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見我 無言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蒼空見我 無塵以生).

성 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解脫嗔怒 解脫貪慾),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山如水 生涯以去).


▲ 나옹선사(1320~1376)의 승탑은 범종의 소리처럼 선사의 말씀이 울려퍼지기를 염원하여 석종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오늘날 사원 근처 숲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승탑에 영향을 주었다. 왼쪽의 승탑 비문은 고려말 유학자였던 이색이 지었다.
ⓒ 최장문
지난 11일부터 14일까지 강원도 원주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자주연수가 있었다. 연수 둘째 날 일정으로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가게 됐다.

12일 아침, 여주 신륵사에 도착하니 귀에 익은 시구가 마음을 기쁘게 한다. 나옹선사의 선시(禪詩)였다. '더 빨리, 더 많이'의 사회구조 속에서 지친 내 심신을 달래주었던 그 시를 들으니 절친했던 초등학교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나옹 화상은 고려와 함께 쓰러져가던 불교를 재충전하여 조선으로 넘겨 준 큰 스님이었기에 그가 입적한 신륵사에는 나옹 화상 기념관이라 불릴 만큼 관련 문화재가 많았다.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王師)였고 동시에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이 사실로만 보아도 고려시대 신륵사는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륵사에는 무학대사(1327∼1406)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고려 말 불교가 위축된 상황에서 사회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한 스님이다.

12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도로 가서 인도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은 후 나옹을 찾아가 그의 전법제자가 되었다. 나옹이 입적한 후 다시 천하를 주유하던 무학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었다. 스승 나옹이 신륵사에서 입적하였고, 그 제자 무학이 신륵사 옆 고달사지에서 은신하였던 것은 신륵사의 불교사상적 위치를 한층 고양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 나옹선사 승탑으로 가는 길목에 조사당이 있다. 고려 말 기울어가는 불교계에 한가닥 빛이 되었던 소위 3화상이라 불리는 지공·나옹·무학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가운데 목조(木造)는 나옹화상이다.
ⓒ 최장문
함께 답사한 선생님이 영정을 보고 웃기에 왜 웃느냐고 물어보니 수염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보니 정말 스님들의 얼굴에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 스님들이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는 것이 새로웠고, 또 나의 선입관으로 보아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신륵사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이색이었다. 이색은 신륵사에 대장경과 대장경각을 지어 봉안했으며,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신륵사에 세우기도 하였다.

1341년 성균관시에 합격한 이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되고 이후 석방된 후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1396년 신륵사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다.

이색은 고려 말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을 가르쳐 조선왕조에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신륵사와의 인연으로 유교 18 성현(聖賢)에서 제외되어 성균관과 향교의 대성전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 신륵사는 여강(남한강)과 맞닿고 있다. 그 끝자락에 나옹선사의 다비처가 있으며,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다.
ⓒ 최장문
깊은 산 속에 있는 보통의 절과는 달리 너른 강가의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자리한 신륵사.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났던 나옹 선사, 무학 대사, 목은 이색. 왠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듯한 그런 정취가 남는다. 신륵사 앞에는 나옹선사의 말처럼 여강(驪江)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