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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령원의 전경입니다.
ⓒ 김기동
소령원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묘소다. 숙빈 최씨는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궁녀로서 생활하지만 궁중에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인 무수리였다.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가 폐비되고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이 국모가 되던 시기에, 숙종은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는 숙빈 최씨를 만나게 되고, 숙종의 승은을 입은 숙빈 최씨는 연잉군(영조의 왕자시절 호칭)을 낳게 된다.

아마도 숙빈 최씨는 사망할 때까지 장희빈의 아들 균이 왕세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 연잉군이 임금이 될 것으로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 소령원의 비각
ⓒ 김기동
소령원의 왼쪽에는 비각이 두개 있고 각각의 비각 안에는 내용이 다른 영조의 친필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분묘제도에 따르면 능(陵)은 국왕과 왕비의 분묘이며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비, 후궁으로서 왕의 생모인 빈의 분묘이며 묘(墓)는 왕의 후궁, 왕자, 공주, 옹주의 분묘이다.

▲ 연잉군의 초상(왼쪽), 소령묘로 새겨진 비문(오른쪽)
ⓒ 김기동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은 이복형인 경종시절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어려웠던 험난했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영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미천한 출신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어머니를 위해 소령원의 비문을 소령묘(昭寧墓)에서 소령원(昭寧園)으로 고치고 싶었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숙빈 해주최씨소령묘(淑嬪海州崔氏昭寧墓)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소령원의 왼쪽 앞에 위치한 비각에서 영조의 친필 비문을 볼 수 있다.

▲ 영조의 초상(왼쪽), 소령원으로 새겨진 비문(오른쪽)
영조는 임금이 된지 29년이 지나서 다시 한번 소령원에 친필 비석을 세우게 된다. 어머니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돌아가신 왕이나 왕비의 공덕을 기려서 붙인 이름)를 붙인 후 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이라는 친필 비문을 새긴 비석을 만들었다.

소령원의 왼쪽 뒤쪽에 위치한 비각에서 영조의 친필 비문을 볼 수 있다.

▲ 묘소에서 바로 본 소령원 전경
ⓒ 김기동
묘소 뒤쪽에서 바라본 소령원의 전경은 아름답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 등을 모르더라도 소령원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를 바라보게 되면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멀리 보이는 고령산 아래 자락에 위치한 보광사에는 영조가 어머니를 위하여 만든 숙빈 최씨의 신위가 모셔진 어실각이 있다.

▲ 보광사에 있는 어실각
ⓒ 김기동
▲ 장명등에서 바라본 소령원 전경
ⓒ 김기동
궁중에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다, 임금의 승은을 입어 왕자를 낳았지만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을 하며 살았을 숙빈 최씨가 죽은 후에라도 이렇게 아름답고, 조용한 산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구파발 삼거리에서 문산 방면 1번 국도(통일로)를 타고 6.1㎞쯤 북상하면 오른쪽으로 의정부 방면 39번 국도가 드리워 있다. 여기서 우회전, 3.8㎞쯤 달린 뒤에 39번 국도를 벗어나 왼쪽 길로 6.1㎞쯤 가면 덕파령을 넘어 보광사 입구에 이른다. 보광사 입구에서 2.55㎞쯤 더 달린 다음, 오른쪽 길로 400미터쯤 갔다가 왼쪽에 걸린 능촌교를 건너면 소령원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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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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