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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자기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그는 언젠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에게 "젊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쁜 기억력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마일즈 데이비스 평전, 거친 영혼의 속삭임> 561쪽 참조).

기억이 물고 늘어진 자리에 상흔(傷痕)이 남는다. 기억은 흘러가야 정상인데, 도로 위 자동차처럼 정체될 때 상처는 발끝에서부터 머리로 서서히 올라온다. 머무는 기억은 상처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말처럼 '나쁜 기억력'은 늙지 않는 비결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트럼펫터 마일즈 데이비스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아티스트이다. 재즈음악사에 있어 그만큼 많은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도 드물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재즈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것은 변화와 혁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일즈 밴드의 일원이었던 색소포니스트 데이브 리브먼(Dave Leibman)은 이렇게 말했다. "마일즈는 단 한 번도 같은 음을 연주하는 법이 없었어요"(평전, 667쪽), 변화와 혁신은 그의 화두였는지 모른다.

재즈의 새로운 사조(思潮) 앞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Birth Of The Cool', 'Kind Of Blue', 'Bitches Brew'로 대표되는 쿨, 모달(Modal), 재즈 록 퓨전 등 1949년부터 십년을 주기로 새로운 음악 사조가 저널을 장식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마일즈는 그러한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임의로 붙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녹음한 음악들을 쿨이라 명명한 적이 없어요."(<김현준의 재즈파일>, 232쪽)

마일즈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앞 시대의 음악 흐름을 뛰어넘어 자기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창출하기 위한 혁신이 아니었나 싶다. 범박하게 말하면, 재즈에서 어떤 사조나 장르의 분류는 평론가나 저널리스트들이 대중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이론일 뿐이다.

재즈는 관점이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어떤 것은 누락되고, 다른 것은 부각되는 것이다. 나는 재즈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재즈는 미국의 음악이지만, 비주류의 음악이고, 흑인들의 일상적 슬픔을 반항적으로 표현한 음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의 판소리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 앨범재킷
ⓒ 콤롬비아
마일즈 데이비스의 수많은 앨범 가운데에서도 그림과 매치되는 회화적인 앨범은 < Sketches of Spain >이다. 스페인을 스케치한 이 앨범의 재킷은 그의 다른 앨범 < Bitches Brew >의 초현실주의적 앨범 재킷과 더불어 미술에 대한 마일즈의 감식안을 엿볼 수 있는 앨범이다.

정열의 붉은색과 유혹적인 노란색 가운데 트럼펫을 연주하는 마일즈의 모습이 낭만적인 느낌인데, 흡사 노란색과 붉은색의 경계가 파도 같다. 파도 위에서 쓸쓸히 연주하는 마일즈의 모습이 재킷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정제된 이성의 스산한 트럼펫 소리가 귓가에 들릴 듯하다.

말년에 그림을 그렸고, 전시회도 가졌던 마일즈에 대해서 피아니스트 듀크 앨링턴은 '재즈계의 피카소'(마일즈 데이비스 평전, 거친 영혼의 속삭임, 808쪽)라고 했지만, 나는 마일즈의 < Sketches of Spain >을 들으면 살바도르의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 떠오른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연인 갈라에게 끝없이 집착하면서 현실을 뛰어넘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화폭에 수놓았다. 달리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성적인 암시를 그림으로 표현했고, 앙드레 브르통의 영향 아래에서 '자동기술법' 같은 그림으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었다.

마일즈와 달리의 공통점은 명성에 집착해 끊임없이 변화된 모습을 연출하고, 즉흥적인 재즈와 미술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일즈는 현실에 집착하면서도 끝없이 음악의 변화와 혁신으로 새로운 이상을 창조한 반면, 달리는 갈라에 대한 집착의 끈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일즈의 이성은 냉철하고, 달리는 끝없이 분열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와 달리의 나라, 플라멩고와 세고비아의 기타 소리가 투우처럼 정열적이면서도 아련하게 떠오르는 나라 스페인. 거기에는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과 로르카의 혁명적인 시가 함께 하고 있다.

마일즈의 < Sketches of Spain >은 스페인을 스케치하고 있는데, 스페인의 대표적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을 재즈로 편곡해서 연주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아랑후에스 협주곡'은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다. 마일즈는 이곡을 특유의 냉철한 트럼펫 톤으로 스페인의 정열을, 스페인의 애수를 연주하고 있다.

스페인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마일즈는 독재자 프랑코에 저항했던 시인 로르카에게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마일즈 자신은 음악적 혁명은 거듭 했어도 정치적 혁명을 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검은 피부색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예민한 자의식을 가진 마일즈를 끝없이 괴롭혔다. 이것 때문에 로르카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음악적 혁신에 비해 현실적으론 늘 부와 명예를 가지려 했던 마일즈가 로르카를 좋아했다는 것은 의문이다.

아무도 너의 뱃속에서 나오는
불길한 목련의 향기를 알지 못했다.
아무도 네가 달콤한 말로써
사랑의 작은 새를 괴롭혔는지 알지 못했다.

하얀 눈도 부러워할 너의 허리를 껴안고
내가 나흘 동안 밤을 지새는 동안
수많은 페르시아 말들이 너의 얼굴을 비추는 달빛을 받으며
광장에서 잠들곤 했다.

석고와 자스민 사이에서 너의 시선은
창백한 씨앗을 담고 있었다.
나를 찾았다 너에게 주기 위해
내 마음 속으로부터 <영원히>라고 새겨진 상아빛 글씨를.

영원한, 영원한 내 고뇌의 정원이여
영원히 붙잡기 어려운 너의 육체여
너의 혈관의 피가 내 입에 스며들고
나의 죽음 앞에 너의 입은 이미 빛을 잃었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즉흥적인 사랑의 노래> 전문


▲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1931)
ⓒ 뉴욕 현대미술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로르카의 <즉흥적인 사랑의 노래>가 그려지는 마일즈의 < Sketches of Spain >은 마일즈의 다른 앨범 < Birth of The Cool >처럼 'Cool'하다. 쿨은 우울함을 나타낸다고 보이는데, 특히 <솔레아(Solea)>는 제목처럼 외로운 서정을 담고 있다. 이곡은 마일즈의 또다른 앨범 < Miles Ahead >에 수록된 < Blues for Pablo >처럼 스산하고 씁슬하다. 제목에서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생각나는 < Blues for Pablo>는 마일즈의 평생 음악 동료인 피아니스트 길 에반스(Gil Evans)가 작곡했다.

과거의 기억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는 사람은 현명하다. 기억이란 추억의 다른 이름이고, 추억이란 대부분 가슴 아프게 현실을 관통하는 법이다. 현재는 어쩌면 즉흥적이고 낭만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독(毒)일 수 있다. 재즈에서 즉흥은 과거의 '기억을 지속' 하지 않고, 현재의 '구토'를 바라보는 끔찍한 일이지만, 과거를 게워냄으로써 마일즈는 음악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즉흥만으로 위해 살기에는 너무 다변적인 쌍둥이자리를 가졌다. 변화무쌍한 개성을 가진 마일즈는 현실이 어쩌면 샤르트르가 말한 <구토>인지도 모른다. 재즈와 권투를 좋아한 샤르트르처럼 복싱과 무용을 좋아한 마일즈는 인생을 재즈로 살풀이 했는지 모른다. 마일즈는 삶을 냉소했다. 특유의 거칠면서도 쉰 목소리, 스산한 트럼펫톤, 그러나 그의 밴드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여느 재즈 아티스트처럼 마약과 병마에 시달렸던 마일즈 데이비스, 그는 "음악은 마약 같은 것. 지겨워질 때까지 계속하지"(마일즈 데이비스 평전, 거친 영혼의 속삭임, 608쪽)라고 했다. 순간의 삶을 즉흥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재즈 아티스트 마일즈 데이비스. 그에게선 <구토>의 주인공 앙투앙 로깡탱의 일기가 떠오른다.

"갑자기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 즉 한순간이 다른 순간에 인도되며,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에 그런 식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느낀다. 그리고 매 순간이 사라지고, 그것을 붙잡아두는 게 어리석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재즈, 그림과 문학이 있는 산책(가제)> 가운데 일부 원고 입니다.
-필자는 재즈와 그림과 문학을 매치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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