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4월 1일부터 일반 관람객에 공개된 숙정문
ⓒ 이정근
38년 동안 일반인의 접근을 불허하며 굳게 닫혀있던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라 일컬어지던 숙정문이 열렸다. 지난해 9월 언론에 공개된 이후 일반 공개를 준비하던 숙정문이 드디어 4월 1일 일반 공개를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관람 예약을 받아 1회 100명씩 하루 네 차례 관람이 시작된 첫날.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관람시작 30분 전, 삼청각 옆에 임시로 마련된 간이 사무소에 집결해 인적사항을 확인한 시민들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해설사의 도움으로 숙정문 관람을 시작했다.

▲ 4월 1일부터 숙정문 권역을 개방한다는 현수막
ⓒ 이정근
한양도성의 정 북문이었으나 문으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산속에 묻혀있던 숙정문. 1968년 북한군 124군 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이전부터 백성과는 거리가 먼 문이었다. 북쪽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음기(陰氣) 플러스 음기(淫氣)'의 문으로 낙인 찍혀 백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던 문. 이 문이 시민의 문으로 돌아온 첫날 시민들은 탄성을 질렀다.

"자연과 어우러진 숙정문이 너무 멋져요."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서 왔다는 김연희(56)씨는 이렇게 감탄을 연발했다. 그렇다. 문은 문이었으나 잊혀진 문이 숙정문이다. 백성의 품에서 멀어졌던 문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다. 이 8개의 문중에서 가장 사연이 많고 파란 많은 문이 바로 숙정문이다.

▲ 숙정문에서 바라본 서울 성곽
ⓒ 이정근
숙정문은 축조 18년 만인 태종 13년(1413)에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상서에 따라 폐쇄됐다. 폭정으로 치닫던 연산군은 후원에서 질펀하게 벌어지는 채홍의 잔치에 백성이 내려다보는 것이 기분 나빴는지 창덕궁과 창경궁 주변의 민가를 강제 철거하면서 숙정문을 아예 동쪽으로 이건(移建)하기를 명했다. 이렇듯 각종 설(設)과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폐쇄했다 열기를 반복했다.

음양설에 따르면 남(南)은 양(陽)을 의미하고 화(火)를 상징하며, 북(北)은 음(陰)을 의미하고 수(水)를 상징한다고 되어있다. 때문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하면 종묘사직과 명산 대천에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음기를 받아들여 비가 오기를 하늘에 간절히 기도했다. 태종 16년 이후에는 아예 기우절목(祈雨節目)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상설화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하늘의 음기를 받아들여 비를 구하는 형국이다.

▲ 성곽을 따라 잘 다듬어진 관람도로
ⓒ 이정근
반대로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풍수 재해가 발생하면 음기가 너무 강한 결과로 인식하여 음기가 들어오는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어 비가 멈추기를 기원했다. 숙정문은 어쩌면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 위안을 받고자 하는 살풀이 퍼포먼스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도성의 아녀자들이 섹스스캔들만 일으켜도 숙정문을 타고 들어오는 음기가 원인이다 하여 문을 닫았다. 이는 숙정문이 음방(陰方)에 속하기 때문에 그러한 속설이 생겨났겠지만 심지가 곧은 여자라도 숙정문과 자하문 근처에 가면 무너져 버린다는 탕설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 첫 데뷔한 해설사가 설명을 까먹고 컨닝 하겠다고 실토하자 다함께 긍정하면서 웃고 있다
ⓒ 이정근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전혀 터무니없는 낭설만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자신의 몸이 부실하여 서방님이 시앗(첩)을 보았을 경우 음기가 가장 세다는 음력 정월 보름날 숙정문에서 달맞이하면 신랑이 되돌아온다는 속설이 한양 장안에 광범위하게 퍼져 숙정문과 자하문에는 여인네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 숙정문 편액
ⓒ 이정근
숙정문은 세워질 당시 통행의 목적보다는 상징성 차원에서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북악을 진산으로 좌청룡 타락산과 우백호 인왕산을 축으로 도성이 축조될 때 방위상 진북(眞北)에 해당하는 북대문은 북악산 깊숙이 들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본의 아니게 개명을 당해야 했다. 태조 5년 처음 세워질 때는 숙청문(肅淸門)이라 명명되었으나 그저 평범하게 북문이라 불리다 오늘날에는 숙정문(肅靖門)이라 불리고 있다. 이름이 뒤바뀐 이유도 불분명하다. 연산과 중종 연간에 슬그머니 숙정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여 혼용되더니 중종 18년 이후에는 아예 숙정문으로 굳어졌다.

▲ 북악산 정상까지 30분이라는 팻말을 가리키며 빠른 시일 내에 전구간이 개방되면 좋겠다는 유두희씨
ⓒ 이정근
"자하문에서 숙정문까지 산길로 다니며 진달래 따먹고 다래 따먹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시 오게 되어 감개무량 합니다." 종로구 부암동에서 왔다는 유두희(53)씨는 옛날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었다.

"숙정문과 촛대바위까지만이라도 개방된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까지 나머지 구간도 빨리 개방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움이 많은지 북악산 정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서울 성곽에서 바라본 시가지
ⓒ 이정근
되돌아오는 길에 관람객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북악산을 거쳐 창의문이 있는 자하문 고개까지 빨리 개방해 달라는 것이다. 또한 출발과 도착 지점인 홍련사 입구가 대중교통 사각지대여서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삼청터널은 도보 통행을 금지하고 있고…. 이곳은 택시 잡기도 힘들다. 삼청동 방향과 성북동 방향을 오가는 마을버스가 있으면 좋겠다." 어느 한 시민의 볼멘소리다. 숙정문을 개방하면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전세버스를 마련했지만 홍보 부족과 행선지 표시 미부착으로 인해 시민들이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 광화문과 안국역 쪽으로 나오는 관람객들이 본의 아니게 삼청각 셔틀버스를 이용하면서 기사 아저씨로부터 구박받은 데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 촛대바위 전망대에서 기념 촬영하는 관람객들
ⓒ 이정근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음기에 휘둘리는 것은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국가적인 보안이니, 최고 통수권자에 대한 안보니, 대통령 경호니 하는 구실로 백성이 가보고 싶은 곳을 막아서도 아니 되고 통제해도 안 될 것이다. 되고 안 되고는 시민들이 알아서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시민의식은 성숙했다.

덧붙이는 글 | 숙정문을 관람하고자 하시는 분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숙정문 배너를 클릭한 다음 자신의 인적사항을 입력하고 신청하면 됩니다.

*다음 편은 음기가 강한 숙정문에서 파생된 장희빈과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