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3.15탑 앞에 세워진 표지석
ⓒ 희망연대
4월혁명의 잉걸불이 되었던 마산 3.15의거. 1960년 초봄에 일어난 마산 3.15의거에서 '김주열'이란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 있을까.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다가 어부의 그물에 의해 떠오른 '김주열'이 없는 4.11 2차 마산시민들의 봉기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4.19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없다. 근데도 요즈음 마산지역의 일부 사람들은 김주열 기념 사업에 대해 딴지를 많이 걸고 있다. 이들은 김주열 열사의 고향인 남원과 김주열이 숨진 마산 쪽에서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가 생기면서, 김주열 열사에 대한 묘지 성역화, 생가복원, 시신 인양장소 표지석 제막 등의 사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3.15 마산의거와 4.11 2차 마산시민 봉기에서 경칠이 쏜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 사람들이 12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제쳐두고 왜 김주열만을 3.15의거의 주역처럼 내세워 특별하게 기리는 행사를 하느냐는 것. 또한 그때 김주열은 마산상고에 입학을 앞둔 예비 고등학생으로서 3.15의거에 스스로 참가한 게 아니라 구경꾼의 입장에 서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

"3.15의거탑 앞에 세워진 역사표지석에 새겨진 글을 읽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3.15에서 4,11, 4,19, 4.26에 이르기까지 4월 혁명의 전후 과정을 기술한 내용 중에 무언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하나가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니 4.11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산시민 2차 봉기일인 4.11일은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 마산시민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여 극렬한 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이 전국으로 번져 4.19로 이어진 것이다. 10줄의 문장을 추가한다 해도 넉넉하게 남을 표지석의 넓은 공간에 '김주열'이란 이름 석 자를 넣는 것에 마산사람들이 참 인색하다는 생각을 좀체 떨쳐 버릴 수가 없다."


▲ 김영만 대표
ⓒ 희망연대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김영만(열린사회 희망연대 전 대표) 공동대표는 지난 28일, 열린사회희망연대 홈페이지에 김주열을 살려야 마산 3.15의거도 살 수 있다는 주장의 글을 실었다. 김 대표는 이 글에서 전라도 남원 출신인 김주열을 경상도 마산에서 제대로 대접해야 4.11 2차 마산 봉기와 4.19혁명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으며,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밝혔다.

김영만 공동대표는 "누구라도 3.15의거와 4.19혁명을 이야기하면서 '김주열'이라는 이름 석 자를 뺄 수가 없다"며 "김주열의 죽음이 이 땅에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역사적인 대사건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김주열을 추모하는 사업이나 단체가 생기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못 박았다.

김 대표는 "어떤 이들은 마산 3.15의 1, 2차 시민봉기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희생된 이들이 12명이나 되는데, 굳이 김주열만을 특별히 기리고 기념하는 것은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라며 "사실 3.15와 4.19라는 민주의 제단에 피를 뿌린 모든 민주영령들의 희생은 어느 누가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와 같은 이유로 3.15와 4.19를 거론하면서 김주열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추모사업에 딴죽을 걸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그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며, "마산시민 2차 봉기일인 4.11일은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 마산 시민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여 극렬한 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이 전국으로 번져 4.19로 이어진 것"이라고 곱씹었다.

김 대표의 주장에 따르면 4.19 이후 희생자 유가족들이나 부상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과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 희생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김주열 덕분이라는 것. 그리고 김주열을 추모하는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만 그때 사람들은 '왜 다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래는 없느냐'고 섭섭해 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장소
ⓒ 이종찬
게다가 마산상고 김주열의 입학동기들이 단순히 김주열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서울로 간 수학여행길에서 청와대의 초청을 받아 대통령을 만난 사실만으로도 그 시대 김주열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 얼마만큼 컸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인사들이 형평성 운운하며 김주열의 기념사업을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김주열 추모사업회 일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혹시 너무 과민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46년 전의 기억을 자주 되새겨 보는 버릇이 생겼다. 분명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산 시민들의 김주열에 대한 애정과 연민과 자랑은 정말 대단했다. 그 당시 마산 시민들의 3.15는 바로 김주열이요, 4.19도 김주열이었다."

김영만 대표는 "그동안 3.15관련단체에서 다른 희생자와의 형평성을 운운하며 김주열추모사업에 제동을 걸때마다 곧잘 유관순의 예를 들었다"며 "3.1절만 되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역사적 인물이 어째서 유관순 뿐이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다른 독립열사들과의 형평성을 거론하며 딴죽을 거는 사람이 없지 않는가?”라고 되묻는다.

김 대표는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떠올리는 이유는 수없이 많은 애국열사들이 일제의 총검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유관순의 이야기를 통해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순국열사들의 고초와 민족의 수난사를 뼈저리게 감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니냐"라며 그나마 유관순은 김옥에서 자산의 뜻을 밝힐 수 있었지만 김주열은 자신의 의지를 밝힐 기회도 없이 참사를 당했기 때문에 3.15 시위에서 단순 가담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 김주열 열사 비석
ⓒ 희망연대
사실, 김주열 사건은 우연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경찰은 분명 시위대를 겨냥해 최루탄을 쏘았고, 김주열은 경찰이 저지해야 할 시민항쟁의 대열 속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에는 누구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이 팽배한 시대였고, 김주열이라고 해서 그런 시대상황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김영만 대표는 "김주열은 분명 자신의 의지로 역사의 부름 앞에 온몸을 바쳤으며, 4월 11일 그날부터 그는 전국적 시위를 주도한 주모자였다, 하지만 3.15 역사 표지석에 김주열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라며 "그렇다고 해서 3.15와 4.19에 오직 김주열만 있고 다른 민주영령들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마산과 남원에서 활동 중인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는 김주열 열사의 뜻을 따르는 순수한 민간인들이 모여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회원 개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 운영하는 단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씨앤비> <시민의신문> <시골아이 고향>에도 보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