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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중이 일어나 번성하여 대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5백년의 역사를 이어온 해남 윤씨가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는데 인물들마다 모두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들 인물 중에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나 공재 윤두서는 문학이나 회화 등 예술분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해남 윤씨가에서 광전을 중시조로 한다면 해남 윤씨가의 중흥조(中興祖)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다. 윤효정은 해남 윤씨라는 본을 갖게 한 인물로 그는 아버지인 윤경(尹耕)의 많은 형제 중에 마지막 아들이었지만, 그의 역할로 인해 해남 윤씨가는 본을 이루고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우슬재에 빛난 서광

녹색의 장원 녹우당에 터를 잡은 이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이다. 그런데 어초은 윤효정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정착하게 되는 설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해남읍에는 해남에서 가장 큰 재력을 가진 호장(戶長)직의 해남 정씨라는 향족이 있었는데, 해남 정씨는 해남에서 경제적 기반이 가장 탄탄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정 호장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던 것 같다.

▲ 금강산 정상에 남아 있는 금강산성.
ⓒ 정윤섭
정 호장이 어느 날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그는 잠을 자다 꿈을 꾸었는데 해남으로 넘어오는 고개인 우슬재 마루에서 서광이 비추고 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나 꿈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정 호장은 하인을 시켜 우슬재 고개마루를 가면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니 데려오라고 하였다.

하인이 가보니 그곳에는 정말로 한 소년이 지게를 등에 받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이웃 강진고을에 사는 소년으로 이곳 우슬재까지 나무를 하러 왔다가 잠깐 잠이 든 것이었다. 하인은 기이하게 여기고 이 소년을 데려왔는데 정 호장이 보니 행색은 초라했지만 영특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이에 옷을 새것으로 갈아 입히고 나니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정 호장은 이후 이 소년을 잘 교육시켜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과 인접하고 있는 강진군 도암면에 살면서 땔나무를 하러 우슬재까지 왔다는 당시를 상상해보면 걸어서도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당도할 수 있는 거리여서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해준다.

더욱이 윤효정의 호는 어초은(漁樵隱)이다. 그 뜻을 풀이해보면 고기를 잡고 땔나무를 하면서 은둔하겠다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을 느낄 수 있다. 자연과 벗삼아 강촌에 살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윤선도의 호 또한 고산(孤山, 외로운 산)또는 해옹(海翁, 바다 늙은이)이라 한 것을 보면 호에서도 이 집안의 자연주의적 취향을 느낄 수 있다.

▲ 금강산성에서 내려다본 해남읍과 멀리 윤효정이 분재받은 녹우당 앞의 벌판.
ⓒ 정윤섭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다분히 설화적으로 꾸며졌다고 볼 수 있으며, 더 실증에 가깝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윤효정이 당시 강진에 거주하면서 해남에 학문의 뿌리를 내린 금남 최부(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기 위해 해남을 오가다가 당시 해남의 명문거족(향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정호장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맞을 것 같다.

▲ 해남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는 우슬재.
ⓒ 정윤섭
우슬재는 설화에서도 해남과 매우 인연이 많은 고개이다. 우슬재는 해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산들이 호위하고 있는 듯한 넓은 들판에 진산인 금강산을 뒤로하고 해남고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우슬재 아래로 해남터널이 뚫려 세월의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해남고을을 감싸고 있는 이러한 형국을 풍수지리에서는 '옥녀탄금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좋은 형국 탓에 해남은 예로부터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토호들의 텃세가 드셌다고 말하고 있다.

이곳 우슬재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는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해남은 옥녀탄금형의 형국 탓에 현감이 부임해 와도 토호들의 등살에 임기를 제대로 마치고 가는 이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서구라는 풍수지리에 밝은 현감이 부임해온다. 그가 해남의 진산(鎭山)인 금강산(金剛山, 481m)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형국 탓에 항상 토호세력들의 기세에 눌려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형국을 깨뜨려야 토호들의 세력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3자3치씩을 깎아 내렸는데 그때서야 토호들의 세력이 꺾였다는 이야기다. 우슬재 설화는 윤효정 이후에 생겨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해남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우슬재'를 넘어 왔다는 것 또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 해남읍(현치소)은 진산인 금강산을 뒤로하고 넓직한 들판에 자리잡고 있다.
ⓒ 정윤섭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 해남현은 1437년(세종19)에 현재의 장소에 읍성을 쌓고 치소를 두게 되는데, 윤효정이 1476년 출생인 것을 보면 해남현이 치소를 정하고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해남정씨 정호장은 해남현의 관아(官衙)건물을 짓는데 협력하고, 자신의 노비를 관노로 헌납(獻納)하는 등 치소가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윤효정이 해남현에 입향한 시기는 조선 초의 이 같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해남 정씨와의 통혼

이 무렵 정호장은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등 당시 중앙 정계에서도 이름을 떨친 집안의 인물들과 통혼(혼맥)관계를 맺었다. 어초은 윤효정도 해남 정씨의 사위가 되어 일약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말까지 해남지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해남 윤씨가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윤효정이 해남의 향족(鄕族)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호장직(戶長職)의 해남정씨 딸을 처로 맞이함으로서 가능할 수 있게 된다. 당시에 양반사대부로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방법이 사대부 집안과의 혼맥과 관직으로의 진출이었던 것처럼 해남 윤씨가의 윤효정 또한 해남정씨와의 혼맥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최부와의 학맥을 통해 관직으로 진출 사대부가로 성장해 간다.

윤효정이 해남지방의 향족(鄕族)이자 대부호인 해남 정씨와 혼인관계를 맺게 되자 그의 혼인은 곧 경제적 부와 연결되었고, 더 나아가 해남 정씨와 혼인하여 해남에 거주하고 있던 금남 최부와 사우(師友)관계를 맺음으로써 학문적,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한 것이다.

해남 윤씨는 어초은 윤효정 때부터 명문가로서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고, 윤효정은 해남 윤씨의 본관이 시작되는 득관조(得貫祖)로 불리고 있다. 윤효정은 학문이 뛰어났으며 세 아들을 모두 문과에 급제시킴으로서 집안의 기틀을 확고히 다진다.

▲ 해남의 6현이 모셔져 있는 해촌사로 윤효정의 아들인 윤구도 모셔져 있다.
ⓒ 정윤섭
윤효정의 큰아들인 구(衢)는 151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영암에 유배되어 이후 풀려난 사람으로 기묘명현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해남육현(海南六賢)의 한사람으로 해촌사에 배향되어 있다.

그의 동생 행(行)도 문과에 급제, 동래부사, 나주목사, 광주목사 등 8주의 목사를 두루 지냈고 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또 복(復)도 1538년 문과 을과에 급제,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강진 금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들 삼형제로부터 더욱 빛을 보게 된 해남 윤씨는 그 후에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지낸 윤은중(尹殷中)과 평안도도사와 공조좌랑을 지낸 윤광계(光啓)를 배출한다.

이러한 해남 윤씨인물의 맥은 송강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으로 국문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단가시조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를 탄생시키게 된다. 해남 윤씨는 고산 윤선도로 인해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해남 윤씨를 빛낸 사람은 그 이후로도 현재, 겸재와 함께 3재의 한사람으로서 천재 화가였던 고산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에 이른다. 이는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와 청고 윤용의 3대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해남 윤씨가 인물의 계보는 줄곧 집안의 가풍을 이루고 이어져 문화예술에서 독특하고 풍요로운 유산을 남기게 된 것이다.

▲ 해남현에 치소가 정해지고 쌓은 해남읍성 현재 성벽으로 군청 뒷담 역할을 하고 있다.
ⓒ 정윤섭

덧붙이는 글 | 해남 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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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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