 동화를 제대로 써보자고 집어 들었던 책 때문에 동화 쓰기를 접게 됐다.

하지만 글쓰기는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쩌면 글쓰기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학평론집을 몇 권씩 봤으면서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표지
ⓒ 길벗어린이
<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극찬한 책이 있었다.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이 그것. 읽고 또 읽었다. 창작과비평사에 전화를 걸어 이오덕 선생님의 주소를 얻어내 편지를 썼다. "선생님의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통해 큰 가르침을 받았고,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강아지똥>을 읽으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 권정생 선생님의 주소를 알려주시면 ..."

스물의 나이에 혼돈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실낱같은 빛을 얼마나 갈망했으며 그 빛을 던져준 이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그 후 이오덕·권정생 선생님과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직산초등학교(오래 전 일이라 이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의 교감으로 계실 때 학교에 딸린 사택으로 찾아뵙고 하루를 묵었다.
직접 기르신 푸성귀로 차려주신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당부하셨다. "권정생 선생님은 몸이 안 좋으십니다. 그러니 찾아뵙더라도 말씀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일직교회 종지기 집사로 계신 권정생 선생님을 조심스레 찾아뵌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온 몸이 결핵균으로 뒤덮여 있어서(나는 폐에만 결핵이 있는 줄 알았지 골수결핵 위결핵이 있는 줄은 몰랐다) 식후에는 독한 약을 한 움큼씩 먹어야 하고, 기운이 없어서 하루에 원고지 10장을 못 쓰는 분. 된장과 보리밥 때문에 살았지 고기를 먹었다가는 벌써 죽었을 거라고 하셨다. 치열하다면 정말 치열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면서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부드러움이 권정생 선생님에게는 있었다.

내가 권정생 선생님을 첫 번째 큰스승으로 꼽는 까닭은 그분의 작품 때문이 아니다. 문학과 삶을 일치시킨 분이며, 그 분의 삶은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왔고 지금도 항상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쓴다.

덧붙이는 글 | 권정생 선생님은 일본 작가 엔또 슈샤꾸의 <침묵>을 권했고, 당시 울진 죽변교회에 계시던 이현주 목사님의 주보를 보여주셨다. 엔또 슈샤꾸는 내가 고등학생 때 김은국의 소설을 통해 빠져있었던 실존주의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이현주 목사님은 당시, 멕시코 농부들이 성경을 그들 생활에서 나름대로 해석한 '민중의 복음'을 번역 연재하면서(나중에 종로서적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나와 같은 '주보신자'를 두고 계셨다.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 - 어린이문학의 여러 문제, 굴렁쇠 생각 2

이오덕 지음, 도서출판 굴렁쇠(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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