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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대전중구문화원이 주최하는 “땡땡이! 실버문화학교”에서 충남 논산군 강경읍을 다녀왔습니다. 건축연구소 이기욱 소장의 안내로 진행된 강경 근대 건축 기행의 일부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기자 주)

강경, 조선 3대 시장이며, 2대 포구였다!

강경은 우리나라 3대 하천인 금강이 지나는 곳이다.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군산-강경-부여-공주를 연결하는 중부지역의 교통 요지였기에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였으며, 원산과 더불어 2대 포구였다.

▲ 1920년대 강경 시장. 원으로 표시된 것이 당시의 남일당 한약방이다.
ⓒ 김정동

▲ 남일당 한약방. 1920년대 강경시장 전경사진 중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최근에 보수·복원하였다. 1층은 한약방으로, 2층은 주인의 주거공간으로 쓰였다. 어르신들은 이런 집을 좋아하셨다.
ⓒ 최장문

수운 교통과 철도 교통(호남선)이 함께 발달한 강경은 1900년대에 들어 ‘근대’의 이름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시가지에는 상업도시 구조에 적합한 각종 상점, 금융건물, 점포병용(店鋪倂用)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일은행과 노동조합건물을 통해본 강경 상권의 흥망성쇠

강경 읍내의 한 거리엔 당시의 상권을 짐작할 수 있는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예로 점포 간판을 아예 시멘트로 만들어 새겨 놓은 것이었는데, 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길 옛날에 돈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건물을 지어 상점을 할 경우 처음부터 간판을 건물 벽면에 새겨 넣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 상점 간판을 건물 정면 윗면에 새겨 넣은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왼쪽 사진에서 어르신이 핸드폰으로 상점 간판을 찍고 있다.
ⓒ 최장문

▲ 한일은행 건물(우). 한일은행 맞은편엔 목조건물인 호남병원(1928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젓갈 상점이 들어서 있다(좌) .
ⓒ 최장문

▲ 한일은행 건물 내부.
ⓒ 최장문

한일은행 건물은 1910년에 지어진 은행으로 충남지역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근대시기 금융시설이다. 이후 건물은 각종 은행으로 바뀌다가 최근엔 젓갈창고로 쓰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젓갈 냄새가 많이 났다. 건물 안에는 은행이었음을 말해주는 금고가 있었다.

은행 건물은 층수에 비해 비교적 높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또, 문은 비교적 좁은데, 돈이 나가지 말라는 뜻이 함축 되어 있다고 하였다. 한일은행 맞은편엔 목조건물인 호남병원(1928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젓갈 상점이 들어서 있다.

한일은행에서 150미터 남짓가면 ‘강경노동조합건물’이 있다. 강경노동조합은 강경에 들이닥친 근대의 물결 속에서 전통 시장과 민족자본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강경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노동조합이다. 이 건물은 한옥 2층 목조 건물로 1925년에 신축하였다.

▲ 1925년 강경노동조합 건물 준공식 장면. 건물 전면에 배를 댈 수 있게 수로시설을 만든 것이 보인다. 1층에 서있는 사람들 발밑으로 포구의 물이 들어왔고, 강경포구에 들어온 배는 순번에 따라 이 곳에서 물건을 내렸다.
ⓒ 김정동

1920년대 내륙지방으로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규모와 세력은 대단했다. 조합원은 1조당 60~80명으로 총 10개조 78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150여미터 거리를 두고 조선 상권의 상징인 강경노동조합과 근대 자본의 상징인 한성은행이 어떻게 헤게모니 싸움을 벌였을까 궁금했다. 명동과 종로를 두고 김두한 패와 하야시패가 벌였던 드라마 ‘야인시대’ 못지않은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을 것만 같았다. 당시의 문헌자료나 구전자료 등이 정리되어 소개된다면 더욱 좋은 답사 코스가 될 것이다.

▲ 현재 강경노동조합 건물. 지금 어르신들이 서있는 길을 따라 배들이 들어왔다.
ⓒ 최장문

건물은 80년이 지난 것인데 관리가 되지 않아 2층이 무너져 내렸고, 1층도 원형을 거의 잃고 있으며, 창고로 단순히 이용되고 있다. 노동조합에서 물건을 내린 배들은, 수로를 따라 수리 조합 뒤편으로 가서 정미소에서 1차 공정을 끝낸 쌀을 싣고 군산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정미소는 이미 부서지고 없었다. 정미소, 강경노동조합 주변엔 공원시설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한 사태를 바라보는 어르신들과 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공원을 만들기보다는, 남아있는 한성은행과 노동조합을 수리하고, 없어진 호남병원과 정미소 등을 복원하고 그 사이에 원래의 수로를 놓아 강경 포구와 연결해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100년 전후의 우리나라 포구와 시장이 될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일본의 자원수탈과 그 속에서 살아간 다양한 삶을 이해하는 훌륭한 지역 문화 자산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강경 포구로 가던 도중 까만 열매가 달린 식물을 보았다. “까마죽”이라 하였다. 어르신들은 옛날 친구라도 만난 듯 동심에 젖은 얼굴로 까마죽을 따셨다.
ⓒ 최장문

강경 포구와 근대 건축물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옥녀봉에 올랐다. 공주 부여에서 흘러온 금강 물줄기가 군산 장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구한말 기록을 보면 군산에서 공주까지 이 물길을 따라 쌀 500석을 실은 정기선이 오갔다고 하니 당시의 금강수운교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 포구
ⓒ 최장문

강경의 옛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무너져가는 건물과 흔적만 남은 포구만이 조선 3대 시장, 2대 포구였던 옛날의 강경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강경은 해방이후 발전의 속도가 느렸던 만큼 근대사의 흔적은 오히려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강경이 지금은 ‘개발’의 이름으로 퇴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듯 하다. 무단히 철거되는 옛 강경의 장소들을 되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건물과 도시가 사라지면 역사와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현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은 보존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믿는다.

더군다나 강경은 현재 조선의 포구 모습과 근대도시의 모습이 남아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이 문화유산을 강경 젓갈축제와 결합시킨다면 강경지역 자체가 하나의 굴뚝 없는 공장단지가 될 것을 확신한다.

과거는 청산해야 할 ‘짐’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김정동 교수의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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