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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m I done?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아나킨의 대사 중에서)

꼭 귀신에 홀린 것처럼 고비 고비마다 가서는 안 될 길로만 가서 일을 완전히 그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1945년 해방이후 분단과 전쟁에 이르는 과정이 딱 그러했다.

결과론적인 푸념이지만, 매 순간의 선택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역사의 물줄기는 확실히 달라질 수 있었던 순간이 너무도 많아 안타까움이 배가되곤 한다. 그 과정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너무 방대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본 편에서는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사건 하나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계속되는 통합의 움직임, 몽양의 동분서주

찬·반탁 논쟁으로 온 남한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에서도 분단을 막기 위한 통합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이 가동되기 시작하는데, 혼란한 정국에서 좌와 우가 서로 양보하여 대통합을 이뤄보자는 취지였다.

이러한 좌·우 합작의 경험은 이미 1927년 신간회 때부터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고, 이 일을 주도했던 조선인민당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은 당시 해방공간에서 거의 유일하게 좌와 우를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식민 시절부터 좌와 우를 폭넓게 드나들며 활동했던 그는 해방 후에도 활발하게 좌·우익의 인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박헌영, 김일성은 물론 이승만, 김구와도 독대를 할 수 있는 한반도 유일의 정치인이었다. 거기에 그는 미군정은 물론 소군정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유연성마저 겸비하고 있었다.

몽양이 김일성과도 친분을 유지했었기 때문에 그를 용공시하여 불온하게 보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진정한 좌우합작을 위해서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몽양의 신념이었다.

1946년 5월 우사 김규식과 더불어 몽양은 좌우합작 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우합작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런데 이 좌우합작운동을 위해서 위원회를 만들고 적극 지원한 게 하지의 미군정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

당시 맹목적인 반탁운동이 미국을 얼마나 난처하게 만들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위원회 활동이 진행되면 될수록 좌·우는 또다시 동상이몽에 빠져 대립의 양상을 띤다. 특히 좌익 내 정치적 혼란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946년 5월 발생한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좌익 탄압에 들어간 미군정에 대항하여 조선공산당은 동년 9월 총파업과 10월의 대구항쟁으로 맞섰다. 두 사건 모두 미군정의 경제정책 실패가 원인이 되었지만, 박헌영 계파는 이 두 사건을 이용하여 남로당 창당과정에서 주도권을 강화하려는 좌파 모험주의적 행태를 띠고 있었다.

박헌영 계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험주의 행태는 후일 결국 남로당의 한국전쟁 오판과 몰락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을 지지하는 계파와 그를 비판하는 계파대립이 발생하는데, 결정적으로 김일성의 북조선 로동당이 박헌영을 지지해 버리는 바람에 몽양은 좌파 내에서의 대표성을 급격하게 상실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간신히 합작위원회가 만들어 낸 좌우 합작 7원칙 중 과도입법기구 조항이 중도우파 김규식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좌익 내 반발을 산 몽양은 모든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위원회는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몽양도 정계에 복귀하여 활기를 띠는 가운데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속개되었다.

또다시 분단의 물줄기를 돌릴 기회를 잡으려는 순간,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심화되는 좌·우의 견해차와 몽양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은 결렬되고, 그해 말 좌우합작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당시 한반도 어디에도 몽양 말고는 38선 이남의 좌익인사들과 우익인사들 그리고 미군정을 모두를 연결해줄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많은 좌익인사들이 북으로 가버렸고, 동시에 남아있는 좌파 인사 중에는 몽양만큼 대표성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좌·우익이 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소중한 노력의 실패를 그저 역사의 필연으로 치부하며 현실성 없는 헛된 노력이라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좌우익의 통합노력은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과 그 이후 쭉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역사로 기억될 가치가 있다.

우리가 미래에 통일과 남북화해를 모색한다면 몽양과 우사 그리고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시했던 모델을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 결렬된 후 3상회의 결정이 폐기되면서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가 또 한번의 기회가 오지만, 이번에는 유엔이 미국의 거수기라는 소련의 판단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이 거절되면서 또다시 분단과 전쟁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좌와 우 미국과 소련 모두가 엇박자로 빗나가는 악순환의 연속…. 이쯤 되면 누구를 탓해야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분단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백범보다 더 안타까운 몽양의 부재

백범 김구는 모두가 인정하는 위대한 독립투사이자 민족지도자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면 백범의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행각은 역사에서 크게 평가받을 만한 것이 없다. 그 기간동안의 백범은 이승만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요컨대 백범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몽양이 죽었을 때에도 백범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단이 현실이 되고 잔혹한 내전의 가능성이 다가오자, 뒤늦게 백범은 삼팔선을 베고 죽고자 했지만, 이미 역사의 열차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백범이 2년만 더 먼저 몽양과 함께 했었다면, 아니 몽양이 죽고 난 뒤에라도 백범이 바로 몽양의 뒤를 이어줬다면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몽양 여운형은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 뿌리내린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여태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분단 조국을 막기 위해서 최후의 순간까지 애를 쓴 민족지도자이자 유연한 감각을 가진 정치가였다.

뒤늦게나마 몽양에게 건국과 독립의 공로를 인정한 대한민국이 이제 그를 다시 재평가하고 인정해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우리에겐 몽양의 원대했던 꿈과 좌절을 되새겨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전쟁이 왜 1950년 6월에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남침, 남침유도, 북침이라는 한국전쟁의 발발의 세 가지 대표적 학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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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역사학로 우리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었던 한국전쟁사에 대해서 좀 더 대중적인 이해를 돕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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