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말도 많고 탓도 많은 영화 <청연>을 봤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난 근사한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단지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조종사라는 이유만으로도 가슴 설레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녀가 타는 비행기는 금속질감의 파이버를 뒤집어 쓴 채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지나치는 제트기 따위가 아니라, 스카프를 바람에 날리며 유유히 창공을 나는 이름조차 고풍스런 복엽기란다. 이 얼마나 황홀하고도 섹시한가.

연출을 맡은 윤종찬이라는 이름 또한 영화의 기대치를 한껏 높이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장편 데뷔작 <소름>을 만들기 이전부터 일련의 단편영화를 통해 결코 만만치 않은 연출력의 소유자임을 입증한 바 있고, <소름>을 통해 마땅히 주목해야 할 감독 자리에 올랐다.

영화도 안보고 굳이 이래야 되나?

이 정도면 무조건 기대해도 좋을 법했다. 그런데 영화 개봉을 앞두고 우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영화 시사회도 마치기 전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오마이뉴스> 12월 19일, 정혜주 기자)라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을 단 기사가 튀어나오더니 곧 친일논란과 함께 불매운동 소식이 이어졌다. "영화도 안보고 굳이 이래야 되나" 하는 생각과 "얘들은 왜 꼭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까" 하는 생각에 긴 한숨만 새어 나왔다.

하지만 한숨을 다 내뱉기도 전에 반격이 시작됐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본 기자와 평론가들의 거의 일방적인 지지 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자와 평론가들이 <청연>이 이룩한 영화적 성과(?)에 찬사를 보냈고, 빼어난 연출력을 칭송하는 분위기였다. 감독은 이 영화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어 보이는 꿈을 이루려는 가난한 식민지 여성을 그린 영화"라고 하고, 대다수 평론가와 기자들은 "민족주의의 굴레를 벗어 던진 용기 있는 영화"라고 화답했다.

지금까지의 논란을 보다 생산적인 논쟁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감독이 선택한 '소재가 무엇이냐'에 있기보단 선택된 소재를 감독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곧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감독이 그 시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박경원은 '가난하다'고 설정됐으나 전혀 가난해보이지 않는다.
ⓒ 코리아픽처스

영화는 어린 시절의 박경원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박경원의 나이를 미루어볼 때 1910년 한일합방 쯤으로 짐작되는 시기, 행진하는 일본군을 수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식민지 어른들 사이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박경원의 얼굴이 보이고 그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어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다고 슬퍼했지만 아이들은 모두(박경원만이 아니라 '아이들 모두'!) 닌자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는 설명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는 닌자들이 보여지고, 이어서 닌자를 통해 하늘을 나는 꿈을 갖게 되었다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것 참!

어쨌거나, 짧은 어린시절이 지나자 영화는 자전거를 타고 경쾌하게 거리를 내달리는 성장한 박경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영화 중반 비행경주 대회가 끝나도록 영화는 한편의 동화처럼 전개된다. 박경원은 '가난하다'고 설정됐으나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고달프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녀는 결코 좌절해본 적 없는 표정으로 도시락을 먹고, 기름은 묻혔으되 씩씩하기만 한 얼굴로 자동차 정비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눈보라를 맞으며 인파 속을 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복엽기를 타고 하늘을 날 듯 경쾌하며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그녀의 고생은 그저 몇 마디 대사로 전달된다. 줄기차게 내리는 눈 속에서도 그녀는 고달파 보이지 않는다. 눈마저도 동화적 서정성을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가난'도 '차별'도 없는 동화속 나라

<청연>에 의당 있어야 할 것임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난'만은 아니다. 이 영화엔 '민족적 차별'도 '성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시대성은 거세된다. 영화 속 박경원에게, 아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에게서 민족적 차별이나 성적 차별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 택시회사 관리자, 비행학교 교장조차도 그녀를 여성이라 혹은 조선인이라 차별하는 법이 없다. 그녀는 심지어 술 취한 군인들을 상대로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거 첨 봐!"라고 당당하게 쏘아붙인다. 그녀는 모던하고, 경쾌할 뿐 구김이라고는 전혀 없는 '쿨'한 인물이며,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만화 같은 시대 속 동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체 <청연>이 "민족주의적 결벽성에서 자유롭다"는 평론가들의 주장은 무슨 뜻인가? 진군하는 일본군을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닌자를 동경하게 됐다는 생뚱맞은 설정, 거세된 시대성, 어이없는 동포애의 발현 – 이것이 "'항일 아니면 친일'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민족주의적 결벽성"에서 자유롭다는 근거인가? '자유롭다'는 표현은 해당 작품이 그 시대상을 보여주면서도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흐르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가난과 민족적 차별 그리고 성적 차별을 영화 속에서 아예 지워버린 것을 두고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실 논쟁할 필요성조차 없다. '자유롭다'는 표현이 그렇게까지 자유롭게 쓰여질 수 있다면, 이제 세상 모든 영화는 스스로를 합리화할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된다. 연출이 엉성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가 한심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뿐이다.

감독이 그 시대 혹은 박경원이란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의도를 살펴 볼 수 있는 인터뷰 한 토막을 소개한다. "박경원이 일본에 가서, 일본사람들의 도움으로 비행학교를 다니고, 시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꿈만을 이루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시대를 짓누르던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다. 박경원이 참가했던 비행대회 같은 것, 그 장면을 대규모의 몹씬으로 처리했던 것은 그 광기, 그 집단주의, 군국주의로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던 당시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너희가 진짜 민족주의를 알아?, <프레시안> 12월 30일, 오동진 기자)

 비행학교의 분위기도 대단히 목가적이다
ⓒ 코리아픽처스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먼저 비행대회 전 비행학교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한가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비행장, 코믹멜로에나 나올 법한 강세기와 이정희의 캐릭터, 젠틀하기만 한 일본인 교관… 대체 어디서 군국주의의 냄새를 맡아야 한단 말인가. 비록 후방의 기상장교이기는 하나 어쨌든 군인 신분인 한지혁의 어정쩡하고 장난스러운 경례 자세를 보면서 오히려 비행학교의 분위기가 대단히 목가적이라고 느꼈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인가?

감독이 '군국주의의 광기'를 보여주기 위해 그토록 고민했다는 비행대회 장면을 하나하나 뜯어보자. 참고로 이 장면은 너무나 많은 평론가와 기자들로부터 영화의 백미로 손꼽혔다. 누구는 놀라운 감동을 선사했다고도 하고,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도 하는 명장면이니 좀더 꼼꼼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①비행대회에서 졸지에 탈락하게 된 경원에게 기베는 느닷없이 둘만의 경주를 제안한다(만화적이다) ②그리하여 둘만의 비공식적인 경주가 벌어지고(낭만적이지 않은가) ③둘만의 경주 중 기베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순간 경원은 민족과 경쟁의식마저 초월한 인류애를 발휘하여 기베의 생명을 구한다. ④대회 직전 시행된 연습비행 중, 갑작스런 기체 고장으로 동료 강세기가 추락사한다. ⑤죽은 강세기를 대신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박경원의 대리출전이 결정된다. ⑥누구도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본인 교관이 비행경주 중 결정적 실수를 하고 만다. 이제 우승을 향한 그들 모두의 기대는 무산될 위기이다. 그녀가 처음 시도하는 고도 상승 부문임에도 박경원의 우승이 아니고선 단체 우승을 기대할 수 없다. 그녀가 히어로가 될 만반의 준비는 갖춰진 것이다. ⑦하지만 한시라도 관객이 박경원의 우승을 당연시 해선 곤란하다. 또 다른 위기가 필요하다. 당당히 초반 선두를 달리던 박경원은 실력도,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갑작스런 기상이변(난기류)으로 선두를 빼앗긴다. ⑧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그녀는 놀라운 정신력과 천재적인 재능으로 구름 위로 누구보다 높게 치솟아 오른다. 그 무엇도 그녀의 불요불굴의 의지를 막을 순 없다. ⑨가장 높이 솟아오른 그녀, 하지만 그녀는 정해진 시간 내에 결승선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7초, 6초, 5초, 4초… 마침내 그녀는 단 2초를 남기고 골인한다.

그녀가 해냈다. 모두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녀에게 환호하고, 기적 같은 역전을 이뤄낸 그녀의 강인한 의지를 칭송해마지 않는다. 그토록 위대한 그녀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비행대회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오직 박경원이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3위를 했다'는 것뿐이란다. 이 대단한 영웅 드라마가 허구라니 그저 허탈해질 수밖에….

그런데 대체 감독이 말하는 '군국주의의 광기'는 어디 있는 걸까? 오히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군국주의의 광기'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한 인물이 허구적 구성을 통해 어떻게 영웅화 되어가는지를 보지 않았는가. 이 극적 구성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뜨거운 동료애, 전체를 위해 목숨마저 던지는 헌신성, 천부적인 비행술, 영웅적 의지뿐이다. 아무래도 영화가 박경원이라는 인물을 미화했다는 지적이 타당해 보이는 대목이다.

 감독이 말한 '군국주의의 광기'는 어디 있는가
ⓒ 코리아픽처스

이제 '군국주의의 광기'라고 감독이 적시한 몹씬을 살펴보자. 창공에서 박경원의 비행술이 펼쳐지는 동안 지상의 분위기는 감독이 얘기하는 군국주의와는 너무도 먼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딴은 만담가 같은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점차 흥분된 어조로 박경원의 천재적인 비행술을 중계한다. 그런데 이것이 동네운동회라면 모를까 군국주의와는 너무도 먼 흥겹고도 흥미진진해 하는 분위기다.

혹시 박경원의 기적적인 우승에 감격하여 환호하는 대중을 가리켜 군국주의라고 하는 건가? 아님 모여든 대중들이 일제에 의해 관제동원 되었노라고… 그래서 군국주의 냄새가 풀풀 나지 않냐고 강변하려는 것인가? 차라리 애당초 군국주의로 치닫는 모습을 담으려 했으나 몹씬을 찍다보니 이리저리 치이느라 겨를이 없었다고 얘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청연>이 박경원을 어떻게 미화했는가의 문제는 비단 비행경주 장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캐릭터와 드라마 구성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미화한다.

'비극적 자살'로 대체된 그녀의 '허무한 죽음'

당연하게도 감독은 시나리오를 구성하며 허구와 사실을 각각 선택적으로 취합한다. 문제는 감독이 버린 것과 취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허구적 요소는 크게는 한지혁과 비행경주대회와 조선적색단으로 정리될 수 있다.

'황군 위문'이라는 일제의 이해와 타협하면서까지 오직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그녀의 비행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마지막 비행이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서 '일제와의 타협'이라는 친일의 색깔을 벗겨내고 그 자리에 '일제에 의한 검거와 고문 그리고 연인의 죽음'을 그려 넣는다. 후자를 통해 전자는 희석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허무한 죽음'은 '비극적인 자살'로 대체되고 만다.

먼저 이 영화가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친일적 요소를 어떻게 희석시켰는지 살펴보자. 박경원을 둘러싼 친일논란은 크게 염문설과 마지막 비행을 둘러싼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쾌했던 점은 고이즈미 할아버지와의 염문설을 다루는 방식이다. 고이즈미상이든 나까무라상이든 박경원의 염문설 자체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감독의 말대로 염문설은 사실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염문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다뤄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염문설의 당사자인 박경원에겐 정작 허구의 인물인 한지혁이 등장하는 반면 오히려 그녀의 라이벌이자 후원인이었던 일본인 여류비행사 기베가 외무대신의 '세컨드'(?)로 설정된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외무대신은 당시 체신부 대신이던 고이즈미 할아버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정작 염문설의 당사자인 박경원에게서 부정적인 부분을 떼어다 엄한 이에게 덧씌운 꼴이다. 이건 미화 치고도 좀 치사한 미화다. 박경원이 비행의 꿈을 이루려면 후원자가 필요하고, 기베를 후원자로 설정하기엔 재력도 권력도 없어 보이고, 따라서 박경원의 염문설 상대를 기베의 연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기베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박경원이 '고국으로의 비행의 꿈'을 처음 꺼내는 것은 비행대회의 극적 우승 직후 열린 파티석상에서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는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 했느냐는 점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조선갑부의 딸도 아니고 고국까지의 비행에 드는 그 엄청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구상을 가졌던 것일까? 영화는 파티에서의 발언 후에 그녀가 재일동포들을 통해 후원금을 마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이런 노력이 동포들에게 외면 받는 모습(조국은 그녀에게 해준 게 없다)과 그로 인해 절망하는 박경원의 모습이 보여진다.

 박경원의 '허무한 죽음'은 '비극적 자살'로 대체되었다.
ⓒ 코리아픽처스

그런데 이 후원이벤트가 실재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후원이벤트라는 설정은 의문투성이다. 당시 오사카 등지에 거주했던 조선인의 생활수준은 곱창전골의 유래(먹을 것이 없어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는 곱창을 가져다 끓여먹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에서 볼 수 있듯 절대빈곤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늘을 나는 꿈은 고사하고 꿈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하루하루의 생계를 꾸려가기도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후원금을 모으겠다는 발상이 가당키나 한가? 감독이 만들어낸 허구라도 그렇고 실재했던 사실이라도 어처구니 없기는 매한가지다.

어쨌거나 동포로부터도 외면(?) 받은 박경원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본뿐이다(후원회 에피소드는 정작 이 때문에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그녀는 일제국주의와의 타협이라는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때쯤 조선적색단 사건이 끼어든다. 감독은 역사 속에 실존했으나 박경원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조선적색단을 아무 거리낌 없이 끌어다 쓴다. 아무튼 후원회 모집 결과를 보며 절망하던 박경원에게 갑작스레 조선적색단 사건이 덮쳐온다. 조선적색단에 의한 느닷없는 친일파 제거는 한지혁과 박경원의 검거와 고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한지혁과 박경원에게 가해지는 일제의 고문장면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길며, 세세하게 구체적이다. 느닷없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왜 그녀로 하여금 독립투사의 누명을 덮어쓰게 만든 것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검거와 고문 그리고 연인의 죽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그녀의 삶에 비극성을 부여 받았다는 점이다. 이제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친일적 색깔은 퇴색되고, 그 자리엔 그녀의 비극성만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순수한 꿈을 가졌으되, 일제에 의해 애인마저 잃게 된 불행한 여인이다. 그녀의 죽음은 이제 허무하기보다는 비극적이다. 마지막 비행을 위해 복엽기에 오르는 그녀의 두 팔에 들려있는 연인 한지혁의 유골은 그녀의 슬픔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소품으로 기능한다.

왜 박경원이었을까...

물론 역사적 실존인물 혹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한 재해석의 여지 혹은 허구적 요소를 이용한 극적 재구성의 가능성은 반드시 열려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이 <청연>을 합리화하는 수단일 순 없다. 그것은 오히려 사실왜곡이며 미화일 뿐이다. 앞서 지적한 수많은 왜곡과 미화가 극적 구성을 위해 허용 가능하다면, 굳이 영화의 주인공이 박경원일 필요는 없었다. 일제치하일 필요도 없다. 김아무개면 어떻고, 해방직후면 어떠랴.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 <청연>을 둘러싼 논쟁의 합리적 핵심은 '박경원이 친일행위를 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친일영화인가 아닌가라는 논란은 소모적이다. 이 영화 한편이 일본을 이롭게 했다는 주장 역시 소아적이다. 중요한 것은 윤종찬이라는 감독이, 영화 <청연>이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문제이며, 나는 그것이 명백히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논쟁을 가로막는 것은 민족주의에 목숨 건 네티즌만이 아니다. <청연> 사수에 목숨을 건 평론가들 역시 지독히 감성적이고 일방적이다. 여기저기서 평론가들의 흥분과 분노를 쉽게 접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100억이나 들인 영화에 대해 불매운동을 해서 어쩌라는 것이냐"고 안티세력을 나무라기도 한다. 이 같은 일방적 지지와 과도한 흥분은 '동업자의식'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더욱이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왜곡된 민족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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