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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부터 11월 5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97~1956)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해 '기덕(奇德)'이라는 이름까지 지은 엘리자베스 키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여동생이 있던 일본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8일에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해 6개월 정도 머물렀고, 그 후 1936년까지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한국을 소재로 한 수채화·목판화·동판화·드로잉 등 66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키스는 일본에서 2년여 동안 판화 수업을 받은 후 영국에서도 미술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 판화를 모방하지 않고 독창적 작품세계를 펼쳤습니다. 특히 인물 묘사가 탁월해, 당시 대영미술관의 출판 책임자였던 캠블 독슨에게 "인격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남북한의 풍속 그려낸 키스의 작품들

▲ 엘리자베스 키스와 여동생 엘스펫 로버트슨 스콧이 공저한 <옛 한국> 표지.
ⓒ 이충렬
이번 전시회는 해방 후 처음 열리는 엘리자베스 키스 전시회입니다.

명성황후의 조카딸을 그린 <민씨가의 규수>, 일본 등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2년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직후의 모습을 그린 <운양 김윤식>, 대학교수와 결혼해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는 <공주(혹은 옹주)>, <종묘 제례관> <궁중악사> <대한제국 군인> <환관> <갖바치> <농부> <원산> <평양> <함경남도 서호진 어촌> 등 우리나라를 소재로 한 작품이 거의 모두 출품됐습니다.

당시 남북한의 풍경과 삶의 모습·풍속·궁중 의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키스가 이처럼 다양하게 우리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외국인 선교사한테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소개받으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키스는 자신의 그림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3권 출판했는데, 이 중 <옛 한국>이 가장 많이 알려졌습니다. 올해 초 송영달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 명예교수가 이 책을 번역해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성품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사한 농간 탓에 조국을 잃었고 황후마저 암살당했으며, 그들 고유의 복장을 입지 못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길을 가다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마구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흰옷 입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25쪽)

"한국인들의 강인한 성품을 존경하게 됐다"

키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셔우드 홀 선교사가 벌이던 '결핵퇴치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키스는 해주결핵요양원에서 1932년부터 1940년까지 9번 발행한 크리스마스 실의 도안을 3번이나 그려줬습니다. 당시 크리스마스 실에 그림을 그려준 화가는 키스와 운보 김기창 뿐입니다.

키스는 그림을 그린 장소를 서울로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키스는 날씨가 추운 함흥, 원산, 평양 등 북녘도시들도 열심히 다니며, 그 곳 여인네들의 저고리가 서울보다 짧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그렸습니다. 키스의 그림에 진지함과 꼼꼼함이 배어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나는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들을 먼저 들이마셨다. 아니 들이마신다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안에서 목욕을 했다. 그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아예 풍경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 느낌을 종이 위에 재구성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뒤따랐다." (앞의 책, 16쪽)

▲ 엘리자베스 키스 <과부> 수채화(크기, 제작년도 불명, <옛 한국> 41쪽 사진 촬영).
ⓒ 이충렬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여인은 북부 지방 출신이다. 그녀는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외아들 역시 3·1운동에 적극 가담해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촉 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안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쓴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앞의 책, 154쪽)

▲ 엘리지베스 키스 <원산, 조선>. 다색목판 24 x 38 cm, 1919년.
ⓒ 이충렬
그 아름다움을 다 말할 수 없다던 원산은 지금

소나무 사이로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바다에는 집어등을 밝히고 오징어를 잡는 배 대여섯 척이 보입니다.

오징어잡이 배는 해가 지기 전에 불빛으로 오징어를 유인하기 시작한다니, 아스라이 사라지는 노을과 나뭇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다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을 바라보듯 바다를 쳐다보는 여인의 모습에서 초저녁의 풍경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원산의 아름다움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운좋게 머물게 된 이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세상 어디에도 또 없으리라. 집주인 두 여자도 너무나 친절하다. 이 땅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별조차 새롭게 보인다. 그림 그릴 곳을 찾아다니다가 나는 가끔 멈춰 서서 이 땅의 고요함, 평화를 만끽하곤 한다." (앞의 책, 136쪽)

키스가 이렇게 감탄할 정도로 고요함과 평화가 있던 원산이지만, 6·25가 끝난 후에도 원산 앞바다에서는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돼 한반도가 위기 상황이 되고(1968년 1월) 원산 하늘에서는 미국의 정보 수집기 EC-121이 북한에 의해 격추되었습니다(1969년 4월). 원산에 이런 그림 같은 평화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 엘리자베스 키스 <조선의 아침안개>. 다색목판 37 x 24 cm, 1922년.
ⓒ 이충렬
평화로운 바닷가 어촌의 이른 아침, 할아버지가 손녀와 함께 소를 타고 아침 안개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바닷물이 푸르게 보이니 짙은 안개는 아니고 산허리를 휘감은 정도인데, 소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할아버지의 등을 꼭 끌어안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금강산 입구인데, 눈을 들어보면 끝도 없이 산들이 중첩해 있다. 이른 아침에 계곡을 내려다보면 아침 안개, 아니 밥 짓는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소나무 타는 향기가 섞여 있다." (앞의 책, 133쪽)

구룡폭포의 용들은 목욕하며 장난을 치고

키스는 그림을 그린 장소를 화제에서 거의 밝혔는데, <조선의 아침안개>에는 '조선'이라고만 표시해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11회 조선미술전람회(1932년) 도록에 거의 비슷한 풍경을 그린 일본 화가의 작품이 있어 장소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 고모리 지로, <서호진 어촌>(1932년 발행된 <제 1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도판 사진촬영).
ⓒ 이충렬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서호진 어촌을 그린 동양화인데 소나무와 마을모습, 멀리 보이는 산과 왼쪽의 바다가 <조선의 아침안개>와 거의 같습니다.

키스는 외국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함흥과 원산을 여러 번 방문했고, 특히 함흥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이를 감안할 때 <조선의 아침안개>의 배경을 옛 서호진 어촌으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현재 서호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별장인 서호 초대소가 있습니다. 1999년 10월 1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일행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서해공단 개발 논의를 한 곳입니다. 서호진은 현재 가동되고 있는 개성공단의 기초를 닦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엘리자베스 키스, <금강산 구룡폭포>. 다색목판 18 x 36 cm, 1921년.
ⓒ 이충렬
물길 모습이 용이 춤을 추며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는 구룡폭포, 유점사 53불에게 쫓겨난 아홉마리 용이 산다는 구룡연. 진경에다 전설을 담은 독특한 판화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로 오를 때를 기다리며 못 속에 몸을 담근, 품위있는 모습이 아니라 목욕하고 장난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키스가 금강산에 갔을 때 유점사에서 '목욕하는 용'에 대한 전설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시 금강산에 가는 외국인들은 거의 모두 유점사에서 하루 저녁 묵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1894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의 저자 이사벨라 비숍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온 밀러 선교사는 여행기에 "절에서 우리는 인도에서 온 53명의 스님에게 쫓겨난 아홉마리 용이 목욕하는 못에 대한 전설을 들었지만 이 전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용 부분으로, 조선의 용은 늘 목욕을 한다는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키스는 구룡폭포를 그리면서 유점사 스님에게서 들었던 전설을 떠올리면서, 용틀임을 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아니라 목욕하는 용을 그렸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엘리자베스 키스, <서울 동대문의 해돋이>. 다색 목판 45 x 32 cm, 1920년.
ⓒ 이충렬
동대문 낮 풍경을 그리지 못한 까닭

엘리자베스 키스는 서울에 머물 때, 동대문 바로 왼쪽의 가파른 언덕에 있던 감리교 의료 선교회관에서 지냈습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으로 훗날 동대문 부인병원, 이화의료원,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키스는 숙소에서 가까운 동대문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3점이나 남겼습니다. 위 그림은 겸재 정선이 동대문을 그린 <동문조도>와 구도가 비슷합니다.

▲ 겸재 정선, <동문조도>. 모시에 엷은 채색 22 x 26.7 cm, 영조 22년(1746년)경.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연구실장은 <동문조도>를 설명하면서 동대문 왼쪽이 낙산, 안암산 줄기, 가운데 멀리 보이는 산이 용마산, 오른쪽이 금호동 산줄기인 수릿재라고 했습니다. <서울 동대문의 해돋이>의 산봉우리에도 적용될 수 있는 설명입니다.

왼쪽 소나무 숲이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이 들어선 자리며 현재 이 작품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니, <동문조도>는 인연을 제대로 만난 '운 좋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키스가 동대문을 소재로 남긴 작품은 모두 이른 새벽풍경이거나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풍경입니다. 낮에는 '그림 그리는 외국 여자'를 구경하러 좇아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캔버스를 세워놓은 순간 어디서 나타나는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대부분 아이들이거나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서 구경하는 바람에 어떤 때는 포기하고 집에 왔다가, 새벽닭이 울 때 다시 찾아와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아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앞의 책, 135쪽)

"한국의 여자들은 남자 못지 않게 잘 싸웠다"

▲ 엘리자베스 키스, <달빛 아래의 서울 동대문>. 다색목판 45 x 32 cm, 1920년.
ⓒ 이충렬
키스는 그림을 그리러 다닐 때 통역 겸 그림도구를 들어주는 청년과 동행했는데, 그 청년은 <독립신문>과 유인물을 두루마기에 감춰 갖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키스는 신분을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던 그 청년에게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한국의 가정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하대를 당하지만, 삼일만세운동 때는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잘 싸웠다. 비밀문서를 전달하기도 하고,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지하조직에 참여하며,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한국 여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강인한가를 보여주었다." (앞의 책, 158쪽)

▲ 엘리자베스 키스, <바느질하는 여인>. 수채화(크기, 제작년도 불명, <옛 한국> 21쪽 사진 촬영).
ⓒ 이충렬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주차장 위쪽에 있습니다. 
전시기간 : 2006.9.29(금)~11.5(일)  
전시장소 : 전북도립미술관 5전시실(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전화 063)222-0097 www.jbartmus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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