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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정진영 분)
ⓒ 이글픽쳐스 제공
영화 <왕의 남자>가 대단한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세웠던 1174만 명 관객동원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을 향하여 쾌속 항진하고 있다. 그 마침표가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통계청은 현재 우리나라 인구를 4800만 명으로 추계하고 있다. 18세 이상 관람등급인 이 영화의 가시인구를 3000만 명으로 보았을 때, 세 사람 중 한 명 이상이 보았다는 얘기인데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여기에 이 영화의 숨은그림찾기가 숨어 있다.

연산군을 보는 시각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영화감독

이 영화를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고, 두 번 보면 세 번 보고 싶고 이런 식으로 열 번, 그리고 백 번 이상 보았다는 '왕남폐인'까지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감독 이준익의 묘수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연산군은 폭군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 연산은 폭군이 아니라 왕의 자리에서 힘들어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이 바로 감독 이준익이 연산군-폭군이라는 등식에 물려 있던 관객들에게 던져준 신선한 충격이다.

이와 같이 왕 연산군은 작품을 만드는 작자나 감독에 의하여 그 위상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작가와 감독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등장하는 인물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이와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기록하는 자는 사실에 충실하고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며 객관성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 연산군일기 총서 전문.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라고 연산의 실정을 서술형식으로 기록하여 패악을 부각하고 있다
ⓒ 이정근
우리가 조선역사를 얘기할 때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조선실록 <연산군일기>에서 그렇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산군 재위 12년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연산군일기> 총서를 자세히 분석하면 166자 중 54%에 해당하는 90자로 연산군의 실정과 패악을 열거하고 나열하고 있다. 없었던 일을 기록했다는 뜻이 아니라 부각했다는 얘기다.

역사의 진실과 사실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다

<육군소장 전두환 장군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79년 12월 12일 군사를 일으켜 육군을 장악하였고, 불순분자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점령하고 있는 광주를 탈환하기 위하여 80년 5월 중무장한 군대를 투입하여 극렬하게 저항하는 폭도들을 사살하고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역사책이 존재한다면 눈 뒤집힐 일이다. 충격받아 까무러칠 일이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될 일이다. 뻔한 일을 알면서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답답해서 못살 일이다. 더구나 왜곡되고 과장된 역사적 사실을 검증할 방법이 원천 봉쇄되고 수정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하마터면 이러한 역사책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몽매한 백성이 될 뻔했다.

이러한 역사를 당대엔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하고 후대에 고스란히 물려준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조상이 될까?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조선실록 편찬 수순이라면 전두환 시대 실록은 노태우 시대에 편찬해야 했다. 실록 편찬에 참여한 학자들은 노태우가 전두환을 보는 시각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실록에도 수정은 있었다. 현종과 경종 그리고 숙종 수정본이다. 하지만 큰 줄기는 손대지 못하고 자구수정이나 지엽적인 문제만 수정했다.

▲ 도봉산 자락에 잠들어 있는 연산군.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이정근
1506년 9월. 즉위 12년 만에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난 연산은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두어 달 만에 죽었다. 여기서 잠깐, 역사책에는 두어 달이라는 애매모호한 낱말이 쓰이지 않는 법인데 <연산군일기>에는 분명하게 두어 달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만큼 그의 사망 날짜마저 불분명하고 기록은 병사라 되어있지만 자연사인지 독살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31살 젊은 장정이 위리안치 된 2개월여 만에 시체로 변했다.

이러한 그를 실록을 편찬할 때 곱게 보아줄 리 없다.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객관성이 없는 실록은 실록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하지만 그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학자들은 반정군 아류의 시각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시대적 환경이 그랬다. 노태우 정권하에서 전두환 역사 기록을 시작하고 끝맺어야 하는 학자들이라면 그 분위기 또한 그러하리라.

진정 역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관(史官)이라면 연산군 시대에 일어났던 일을 낱낱이 기록해두는 것으로 소임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관의 주관적인 생각이 녹아있다. 때문에 <연산군일기>는 과장되고 왜곡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 창덕궁 돈화문. 연산 1년 4월 2일. 성종의 국장이 있던 날. 열아홉 어린 임금 연산은 아버지를 지송(祗送)하며 기둥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성종의 대여(大輿-왕의 상여)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도가 야속하여 더욱 슬펐으리라.
ⓒ 이정근
성종의 원자로 태어난 연산은 성종이 승하하자 약관 19세에 즉위했다. 조선 10대 왕이다. 태조 이성계 이래 드물게 나타나는 적장자다. 경하해야 할 역사적인 즉위다. 하지만 궐내에는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인수대비가 대비 전을 지키고 있고 조정에는 신진사류와 훈구대신들이 버티고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즉위년 자체가 선대왕 상중(喪中)이라 선정을 베풀며 조용히 지냈다.

연산1년 11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서워할 것은 백성이 아닌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형벌을 삼가는 전지를 내렸으나, 또 민원이 있을까 염려되니, 이 뜻으로 팔도에 효유하라"하였다.

또, 연산 2년 3월에는 "내가 박덕한 몸으로 대업을 이어받았으니, 마음이 항상 송구하여 마치 범의 꼬리를 밟는 듯하고, 봄 얼음을 건너는 듯하다. 또한, 재변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다 형정(刑政)의 실수로 원망과 격분을 사게 된 소치이므로, 밤이나 낮이나 염려에 쌓여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무릇 중외(中外) 백사(百司)는 형옥(刑獄)을 살펴서, 원통함과 억울함이 없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방끈 짧고 나이 어린 임금을 흔들어서 길들여라

이렇게 조용히 가고 있는 연산을 흔드는 무리가 있었다. 나이 어린 임금을 길들이기 위한 신진사류였다. 성종 조 이래 급격히 성장한 사림(士林)은 훈구대신들과의 세력균형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와 여론의 진원지 성균관 유생들을 장악한 이들의 파워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임기가 확정된 민선 대통령 시대에도 '나이 어린 고졸 출신을 어떻게 굴리자'라고 소동이 빚어지는데 그때라고 그런 일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연산은 더 외로웠다. 그러잖아도 놀기 좋아하는 연산이 동궁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여 신하들보다 학문이 깊을 리 없을 터이고 '노통'은 '노빠'라도 있었는데 연산은 '빠 부대'도 없었다. 생모마저 일찍이 죄인의 몸으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 외척도 없었다. 오로지 혈혈단신이었다.

▲ 창덕궁 정청
ⓒ 이정근
간원(諫員)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폐비윤씨의 사당을 짓고 신주를 모시는 것은 불가하다는 간언(諫言)이었다.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해버렸다. 복직을 명(命)하자 복직했다 다시 사직해버렸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현대에도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 절대 왕정 하에서 벌어졌다. 한마디로 임금을 임금답게 공대하지 않고 불경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연산 2년 7월 대사헌 이육(李陸)의 상소에 대하여 임금 연산의 전교를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반드시 경에게 이기려고 하다면 진실로 그르지마는 경들 또한 반드시 나에게 이기려고만 하는 것도 그른 것이다." 간원들의 성화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임금이 이렇게 술회했을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즉위연도에 행해진 아버지 성종의 수륙재를 불교와 가까이 한다고 트집을 잡았고,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공급하지 말라고 공격했으며, 선릉 주변에 견성사를 짓는 것에 딴지를 걸었다. 이 모든 것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부딪치며 뿜어내는 불꽃이었다. 그 불꽃은 궐내에서 벌어질 굿판을 위하여 타오르고 있었다.

연산은 왕권주의자였나? 폭군이었나?

왕권주의를 추구하는 연산의 생각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내용이 실록에 있다. "내가 즉위한 지 겨우 1년인데, 매양 언로가 막힌다고 말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간(臺諫) 역시 신자(臣子)인데, 꼭 임금으로 하여금 그 말을 다 듣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각(臺閣)에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울 장본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지는 데 있다고 여긴다"(연산군일기 2년 5월 6일)

이러한 연산군을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폭군으로 규정하고 편찬한 조선실록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소설과 연극, 영화 그리고 드라마를 접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식해야 옳을까? 깨어야 옳을까? 그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다음 편 <어우동과 연산군> 그리고 <갑자사화>를 다 함께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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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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