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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중반부터 90년 대 중반까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중미술. 1960년대와 70년대의 보수적이고 서구화된 미술 형식에서 탈피하여, 한국화와 서양화 목판화에 시대정신을 담고, 벽화, 걸개그림을 통하여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민중화가'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세상이 바뀌자 그들의 '보루'였던 <그림마당 민>은 문을 닫았고, 민중미술을 대변하던 미술잡지 <가나아트>도 폐간되었습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사람들은 '민중미술'이 이제 그 효용성이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다수의 '민중화가'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보수 미술계는 그들의 퇴장을 당연시 하면서 민중미술의 성과를 평가절하 했지만, 민중미술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음에 틀림없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민중미술의 미술사적 위치를 확인하는 <민중미술 15년>전을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올해초 미술사학계의 원로 안휘준 교수 역시 80년대 민중화가들의 '시대성'이 한국미술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글을 발표하여 보수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기도 하였습니다.

20세기 '한국'회화사나 미술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시대성'과 관련하여 도저히 제쳐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민중미술이라 하겠다. 비록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저항정신을 앞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민중미술가들의 시대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전체 민중미술가들과 그들의 모든 작품이 시대성만을 근거로 당연히 '한국' 미술사나 회화사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민중미술가들 중에서 '창의성'이 뛰어난 작가와 작품만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의 작품들은 누구의 경우이든 최소한 '한국성'과 '시대성'을 갖추고 있어서 창의성이나 예술성만 함께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한국' 미술사와 회화사에 편입대상으로 고려되어 마땅하다고 본다. 민중미술 작가들만치 치열한 '시대성'을 지닌 작가나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 안휘준 '어떤 현대미술이 '한국'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을까'
-<한국 현대미술의 단층> 23쪽 삶과꿈 2006년


이름이 웬만한 평론가나 진보적 평론가가 이렇게 썼다면, 보수논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겠지만, 탁월한 감식안과 미술사에 대한 독보적 식견을 갖고 있는 안휘준 교수이기에, 그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평론가나 미술사가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민중미술운동을 주도했던 '민중화가'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현주소를 크게 분류하면 시대정신을 떠나 꽃을 그리는 화가와,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 외롭고 힘든 길을 뚜벅뚜벅 가는 화가, 아예 붓을 꺾은 화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화가가 바뀐 환경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는 몇몇 화가들이 있어, 이번부터 몇 회에 걸쳐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는 '민중화가'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류연복 화백은 80년대 벽화운동과 민중목판화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미술이나 당시의 문화운동에 관심이 없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1988년 창간때부터 1996년까지 <한겨레신문>의 제호와 함께 실린 백두산 천지 판화가 바로 류연복 화백의 작품이라고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따라서 그의 판화 <백두산 천지도>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많이 인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류연복 <백두산 천지도> 글씨는 <오륜행실도>에서 집자
ⓒ 한겨레신문사
류연복 화백은 1984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서울미술공동체를 결성하여 벽화팀 '십장생'의 일원으로 벽화운동을 시작하였고, 1986년에는 정릉에 있는 자신의 집 담에 <상상도>라는 벽화를 그리다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당시 같이 연행된 사람 중에는 사다리 만들어주는 목수일을 하다 벽화의 진달래꽃에 색칠하는 일을 돕던 최병수도 있었는데, 그는 이때 경찰이 직업을 목수가 아니라 화가로 적어 그때부터 화가의 길을 걸었다는 웃지 못할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후 류화백은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사무국장, 민예총 대외협력국장 등을 거치며 문화운동의 현장을 지키다, 1993년 <그림마당 민>의 마지막 기획전을 자신의 <새싹 키우기 전>으로 치룬 후 경기도 안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이제는 위로부터의 변혁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꿈꾸기 위해 작은 변방의 한 소도시로 옮겨서 그림이, 문화가 어떻게 생활 속에 녹아들어야 할지 해야 될 몫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류연복 '새싹 돋는 희망의 봄' <58 개띠들의 이야기> 화남 2006년 256쪽


이러한 그의 깨달음은 옿았고, 앞에서 언급한 안휘준 교수 역시 같은 글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시대성을 중시한다면 우리 주변의 변화된 자연환경은 물론 우리의 삶과 생활 양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의 제 양상을 관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런 것들을 주제로 한 미술작품들은 설득력과 호소력을 강하게 지니게 될 것이다.
-안휘준 위의 책 23쪽


▲ 류연복 <빈들 생명> 다색목판 70 x 150 cm 2002년
ⓒ 류연복
안성에서 그는 지역이라는 작은 공동체에 관심을 보이면서, 전셋돈 200만 원을 치르고 남은 돈으로 일곱 개 짜라 다랑이논과 텃밭을 장만하였습니다.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상징적 의미였겠지만, 그는 텃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내기를 하면서 땅과 환경에 대한 '작은 사랑'을 하나씩 둘씩 실천하였고, 그의 작품에는 땅과 농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주변의 작은 사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80년대의 사랑이 역사랄까 민족이랄까 하는 커다란 것들에 대한 관념적 사랑이었다면 안성에서의 사랑은 작은 것에 대한 구체적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봄이 되면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들이 새싹을 틔우는 것을 보면서 새롭게 생명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였지요. 머릿속의 사랑이 아닌 가슴과 손발을 꾸려내는 사랑으로 나의 사랑은 구체화되었습니다.
-류연복 <둥글어진다는 것은 낮아짐입니다> 70쪽 배꼽마당 2004년


▲ 류연복 <동강전도> 다색목판 167 x 110 cm 1999년
ⓒ 류연복
류화백은 안성에서 '안성천살리기 시민모임', '푸른 안성맞춤21' 등의 환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며 이 시대의 '화두'인 환경문제에 관심을 두고 작품에다 그 정신을 담기 시작합니다.

위의 작품은 동강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환경 운동가, 생태계 연구가, 화가, 문인, 언론인들이 힘을 합하여 환경보존을 외치던 때에 화가가 동강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껏 담아 만들었고, 결국 동강은 환경부에 의해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됐으니 화가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작품입니다.

때묻지 않은 시원의 고요와 무궁한 안온이
그곳엔 있다. 짙푸른 강물은
흐르고 있는 건지, 멈추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게
시간과 영원이 맞붙은 까닭이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궤뚫린 까닭이리.
생각하면 아득하다.
그저 아득하고 아득할 뿐이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주저앉아
보고만 싶은 강, 겨레의 젖줄이여.
아름답고 거룩한 구원의 강이여.
-박희진 '동강 12경 - 고성리 산성과 주변 조망' 일부


▲ 류연복 <외암골 전도> 다색목판 120 x 80 cm 2002년
ⓒ 류연복
류연복 화백은 안성에서의 생활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그는 시야를 우리나라 국토로 넓혀가면서 <지도연작>에 천착합니다. 위의 <외암골 전도>는 온양 근처에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과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광덕산, 봉수산, 설화산 그리고 마을을 감싸돌면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꼼꼼하게 재현한 작품입니다.

작은 공동체 마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도저히 만들 수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는 작품이지만, 그는 그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류화백은 <외암골 전도>외에도 <기솔리 전도>를 비롯한 여러 점의 <지도연작> 작품을 만들면서 진경산수판화로 가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 류연복 <서운산 청룡지 - 봄> 다색목판 53 x 153 cm 2003년
ⓒ 류연복
그가 살고 있는 안성의 서운산과 청룡(저수)지를 위에서 내려보며 그리는 부감법으로 그린 진경산수 판화입니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비롯한 서울 근교와 영남지방의 실제 풍광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시작된 '진경산수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작입니다.

겸재가 당시 조선고유의 풍광을 화폭에 담은 이유가, 청나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니, 이는 류연복 화백이 젊은 시절부터 추구해온 민족에 대한 탐구와도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습니다.

▲ 류연복 <서운산에서 - 여름> 다색목판 70 x 155 cm 2003년
ⓒ 류연복
위의 작품은 판화에서는 흔하게 사용하는 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여름을 나타냈습니다. 화가의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많은 미술잡지에서 소개한 '득의작'입니다.

고지도에 나타난 전통적인 시점을 채택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마치 연이어진 산맥이 그 속에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골짜기들, 골짜기에 잇대있는 올만졸망한 밭들마치 혈류처럼 골짜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과 실개천들, 그리고 사찰과 촌락을 외부로부터 싸안고 있는 형국이다. 중첩된 산세를 포착한 심원법과 평면의 시점으로 낱낱의 지세를 드러내 보이는 부감법이 혼용된 이 작품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살아있는 살아있는 사람의 신체를 연상시킨다.
-고충환 '생태주의, 민중목판화 이후의 담론' <아트 인 컬쳐> 2004년 5월호


▲ 류연복 <베티성지> 다색목판 50 x 123 cm 2003년
ⓒ 류연복
▲ 류연복 <서운산 - 겨울> 다색목판 65 x 123 cm 2003년
ⓒ 류연복
위의 두 작품 역시 진경산수판화로 <베티성지>는 가을의 맛이 나게 황토색을 썼고, <서운산 - 겨울>에는 구름조차 잿빛으로 만들며 겨울의 삭막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류연복의 진경산수판화는 모두 가로가 1m 가 넘는 대작들이라 전시장에서 작품을 봐야 제맛이 나고, 그렇게 봐야 세밀한 부분까지 칼질을 한 '칼 맛'에 대한 감동이 느껴집니다.

도통 칼질로 밤새우는
이런 백정을 처음 보았다.
실낱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신명나는 대로 칼가는 대로
쓴 술 한 됫박이면
천하의 잘난 놈들
다 잡아주는 사람
서툰 짓 하다 들통나면
나까지 잡을 사람
이런 무서운 백정을
난생 처음 보았다
- 박금리 '판화가 류연복'


류연복은 이렇게 열심히 칼질을 하지만 진경산수판화를 한점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서너달, 그것도 칼질을 할 수 없는 겨울을 만나면 해를 넘겨야 하기 때문에 대작은 많이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특히 진경산수의 경우 관념산수와 달리 실제 대상을 꼼꼼히 스케치하여 밑그림을 완성하고, 그걸 다시 나무에 옮겨 칼질을 해야 하니, 보는 사람은 우리의 산하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지만, 화가에게는 몹시 힘든 작업입니다.

민족, 해방, 통일의 민중판화에서 땅, 생명, 환경을 거쳐 진경산수판화로 간 류연복. 이러한 변화에 대해 그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그의 삶 자체가 민족과 함께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작이라 작업하기가 너무 힘들다"면서도 진경산수 판화를 고집하고 있고, 그것은 어쩌면 안휘준 교수가 말하는 '한국성의 구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작가가 한국인의 혈통을 지니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창작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 창의성과 함께 '한국성'이 또렷하게 구현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한국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굳이 '한국' 미술사에 편입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성이 없는 작품은 세계미술사에서나 편입의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국의 미술사에도 편입되지 못하는 작품에 그런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안휘준 위의 책 17쪽.


칼질을 시작한 지 20년을 넘기도록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칼질에 매달려온 류연복 화백. 그렇게 열심히 칼질을 해왔기에 앞으로도 계속 칼질을 할 것이고, 그래서 그는 오늘도 화첩과 화구를 둘러메고 독도로 금강산으로 열심히 발길을 옮깁니다.

▲ 류연복 <괭이갈매기 날아오르다 1 - 독도> 다색목판 90 x 180 cm 2006년
ⓒ 류연복
▲ 류연복 <금강산 - 상팔담> 다색목판 61 x 135 cm 2006년
ⓒ 류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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