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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쨋 날, 원주 원동 성당에 갔다.
ⓒ 최장문
'원주,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다. 1990년대 대학을 다니며 데모 한 번 안 해 본 나에게 '광주'라면 몰라도 원주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낯선 이름이었다. 이 곳이 1970년대 박정희 반군부독재 투쟁의 중심이 되었고, 탄압받는 재야 인물, 반체제 세력의 은신처·보호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역사교사인 내가 오늘에서야 알게 되다니….

원주의 민주화 운동은 가톨릭을 매개로 결합한 두 인물,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의 역사적 활동과 연결된다.

원주 원동성당과 지학순 신부

▲ 원동성당에서 원주갬프(1970년대 원주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간 사람들 애칭)의 활동가였으며, 현재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주 선생님이 당시의 민주화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 최장문
지학순 주교는 1965년 원주교구의 설정과 함께 주교로 부임한 이후, 교구내의 광산 노동자, 농민들의참상에 주목하고 이들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신용협동조합운동, 수재민 구호 활동 등을 열정적으로 전개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원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던 장일순은 이때부터 이 운동의 전개, 주요 실무자의 충원 등을 담당하였다.

김지하 역시 장일순 선생을 통하여 1971년부터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 전개된 중요 활동이 1971년의 '부정부패 추방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 주장은 노동자, 농민의 가난은 자신의 게으름,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과 그와 결탁한 기업주 등의 부정부패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1974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했다.

민청학련 사건(1974. 4)과 관련 자금 지원 혐의로 시작된 지학순 주교 강제 연행, 유신체제의 폭압성을 정면으로 비판한 지학순 주교 양심선언, 지주교 석방을 위한 신·구교 기도회 및 시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결성, 유신헌법 철폐, 지주교 등 구속자 석방 등을 주장한 선언문 발표가 이어졌다.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 시위와 국제인권단체의 지지 등에 충격을 받은 유신독재 정권은 1975년 2월 사형을 언도받았던 김지하 등을 석방하고, 며칠 후 지주교를 석방하였다.

▲ 원동 성당 안.
ⓒ 최장문
그 때의 일을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김영주 회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 주교님이 석방되어 원주역에 도착한 날은 원주시민 거의 반 이상 거리로 뛰쳐나와 환영하는 인파로 북적거렸죠. 중간에 주교님은 차에서 내려 환영 나온 사람들과 함께 원동성당으로 행진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원동성당에 도착할 무렵 한 청년이 주교님 앞에 와서 외투를 벗어 길에 깔자 너도나도 외투를 벗어 길에 깔았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원주였죠. 민중의 고향! 호산나의 원주!"


민청학련 당시,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의 연대는 1970년대 널리 퍼진 지식인과 종교계의 유일한 결합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 이후 1976년 3월 명동성당에서 천명된 '민주국구 선언'을 비롯, 유신독재가 몰락할 때까지의 많은 일들에 원주를 중심으로 한 인적·공간적 연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0년 6월 광주 사건의 진상을 알린 이후 쫓기던 김현장, 1982년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이 이곳에서 몸을 숨기다 구속된 것도 그 연장이었다.

모심과 살림 그리고 좁쌀 한 알 장일순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이란 부제로 2004년 최성현님이 발간한 <좁쌀 한 알 장일순>
ⓒ 최장문
장일순? 이 또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좁쌀 한 알 장일순>이란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를 소개하였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평을 한분들은 모두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인물들인데, 그들이 '선생님'으로 받드는 인물이었다. 장일순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장일순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빼고는 줄곧 원주에서 살았다. 1970년대 원주캠프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50년대엔 원주 대성학원을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진보당에 연루된 용공분자로 몰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성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취임 6개월만인 1965년 4월 대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일 굴욕외교 반대시위로 다시 이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이후 집 앞에 파출소까지 설치되는 등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 안전법에 묶여 모든 활동에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지학순 주교, 김지하, 박재일 등과 함께 강원도 일대의 농촌과 탄광지역의 농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운동을 지도하면서 '원주해방구'를 일구어 내었다.

▲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피체지 길목에 세워진 추모비와 장일순 선생의 글. 장일순 선생의 모심 사상(밑으로 기어라) 은 동학의 한울님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최장문
'걷는 동학'이라 불리던 장일순은 '밥이 곧 하늘'이고 '모든 생명은 하나'임을 일깨우며 80년대엔 '한살림'운동을 이끌어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살림의 세계관을 태동시켰다. 또 해월 최시형을 동학 교주를 넘어 민족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 무위당(無爲堂)과 좁쌀 한알의 호를 즐겨썼던 장일순 선생의 묘.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 최장문
장일순 선생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하지만 원주 캠프의 주역이자, 현대 지성인들의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

함께 답사했던 대전 과학고 윤세병 선생님은 장일순 선생의 호인 무위당(無爲堂-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는 사람)과 관련하여 호수 한가운데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과 같은 존재라 말했다. 있는 듯 마는 듯하지만 결국 그 기름띠가 호수를 둘러싸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안내를 맡았던 원주 주천종합고 민찬기 선생님은 월급을 타면 신협에 넣고, 아프면 의료생협에 가고, 생필품이 필요하면 원주생협에 간다고 자랑하였다. 모두가 장일순의 한살림 운동을 계승한 공생 협동조합이라 한다.

말년의 그의 아호는 일속자(一粟子)로 스스로를 한 알의 작은 좁쌀로 낮추었다. 모심(밑으로 기어라)과 살림(한살림 등의 생명운동)을 강조 했던 그를 통해 20세기 경쟁과 투쟁의 논리를 넘어서, 협동과 생명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좁쌀 한 알 속의 우주'를 더욱 맛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선 아쉽게도 장일순 선생의 생가나 그가 세운 대성학교는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다음에 원주를 다시 찾아오라는 숙제라 생각하고 아쉬움을 접는다.

덧붙이는 글 | 장일순 선생과 관련한 인터넷 정보는 개인 홈피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과 네이버 블로그 <역사 속으로>의 인물 현대사 ‘문열고 아래로 흐르다, 장일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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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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