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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무문. ‘어둠의 자식들’이 좋아했던 문이다
ⓒ 이정근
스산한 겨울바람이 매서운 동짓달. 길거리엔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궁성에서 뻗어 내린 37년생 느티나무에 매달린 이파리가 찬바람에 떨고 있다. 사위는 고요하고 둥근 보름달이 구름에 달 가듯이 흘러가고 있다.

둥 둥 둥 1고(鼓)의 북소리도 한참 지났으니 2고(밤 9∼11시)쯤 되었을까. 백악을 휘감아 내려오는 북풍을 등에 업고 관복자락을 휘날리며 신무문 모퉁이를 돌아 남쪽으로 내려오는 무리가 있었다.

"문을 열어라!"

영추문에 멈춘 한 떼의 무리들이 문루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화들짝 놀란 수직 군졸들이 문루에서 내려다보니 어둠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복색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사람들임엔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 저잣거리 김서방네 집인가? 임금이 계신 궁성이 아닌가? 이 야심한 밤에 아무에게나 대궐의 문을 열어주었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 않는가.

그 무렵, 어둠 속에서 경회루를 지나 영추문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밖에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문을 열어라"하고 고함치며 호령이고, 궐내에선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나이가 양팔을 휘저으며 뛰어오고 있으니 무슨 변고임은 틀림없다. 군졸 3명을 거느리고 영추문을 파수하던 수문장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기별청
ⓒ 이정근
"문을 열어주라는 어명이요."

문루 아래에 도착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임금의 침소 강녕전에 시종하는 환관이었다. 야심한 밤에 문을 열어주라니 괴이한 일이다. 하지만 어명이라지 않은가. 더구나 명을 전하는 환관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희빈 홍씨의 심복이지 않은가. 명을 어겼다간 목이 달아날 수밖에 없다.

기별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도 없다. 승정원으로부터 하명을 받은 바도 없다. 그런데 문을 열어 주라니 진퇴양난이다. 하지만 지엄하신 왕명이라니 거역할 수 없잖은가. 수문장은 위난으로부터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궐의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지휘계통의 뒤틀림에서 역사는 잉태한다.

▲ 영추문. 경복궁 서쪽에 있는 문이다
ⓒ 이정근
낮에는 육조의 관리들과 대신들이 드나드는 문이지만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인적이 뚝 끊기는 곳이 영추문이다. 야간에 통행하는 사람이 제법 있는 신무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야식거리를 건네주거나 인정전을 쥐여 주는데 영추문은 썰렁했다.

광화문과 영추문을 수직하는 군졸들의 소속은 병조였으나 간섭하고 통제하는 곳이 많아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오위 산하 대호군 군졸들 모두가 야간에 궁성 수문직을 마뜩찮게 생각했다.

도성에 일고가 울려 퍼지는 저녁 7시가 되면 도성의 4대 문은 물론 궁성의 4대 문이 닫혔다. 파루가 울리는 새벽 5시까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수문직이었다. 오늘 밤에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있을 마누라 생각에 별을 해이려는 참이었다.

▲ 광화문 수직군졸
ⓒ 이정근
당시 한양성곽은 훈련관(훗날 훈련원)이 전담했고, 궁성 경호는 병조 산하 5위(位)에서 맡았다. 침전 경호는 내금위, 시립경호는 우림위와 겸사복 등 3중 4중 철통 같은 경비망이었다. 하지만 위장은 종2품 관직에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어서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행금지 시간에 궁성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승정원 숙직자의 최종 결재가 필요했다.

경복궁에는 4개의 대문이 있다.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남에는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이다. 이 중에서 사림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승정원의 통제를 받지 않은 곳이 신무문이다. 궁성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 궐내에 들어가는 생활용품과 임금이 비밀리에 드나드는 문이다. 또 궁중의 여인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드나들거나 죽어서 나가는 문이었다.

▲ 흥례문을 수직하는 군졸들
ⓒ 이정근
훈구세력은 이 신무문을 공략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간계를 꾸며낸 훈구세력은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의 베갯머리 속살거림으로 중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기회를 포착한 훈구세력은 궐내에 밀지를 넣어 임금을 알현하는 데 성공했다.

도성의 통행금지를 알리는 1고가 울리는 북소리를 신호로 그들이 신무문을 통과하여 중종임금을 알현했을 때 왕은 좌단으로 화답했다. 좌단이란 임금이 입고 있던 웃옷의 왼쪽을 살짝 드러냄으로 신하의 주청을 받아들인다는 묵시적인 응답이다.

신무문은 반역의 역사와 음습한 권력투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10·26 후 권력 공백기를 틈타 야심을 품은 군부세력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문이다.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부대를 근거지 삼아 정권을 접수했던 신군부세력이 이용했던 문이 신무문이다.

▲ 상서원
ⓒ 이정근
소란스러운 소리에 승정원에서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은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살펴보니 야심한 밤이다. 발걸음 소리가 요란스럽다. 2고(鼓)가 지난 야심한 밤에 궐내에서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요란스럽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옆에서 자고 있던 공서린과 안정, 그리고 이구를 깨웠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들이 밖에 나와 보니 영추문이 활짝 열려있고 등불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근정전 쪽으로 향했다. 근정전 아래 좌우로 시립해 있는 푸른 군복의 오위 군졸들을 발견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청색 군복의 대호군은 병조참지 휘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밀어 제치고 경연청으로 나아가니 합문 안팎에는 환하게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에 관복을 입은 얼굴들이 보였다.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김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이었다.

"공들은 어찌하여 이 야심한 밤에 여기에 오셨습니까?"

궐내의 야간 일을 총책임지고 있는 승정원 승지 윤자임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힐난하듯 큰소리로 물었다.

▲ 신표.
ⓒ 이정근
"대내에서 표신으로 부르셨기에 왔소."

병판 이장곤이 고개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투부터 무례하기 짝이 없다. 표신이란 임금이 신하를 비밀리에 부르는 징표다. 통행이 금지된 야간에 통행증 역할을 했다. 훈련원 군졸들이 4대 문을 열고 닫는 데에는 4각의 목재 표신이 필요했지만, 임금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신표는 원형을 2조각으로 나누어 왕의 수결이 어갑되어 있었다.

"어찌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표신을 냈는가?"

윤자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정원 승지인 자신도 모르게 신표가 나갔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외마디 소리를 지른 총책임자 윤자임이 승지 안정을 시켜 제지하려 하자 승전색 신순강이 앞을 가로막으며 성운에게 말했다.

"당신이 승지가 되었으니 곧 들어가 전교를 받아 오시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성운으로 말할 것 같으면 판서나 참판도 아닌 병조참지가 아닌가? 그런데 승지라니 자신도 모르게 언제 성운이 승지가 되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앞으로 나서는 성운을 가로막으며 윤자임이 외쳤다. 승정원 승지의 외마디 절규는 밤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마주 서 있는 자들의 눈초리가 살벌하다. 야심한 밤에 궁성을 내습한 무리들의 눈빛이 타오르는 불빛에 살기를 띠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봤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똥별이 백악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근정전 아래. 그 당시 쿠데타세력과 방어세력이 맞부딛쳤던 곳이다
ⓒ 이정근
"승지가 되었더라도 어찌 사관(史官)도 없이 입대(入對)할 수 있겠소?"

병조참지의 영향권 아래 있는 푸른 군복의 대호군이 시립한 것으로 보아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윤자임이 마지막 저항을 했다. 앉아있던 성운이 벌떡 일어나 들어가려 하자 주서 안정을 시켜 막아서도록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윤자임과 안정의 제지를 뿌리치고 합문으로 들어간 성운이 잠시 후에 종이쪽지 하나를 가지고 나와 임금의 전교라며 읽어내려 갔다.

"이 사람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승정원(承政院) 승지 윤자임, 공서린, 주서(注書) 안정, 한림(翰林) 이구, 홍문관(弘文館) 응교 기준, 부수찬(副修撰) 심달원, 우참찬(右參贊) 이자,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정, 대사헌(大司憲) 조광조, 부제학(副提學) 김구, 대사성(大司成) 김식, 도승지(都承旨) 유인숙,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 <중종실록>

1519년 11월 15일.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친위쿠데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변의 서곡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역시 역사는 밤에 이루어졌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를 '기묘사화'라 기록했고, '신무의 난'이라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홍경주, 남곤, 심정을 '신무삼간'(神武三奸)이라 조롱했고 훗날 사화에 연루된 심정은 이항,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는 불명예를 쓰고 죽임을 당했다.

▲ 승정원 일기.
ⓒ 문화제청 제공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실록>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와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왕 사후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당대의 인물들을 엄선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런데 이날의 기록은 실록과 일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편전(便殿)에서 홍경주, 남곤, 김전, 정광필을 비밀리에 불렀고 이장곤, 안당(安瑭)은 뒤에 있는데, 조광조(趙光祖) 등을 조옥(詔獄, 전옥서 감옥)에 내릴 것을 의논하였다." <승정원일기>

역사를 기록해야 할 사관들마저 쿠데타 세력과 방어 세력으로 갈렸으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의논하였다'는 것과 '하옥하라'는 전교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병조참지 성운이 가지고 나와 읽었다는 종이쪽지는 임금의 재가를 받지 않은 허위 문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교라 읽혀지면 왕명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며, 실현되면 기정사실화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기 때문이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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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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