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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후 28년이 지난 현재까지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 중인 김용자씨.
ⓒ 오마이뉴스 남소연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의 상황은 나아진 게 없어요. '나체시위'를 하고 '똥물'까지 맞아가며 싸웠지만 30년이 지났어도 '비정규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거리에 설 수밖에 없더군요. 서글픈 현실입니다."

한국 최초 여성 노조지부장 배출(1972), '나체시위'(1976), '똥물사건'과 124명 대량해고(1978), 이후 원직복직 투쟁. 어둠의 시대를 정화한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사의 상징인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발자취다.

이들이 걸어온 길이 영상기록물로 다시 세상에 선보인다. 서울여성영화제에서 9일, 12일 상영될 다큐멘터리 <우리들은 정의파다>가 바로 그것.

'똥물사건'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에 대한 시대의 야만은 28년이 흘렀지만 결코 지난 일이 아니다. 당시 해고된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복직되지도 않았고 회사와 정부·한국노총이 한 통속으로 벌인 탄압에 대한 사과조차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이들 해고노동자들이 '원직복직'의 꿈을 놓지 않을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마이뉴스>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김용자(50)씨를 5일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서 만나 지난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간호사의 꿈을 단숨에 깨버린 작업장 현실

"돈을 모아 나중에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으로 입사했지만, 현장에 들어가 보니 그야말로 꿈이더라구요. 잔업에 야근까지 해도 워낙 저임금이어서 그런 꿈을 품을 수 없다는 걸 곧 느꼈죠."

'나체시위'와 '똥물사건'

'나체시위'는 1976년 7월 동일방직 노조의 활동을 막기 위해 이영숙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부장을 경찰이 연행한 데 항의하면서 벌어진 사건.

8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경찰과 회사의 강제해산 시도에 맞서 파란 작업복을 벗고 저항했으나 경찰의 폭력을 막지는 못했다. 2명의 조합원이 5일간 혼수상태에 빠졌을 정도. 지금까지 '나체시위'라는 표현을 쓰지만 실상은 '속옷시위'였다.

'똥물사건'은 1978년 2월 21일 새벽, 야근을 마치고 대의원선거 투표에 참여하려던 동일방직 노조 여성노동자들에게 구사대가 똥을 뿌리고 입에 똥을 집어넣은 야만적 사건이다.

1970년대에 벌어진 대표적인 민주노조 탄압사건으로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미리 경찰에 보호신청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경찰은 방관했고 한국노총도 구경만 했다.

충남 청양 출신의 김씨가 동일방직과 인연을 맺은 건 18살 때인 1974년. 모친 병환으로 1년간 회사를 떠난 적은 있지만 동일방직은 30년이 넘도록 그의 삶 한가운데 자리잡았다.

인천 만석동에 위치한 동일방직은 70년대 섬유산업 호황기를 맞아 노동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관리자 집에서 몇 달씩 무보수 식모살이를 하며 입사를 기다리는 이들이 여럿 있을 정도였다고. 1300여명 직원 대다수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적은 월급을 쪼개 고향집에 생활비를 부치고 남자 형제들의 학비를 댔다.

김씨도 고향을 떠난 뒤 남의 집 살이로 시작, 2교대제인 구로공단의 한 제빵업체에서 일하며 집에 돈을 부쳤다. 그러나 2교대제는 가혹했다. "일요일엔 18시간 일해야 했고 점심도 15분 안에 해결해야 했어요. 친한 친구 하나가 견디다 못해 빵 만드는 롤러에 손을 넣었죠."

그 친구의 손은 절단됐고 김씨는 3교대제인 동일방직으로 옮겼다. 하지만 동일방직 역시 만만치 않았다. 30분만 지나면 온몸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먼지가 많아 스펀지를 넣고 다니며 수시로 털어야 했다. 폐병에 걸리는 이도 다수였다.

연중 40도 정도를 유지해야 했기에 한겨울에도 얇은 반팔 티셔츠에 짧은 치마를 입은 채 기계속도에 맞춰 '1분에 140보' 이상을 걸어야 했다. 일종의 각성제인 '타이밍'으로 졸음을 견디며 야근해야 했고 위장병도 달고 살았다.

'새 세상' 보여준 노조... 회사·노총·경찰 탄압에 맞서다

이런 그의 삶에 숨통을 열어준 건 노조와 동료였다. 남성노동자를 구사대로 내세운 탄압으로 노조사무실에서까지 일상적으로 폭행이 일어났지만 여성노동자들은 서로 의지하며 버텼다.

'노동자의 대표기구'라는 한국노총도 민주노조를 탄압했지만 여성노동자들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정부의 반노동 정책도 여성노동자들을 무릎꿇게 하지는 못했다.

"나도 '똥물사건' 때 정면으로 '똥물'을 맞았어요. 경찰이 회사에 많이 들어와 있었지만 구사대가 우리를 쫓아다니며 그런 짓을 하는 걸 구경만 했어요. 도움을 요청하자 경찰들은 곤봉으로 우릴 때리며 말하더군요. '야, 이 X년들아! 오지 마. 나중에 말려줄 거야.' 경찰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죠."

그러나 그들은 버텼다. 여성노동자들은 노조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권리,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 저항할 권리'를 배웠다. 노조가 무너진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사라짐을 의미했기에 민주노조를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저임금, '공순이'라는 딱지, 남자들의 멸시 속에서 가슴 한 켠에 쌓인 '나는 뭔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라는 의문을 노조에서 풀 수 있었죠. 인간다운 삶을 알게 된 겁니다."

1978년 3월 10일 TV로 생중계된 장충체육관 노동절 행사 때 이들은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며 시위를 펼쳤고, 그뒤 명동성당 등에서 13일간 단식하며 노동탄압 중단과 민주노조 원상복귀를 요구했다.

종교계 인사들의 중재로 회사는 이들 124명의 현장복귀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나 노조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노동탄압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그저 무조건 3일내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안 받아들인 게 아니라 현장에 못 들어간 겁니다." 같은 해 4월 1일자로 124명은 해고된다. 사유는 '무단결근'이었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친구들 많았다"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회와 여성영상집단 '움'이 공동제작했다. '정'으로 뭉쳐 '정의'를 지켰다는 뜻에서 붙여진 제목.

지난해 3월부터 제작된 이 영화는 14명의 인터뷰와 이들의 복직투쟁기를 담았다.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김용자씨와 같은 평조합원들.

김씨는 "당사자인 우리 스스로 역사를 정리·재조명하고 싶었으며, 특히 해고뒤 찢기고 잡히고 구속되는 과정에서 너무 힘들었던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동일방직 노조를 비롯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사는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아름다운 저항>,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등에도 잘 기록돼 있다.
이들은 '부당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81년까지 상급기관인 섬유노조·한국노총·노동부 등을 찾아다니며 복직투쟁을 벌였다. 기숙사에서 쫓겨난 이들은 갈 데가 없어 인천 화수동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기거하며 투쟁에 동참했다.

이 때는 10.26, '서울의 봄', 5.18, 신군부 집권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격변기. "박정희가 죽은 뒤 다 복직될 거라고 생각했던"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더 독한 전두환이 선사하는 더 심한 탄압"에 맞닥뜨려야 했다.

군사 독재정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대법원마저 1981년 '부당노동행위에 따른 부당해고'라는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고, '법적인' 복직투쟁은 일단 종료됐다. 당시 '빨갱이·불순분자'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김씨를 비롯한 해고자들을 특히 괴롭힌 건 1980년대 내내 따라붙은 '블랙리스트'였다.

"노동자들에게 '블랙리스트'는 사형선고보다 더 심한 조치에요. 취업 자체를 막아 생존권을 박탈하니까요. 이것 때문에 죽으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많이 있었어요."

김씨도 '블랙리스트' 때문에 7번 넘게 해고됐다. 가장 오래 취업했던 기간이 3개월이었고 심지어 3일만에 해고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나쁜 조건의 취업자리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지요. 그나마 노조활동 경력이 들통나 바로 잘렸고요. 블랙리스트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어요."

해고자들은 지긋지긋한 '블랙리스트'에 맞섰다. 도마, 연탄집게 등 살림도구를 싸들고 동일방직 본사로 찾아가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농성을 벌였다. 노동부를 점거하기도 했다. 이때 김씨도 구속됐다. 결국 해고자들은 동일방직이 만든 블랙리스트를 입수·공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일상적으로 감시를 받은 것도 이들을 힘들게 했다. 경찰이 가족과 친척들의 직장까지 수시로 찾아가는 통에 관계가 멀어지거나 시댁과의 관계까지 힘들어진 이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결혼 후 시댁에서 '빨갱이'로 찍혔죠. 남편이 술만 마시면 때리고 집 밖으로 끌어내 '우리 마누라는 빨갱이'라고 외쳤고요. 힘든 세월이었어요. 어찌 이 친구만 그런 일을 겪었겠어요."

1981년 이후 해고자들은 시민단체, 생활협동조합, 노동단체 등 각자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부당해고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희망마저 바쁜 일상에 묻히지는 않았다.

"시골로 시집간 '부녀부장' 언니는 몇 년간 개구리 울음 소리가 예전에 구사대와 경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티며 울던 소리로 들렸대요. 그래서 개구리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울었다고 해요. 그만큼 다들 푸른 작업복을 다시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거죠."

민주화운동 관련성 인정... 끝나지 않은 복직투쟁

▲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지난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해직인정자 복직권고 이행 및 불이익행위 근절을 촉구하는 집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78년 당시 일명 '똥물사건' 사진을 집회장 주변에 걸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 민주화운동 유공자 신청을 받겠다는 2000년 정부 발표였다. 그러나 124명 모두가 모일 수는 없었다. 3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2명은 정신이상, 공황장애로 고통받고 있었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2001년 동일방직 신청자 73명 모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정치권력에 의한 부당해고로 간주,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한 것. 2004년엔 이중 37명의 복직신청도 받아들여 동일방직에 '복직권고'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2006년 지금까지도 이들의 복직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1978년 이들을 해고했던 사장이 이젠 회장이 된 동일방직에서 당시 해고가 정당했다는 이유로 정부의 '복직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

이들은 관계기관과 열린우리당 등에 '권고' 조치 이행을 촉구하고 있지만 모두 '법규정 미비' 타령만 하고 있다. 인천 동일방직 공장 앞 집회, 서울 본사 앞 농성도 벌였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해에는 젊은 시절 피와 땀이 서려있는 인천 동일방직 공장과 노조 사무실을 27년만에 둘러볼 수 있었다. "예전 그대로더라고요. 많이 울었죠."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처럼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받았음에도 여전히 '복직권고' 조치가 이행되지 않고 있는 동아·조선투위, 원풍모방, 한국도루코, 대한마이크로, 반도상사 등의 해고자는 227명에 이른다.

이들은 ▲부당해고 사죄 ▲즉각 원직복직 ▲복직권고가 아닌 복직강제로 관련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오는 1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할 예정이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원직복직해 우리 손으로 사표를 쓰고 나오고 싶어요. 28년간 기다려왔습니다. 뒤늦게라도 잘못을 바로잡는 사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인터뷰를 마칠 무렵 김씨가 밝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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