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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때까지 해남현치소의 객사건물(출처: 해남군지)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하는 것도 있다. 시대적 조류 중에서도 난세(亂世)는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해남 윤씨가를 중흥시킨 어초은 윤효정 또한 어찌 보면 변혁의 시대를 기회로 만든 사람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윤효정이 살던 시대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의 건국과 함께 그 기초를 착실히 다져가고 있을 무렵이다.

왕조가 바뀌면 가장 먼저 행정이나 군사편제가 바뀌고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듯이 한반도 서남해안의 가장 변방 해남고을 또한 새로운 군현체제가 도입되고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조선이 건국되어 한양으로 새 도읍이 정해지고 궁궐을 비롯한 행정시스템이 갖추어지듯 해남고을 또한 읍 치소를 정하고 성을 쌓는 등 갖가지 정비가 이루어진다. 윤효정은 이러한 시기에 결혼을 통해 해남에 정착하게 되는데 당시 해남지역을 주도한 인물은 해남 정씨(海南鄭氏)였다.

정호장이 터를 잡은 해리

▲ 객사를 비롯한 관아건물과 주변의 모습들을 추측해볼 수 있는 해남읍성
ⓒ 정윤섭
정호장이 살았던 곳은 해리(海里)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 해(海)자가 들어가는 마을인 것을 보면 바다와 인접했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간척사업에 의해 바다와 멀어졌지만 옛 지도를 보면 해남현치소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양(서울)도 서해바다에서 시작된 긴 수로가 내륙으로 길게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바다 길이 중요했던 옛날에는 육로와 바닷길을 연결하기 좋은 곳에 고을 터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륙이 아닌 해안과 접하고 있는 고을을 치소를 정할 때는 거의 이러한 지리적(풍수적)여건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해남은 이러한 전형적인 여건이 매우 잘 갖추어진 천혜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해남은 1437년(세종19) 해남의 진산(鎭山)인 금강산 아래에 현치소를 정하는데 북한의 명산인 금강산과 이름도 같지만 ‘옥녀탄금형’이라는 형국에 걸맞게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곳 금강산의 동쪽 금강곡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은 해남읍을 가로지르며 배산임수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지금 보아도 금강산과 앞으로 펼쳐진 들판은 한 고을이 자리 잡기에 매우 길지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대전의 행정수도 개념처럼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야 하는 군사적인 여건이나 다른 조건보다는 교통조건이 더 고려되는 것을 볼 때 옛날 도읍의 개념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자연친화적인 조건을 고려한다면 오래전 이러한 풍수지리적 개념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남 정씨가 터를 잡은 해리지역은 해남 정씨와 통혼관계를 맺은 어초은 윤효정,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 여흥민씨 입향조 민중건 등이 해남 정씨의 사위가 된다. 또한 금남 최부의 딸이 미암의 아버지인 유계린과 결혼을 하게 되는 등 당시 향족인 해남 정씨를 중심으로 통혼관계를 통해 지역의 유력한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성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살던 곳이 지금의 해리와는 행정구역의 범위가 다소 다르지만 해남군청을 뒤로 한 향교일대의 지역이 해리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암 유희춘이나 금남 최부 등이 해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이 같은 범위를 생각하게 한다. '미암일기'를 보면 해남과 관련된 기록이 유독 많이 뛰는데 그가 해남에 살면서 맺은 이러한 인연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진산인 금강산의 바로 산기슭 아래로 향교를 비롯하여 옛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전형적으로 읍성의 바깥쪽 뒤편에 자리하는 향족(사족·양반)들의 주거 공간 여건을 고려할 때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치소가 정해진 후 정호장이 해리를 중심으로 터를 잡고 살았다는 기록이 '해남윤씨문헌' 권지일(卷之一), 어초은공 편에 나온다.

▲ 해남군청을 중심으로 한 시내모습은 예전의 읍성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 정윤섭
"정호장(鄭戶長)은 일찍이 본현에 복기(卜其)를 정했는데, 동문밖 금강산 석봉(石峯)아래다. 오세형제(五世兄弟)가 계적(桂籍)에 연속하여 등과(登科) 하였는데, 임석천 형제, 윤귤정 4형제, 유미암 형제의 등과 역시 그 터에서 나오니…, 만약 정호장이 없었다면 그 내외자손이 누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으며 한곳에 모일 수 있었겠는가?"

이 기록에는 정호장이 석봉(石峯)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고 되어있다. 그 석봉(石峯)이 속칭 ‘형제바위’로도 부르는 바위로 석봉은 사람의 눈썹같이 생겨 ‘미암바위’ 라고도 부르는데 미암(眉巖) 유희춘의 호가 이 바위에서 유래했다고 말하고 있다.

해남 윤씨 집안에서 펴낸 ‘녹우당의가보’ 어초은 편 연혁에는 어초은이 결혼 후 해남의 수성동(군청뒤)에서 현재의 연동으로 왔다는 기록이 나와 있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해남육현(海南六賢)에 속한 이들 인물들과 해남 정씨와의 통혼 관계는 조선초 해남이 치소를 이곳 해남읍에 정하고 나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새 터가 해남읍에 정해지고 기초를 닦아갈 무렵 해남 정씨라는 향족이 등장하고 이를 중심으로 해남의 인물들이 성장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해남 인물사를 놓고 볼 때 조선시대 이전에는 해남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해남이 중앙에서 너무 떨어진 변방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때까지 중앙에 진출할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는 학문적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던 탓인지 아직까지 조선 이전의 기록에 나타난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조선초 진도와 합군으로 ‘해진군’이었던 해남이 다시 해남현으로 분리되고 이곳 해남읍이 현치소(縣治所)로 터를 잡으면서 금남 최부를 비롯하여 금남을 매개로 하여 귤정 윤구,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등 많은 문인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정호장에 장가든 인물들

▲ 해남읍성의 모습이 남아있었던 일제하의 해남읍성. 일제는 전통적인 읍성의 모습을 모두 해체한다.(출처: 해남군지)
이같은 시기에 주목할 상황은 많은 인물들이 호장(戶長)이라는 직책의 정호장 가문을 중심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해남지역 학문의 연원(淵源)으로 해남을 문헌지방으로 만들었다는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 선조실록을 저술하는데 참고로 했던 '미암일기'의 저자인 미암 유희춘가, 녹우당 터를 닦은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여흥민씨 해남입향조인 민중건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해남 정씨의 사위로 맺어져 이 가문을 기반으로 성장해 간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해남 정씨의 사위(婿)가 되거나 통혼으로 연계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기도 어려운데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해남 정씨가를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해남 정씨는 지금 대체로 거의 잊혀진 성씨에 속한다. 해남 윤씨 족보에도 해남 정씨 대신 초계 정씨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해남 정씨의 묘소라고 하는 곳의 묘비에도 '초계정씨'라 기록하고 있다. 해남 정씨는 조선초 '세종실록지리지'에 제일 첫 번째 성으로 나와 있으나 이후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볼 때 해남 정씨는 조선초를 중심으로 세도를 누리다가 이후 자손을 잇지 못하고 관계로 진출하지 못하면서 쇠락한 집안 임을 알 수 있다. 해남 정씨는 직계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본관마저 없어져 족보나 가승 등 여타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해남윤씨문헌'의 나두동(羅斗冬)이 찬(撰)한 <보략(譜略)>에 의하면 해남 정씨의 시조 정원기(鄭元琪)는 려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로 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 대대로 호장직(戶長職)을 세습한 가문으로, 해남 일대의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부호(富豪)였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존재는 확실하다 할 수 있다.

▲ 한때 조선초 해남향족이었던 해남정씨 묘로 지금은 초계정씨로 되어있다.
ⓒ 정윤섭
정신문화연구원(현 국학연구원)에서 펴낸 '고문서집성 3'에 보면 해남 정씨가 고려말 이래로 호장직(戶長職)을 지낸 향족 이었다고 보고 있다. 해남 정씨 재전(在田)은 태종12년(1512)에 진도와 해남을 합쳐서 된 해진군의 관아와 객사를 지을 때 사재를 대었으므로 향역(鄕役)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진군이 다시 해남·진도현으로 나뉘자 해남현 관노비로 자신이 진고(陳告)하여 받은 노비 62구(口)를 바쳐 그 공으로 그의 자손은 향리역(鄕吏役)에서 완전히 면제받았고 그 후 그의 자손은 해남의 향족이 되었다.

이 같은 점을 볼 때 해남 정씨는 이곳 해남읍에 치소를 정할 때 강력한 향족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해남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막강한 힘을 발휘한 향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력한 향족이었던 정호장이 몇 대를 잇지 못하고 몰락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중 하나는 정호장의 후손이 대를 이어 번성하지 못해 쇠락하였고, 지속적으로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이와 함께 당시만 해도 아들이나 딸 모두 재산을 똑같이 나누는 ‘남녀균분제’로 인해 정호장은 자신의 재산을 사위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결국 자신의 집안은 지키지 못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호장은 자신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통해 명석하고 뛰어난 인물들을 데려와 후원하고 사위를 삼음으로서 해남의 훌륭한 인물로 키워낼 수 있었다. 이같은 해남 정씨를 기반으로 성장한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 윤씨가의 5백년 가업을 탄탄하게 만들어 간다.

▲ 해남정씨가 살았을 것을 추정되는 성문밖 금강산 석봉아래의 향교일대 모습.
ⓒ 정윤섭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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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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