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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 자욱하게 낀 지난 토요일(8일), 전라북도 무주를 찾았습니다. 여름이면 구천동의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로, 겨울이면 능선 하나 너머 리조트에 스키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인 고장입니다. 특히 휴가철에 사람들이 몰리는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때 묻지 않은 깨끗한 환경에 사시사철 볼거리와 공부할 거리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고장을 대표하는 덕유산국립공원의 한 구석,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트 메뉴'로 묶어 한 번쯤 들러봄직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1995년 완공한 양수식 발전소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자리하고 있으며 튼실한 산성을 두르고 우뚝 선 적상산이 그곳입니다.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적상산. 덕유산 연봉 중의 하나로 1000m 남짓 되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세가 워낙 험해 웬만한 자동차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간신히 오를 수 있는 바위산입니다. 자동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위로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솟아있고, 아래로는 가파른 벼랑이 이어져 있어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껴집니다.

▲ 양수식발전소의 상부저수지와 적상산 전망대 모습.
ⓒ 서부원
산세가 이토록 가파르지 않았다면 산 정상에 성채 같은 댐을 막아 인공저수지를 만든 양수식 발전소를 세울 까닭이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감아 오르는 아찔한 아스팔트 도로를 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사실 산비탈을 깎아낸 도로는 산의 생태계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주범이고 보면, 적상산은 깎아지른 듯한 '절경' 탓에 생채기를 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운명을 타고난 셈입니다.

'적상산 전망대'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원통형 콘크리트 건물은 하부저수지로 물을 밀어내며 발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압(造壓)수조입니다. 계단을 통해 이곳에 올라 산자락을 내려다보면 덕유산 준봉들의 장쾌한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비록 황사가 뿌연 탓에 시야가 그리 넓지는 못했지만 가슴을 확 틔우는 후련한 맛은 일품입니다.

고개를 돌려 곁에 널찍하게 자리한 상부저수지를 조망해 봅니다. 저 멀리 건너편에 새로 조성한 적상산 사고(史庫)가 보입니다. 본디 사고가 있던 자리는 지금 상부저수지로 인해 수몰되어 현재의 터로 옮겨와 복원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각(史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각(璿源閣)이 남매처럼 옆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마무리 정비 작업 중인지 주변이 다소 어수선합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부저수지. 저 멀리 복원된 적상산 사고가 보인다.
ⓒ 서부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는 지방 대도시 한복판에서 외부의 적들은 물론 백성들조차도 쉬이 접근할 수 없는 험한 산중에 새로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강화도 정족산과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에 세워졌다가 묘향산 사고가 변방 오랑캐들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폐하고 이곳 적상산 사고로 대체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적상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은 6·25 전쟁 중에 분실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경로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북한 당국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과, 사고의 건물들이 모두 멸실되었지만, 선원각 건물 한 채가 그대로 살아남아 인근 안국사(安國寺)의 법당-천불전-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록도 그렇지만, 건물조차 자신의 탯자리를 떠나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이 생각할수록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통풍을 위해 땅에서 띄운 자리를 막아 내부공간으로 만들고 그곳에 -왕실의 족보 대신- 불상들을 모셔놓고 있으니 본래의 기능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법당으로 재활용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 적상산 사고의 선원각을 그대로 옮겨 사용하고 있는 안국사 천불전 모습.
ⓒ 서부원
안국사와 사고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급한 경사의 산비탈에 여느 시골집의 야트막한 담벼락 마냥 길게 늘어서 있는 돌무더기를 만나게 됩니다. 고려 말 최영의 건의로 축조되었다는 적상산성입니다. 웬만한 어른 키보다도 낮은 돌담이 산성이라니,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상산 중턱을 감아 도는 결코 짧지 않은 성벽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결같이 '난장이'들 뿐입니다.

그러나 -위가 아닌- 아래에서 성을 올려다보면 단박에 수긍이 갑니다. 사실 적상산 자체가 별도의 성벽이 필요 없는 요새입니다. 굳이 높이 쌓을 까닭이 없었던 것은 아닐지. 적상산 정상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볼거리를 뒤로 하고 속세(?)로 내려오기 위해 타고 올랐던 아스팔트 도로를 디뎠습니다.

만약 이 길이 없었다면, 과연 이곳을 쉬이 답사할 수 있었을까. 이 많은 볼거리, 공부할 거리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러하기에 이 길에 감사해야 할까. 아니, 길을 만들기 위해 잘라낸 산허리에는 굵은 자갈이 흘러내리는 너덜지대가 이어져 있고, 이를 막기 위한 철 펜스가 흉물스럽게 둘러쳐져 있는데, 이런 것들을 보면 마냥 좋아할 만한 것은 못 되는데. 그렇다면 아쉬워해야 할까.

▲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소인 '무주 제1경' 나제통문.
ⓒ 서부원
아무튼 잘리고 깎여나간 산허리에 놓인 아스팔트 도로의 도우심(?)으로 적상산 꼭대기의 볼거리를 눈으로 다 훔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 들렀던 -무주 제1경이라는- '나제통문'은 예전처럼 그렇게 매력적인 볼거리로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적상산에서 눈이 사치(?)를 한 탓입니다.

덧붙이는 글 | 찾아 가시려면 : (서울 쪽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무주나들목->무주읍 방면(19번국도)->적상산,안국사 방면(727지방도)->북창교 지나 우회전->8킬로미터 직진하면 적상터널 지나 상부저수지 도착

(광주, 부산 쪽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덕유산 나들목->무주 방면(19번국도)->리베라모텔 지나 우회전(49번지방도)->치목터널 지나 좌회전(727번지방도)->하부저수지 지나 적상산,안국사 방향 좌회전->이후 서울 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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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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