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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흥례문
ⓒ 이정근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개국한 조선의 엘리트들은 개성을 벗어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한양을 천도지로 낙점하고 왕성으로서의 빈틈없는 설계를 했다.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을 중앙에 두고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그리고 외곽에 성을 쌓아 8개의 문을 내었으니 그중에 하나가 숙청문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개국공신 정도전은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각 문의 이름을 지었다. 그 지(智)에 해당하는 문이 숙청문이며 오늘날의 숙정문이다. 잠시 살펴보면 이렇다.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북대문.

▲ 동대문
ⓒ 이정근
음양오행으로 따져 동쪽은 봄을 상징하고 목(木)에 해당하여 인(仁)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였으며 지(之)자를 끼워 넣은 이유는 동대문이 위치한 지역이 지세가 얕아서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당대의 석학이자 엘리트 정도전이 새로운 왕성을 설계하면서 왜 음양오행에 따라 북대문에 지(智)자를 삽입하지 않고 숙청문이라 지었느냐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름으로 지자를 따와 소지문(炤智門)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지만 최종 낙점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정해졌다.

▲ 숙정문
ⓒ 이정근
북(北)은 음양오행에 따라 겨울과 물을 의미하고 있으며 음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설명하면 숙청의 청(淸)자에 삼수변이 들어가니까 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지(智)자를 쓰지 않고 청(淸)자를 쓴 것은 법궁(경복궁)에 외척이 발호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비책이었을까? 여란(女亂)을 방지하기 위한 비방이었을까? 조선 왕국의 패망시기를 예견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종묘 정문 창엽문(蒼葉門)과 함께 정도전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 창엽문으로 추측되는 종묘 정문
ⓒ 이정근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성곽을 연결하여 도성 2차 방어선인 탄금대성을 쌓은 숙종이 그의 재위 41년(1715년)에 한북문을 세우고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내린 것으로 봐서 한양도성 정북에 북(北)을 의미하는 지(智)자가 빠진 것을 아쉬워했나보다. 하지만 도성 북쪽에 지(智)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린 이후 장희빈을 비롯한 궁중여인들이 발호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 홍지문. 현재의 홍지문은 1977년도에 복원한 것이며 편액은 2년 후 부하의 총탄에 쓰러진 독재자의 글씨다.
ⓒ 이정근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나 왕위에 올랐지만 오늘날 독살설이 대두되고 있는 경종의 의문사.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지만 그의 아들 효장세자의 의문의 죽음과 아버지에 의하여 어이없게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죽음. 이 모든 것이 궁중 여인들의 질투와 시기가 뒤엉킨 피비린내 나는 암투였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숙종시절 이러한 얘기도 전해져 온다. 구중궁궐 깊은 곳. 창덕궁 후원 아주 깊은 곳에 천하에 음기가 센 곳이 있다.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흐르며 해가 밝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곳이다. 이곳을 독차지한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궁중 여인들은 음기 센 이곳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 창덕궁 후원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음지(陰地). 오뉴월에도 냉기가 흐르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촉촉이 젖어있다.
ⓒ 이정근
살벌한 싸움에서 승리한 장희빈은 이곳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밀려난 숙빈과 후궁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변의 이목을 피해 몸종 하나만 데리고 숙정문 나들이에 나섰다. 숙정문의 음기를 받기 위함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에 호랑이가 있던 시절에 여인네가 밤길에 나선다는 것은 생명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숙정문의 음기를 받아서 일까? 장희빈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던 최숙빈이 숙종으로부터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훗날 조선 21대 임금 영조대왕으로 등극한 연잉군이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니 숙정문의 음기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 장안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 궁중여인들이 연적을 저주하고 음기(陰氣)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에 사용했던 석물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다.
ⓒ 이정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등극시켰지만 그의 아들 순조의 혼처에서 안동김씨를 배제하지 못한 우를 범해 조선 왕국의 몰락을 재촉했던 여풍(女風). 이 모든 것이 지(智)자와 무슨 함수관계가 있을까? 역시 북대문에서 지(智)자를 배제한 정도전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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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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