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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관 뒤편 축대위의 개나리는 화려한 원색이다
ⓒ 정윤섭
고산 윤선도가 살아 있다면 봄 꽃 만개한 이곳 녹우당에서 어떤 시를 지을까. 이런 때에는 다분히 풍류적인 시가 나올 법도 하지만 그의 문학적 경향을 놓고 보면 자연과 일치된 관조적 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녹우당 사랑채 앞에서 탐스런 함박꽃을 터뜨린 백목련, 전시관 뒤 석축 위에 늘어선 노란 개나리, 그 옆 절정을 이룬 벚꽃, 잎을 막 틔어내는 물오른 나무들의 새싹, 이런 때에는 누구나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녹우당은 지금 자연이 만들어내고 있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고 있다.

▲ 개나리와 벚꽃의 대비가 극명하다
ⓒ 정윤섭
녹우당은 고택 앞으로 전시관과 관리사무소 등이 들어서면서 본래적 모습의 경관이 많이 변형되었다. 건물을 짓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주변에 정원수들을 심었지만 전체적인 균형미나 자연미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들 또한 조금씩 주변과의 조화로움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세월의 덧씌움 때문일까. 어떻게 보면 자연의 회생력 내지는 자정능력과 같은 생태적 요소 때문인 것 같다. 전시관을 지으면서 석축을 쌓아 만들고 그곳에 개나리나 벚나무 등의 정원수를 심었는데 이것들이 또 다른 봄의 색깔들로 채색하고 있다.

▲ 고택앞의 자두나무도 꽃을 피웠다
ⓒ 정윤섭
▲ 사랑채 앞의 백목련은 탐스럽다
ⓒ 정윤섭
전시관 주변은 2단으로 쌓아올린 석축에 개나리나 철쭉, 벚나무 등이 조성되어 봄의 화려한 빛깔을 보여준다. 개나리의 노란색은 원색적 효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봄의 화려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꽃이기도 하다. 석축과 석축 사이의 개나리는 그 줄기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여인의 가는 허리와 같은 탐미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 옆의 수세가 왕성한 벚나무는 하얀 빛깔로 개나리와 극명하게 그 색감을 구분하며 순백의 아름다움을 토해낸다.

사랑채 앞의 목련은 녹우당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는 것 중에 하나다. 목련의 그 탐스러운 꽃의 절정은 사랑채 앞을 환하게 밝힌다. 바로 옆의 철쭉은 여인의 교태로움이 느껴진다. 사랑채로 올라가는 디딤돌 아래서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그 빛깔은 마지막 안간힘처럼 더 처연할 만큼 화려하다.

호방한 자연속의 녹우당

▲ 붉은동백도 꽃봉오리를 뚝뚝 떨어뜨린다
ⓒ 정윤섭
▲ 사랑채 앞의 철쭉은 요염하다
ⓒ 정윤섭
녹우당의 주인이었던 고산의 삶과 문학을 통해 보면 그는 '동양적 자연관' 속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 '현실을 반영한 자연', '이상적 세계를 표현한 자연', '조화와 질서의 자연'을 추구하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녹우당은 이러한 자연과의 친화가 가장 질서정연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곳 녹우당을 방문해 본 사람은 녹우당의 주변을 정원(庭園, garden)으로 표현하기에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녹우당은 웅대하고 세밀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으나 자연미보다는 인공미로 정형화된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녹우당은 고택이 중심이 되어 사신사(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영역 속에 펼쳐져 있으며, 고택의 주변 영역만 해도 50만 평에 달하고 있어 그 호방함이 '장원'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충분하다.

정원(조경)의 의미로 원림(園林, 苑林)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고산이 유거하며 조영한 곳도 달리는 원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원림(園林)은 보통 동산이나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조경하고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원림은 고려시대 때부터 쓰여 온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조경의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자연을 거역하거나 자연을 훼손하면서 정원을 꾸미거나 건물을 짓지 않았는데 고산 또한 이러한 사상이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림이라는 표현이 있기도 하지만 고산의 대표적인 유거지인 녹우당이나 보길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지역의 몇몇 원림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사뭇 달라 장원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린다.

서구적 개념의 장원(莊園)은 봉건제하에서 중세기에 귀족이나 사원에 딸린 넓고 큰 토지를 소유한 형태로를 말하고 있다. 국부(國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해남 윤씨가였던 만큼 이러한 서구적 개념의 장원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 소담스런 수선화도 녹우당의 봄을 일찍 수놓는다
ⓒ 정윤섭
그러나 녹우당에 쓰는 '장원'은 자연의 개념을 좀더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이것은 고산이 줄곧 추구했던 순수자연에 인공미를 약간 가하여 자연과의 일치를 추구했던 공간의 개념이다.

어차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을 정복하든지 순응해야 하는데 기왕이면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로움 또한 자연을 경영할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 더욱 빛이 나지 않을까.

장원의 개념을 떠올리면 영국의 생물학자이며 작가인 W. H허드슨의 소설 <녹색의 장원>(綠色의 莊園, Green Mansions)이 생각난다. 제목도 같지만(번역을 같게 했겠지만) 소설의 내용이 '대자연과의 정신적인 교류를 통해 인간 본연의 순수성에 눈을 뜬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고산의 자연사상과도 일맥상통함을 느끼게 한다.

어찌 보면 고산은 당시 양반 사대부가로서 다분히 풍류적이고 탐미적 자연을 즐겼다고도 할 수도 있지만 천석고황(泉石膏肓)과 같은 자연애는 현대 문명 속에 정신과 육체가 매몰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할 듯하다.

덧붙이는 글 | 해남윤씨가 녹우당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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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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