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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는 아버지가 보고파서 이 언덕길을 숨차게 황급히 오르내렸을 것이다.
ⓒ 한성희
정조가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천장한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며 세종의 영릉 다음 명당으로 손꼽힌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날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첫 교지로 천명했으니 오랜 세월을 가슴에 묻어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이제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1752~1800)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서인들을 성급하게 죄를 주는 치졸한 복수는 하지 않는다. 갓 즉위한 왕에게 노론의 세력을 누를 힘이 없었고 현명한 정조는 서서히 자신의 사람을 기르기 시작했다. 홍국영을 이용해 세도정치를 묵인하며 노론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린 후 규장각에서 인재 양성과 정치적 구도를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 넓은 사초지가 푸근하게 펼쳐져 있는 융릉의 능상. 용이 누워서 놀고 있다는 천하명당이다.
ⓒ 한성희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난 1789년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가 올라오자 천장을 하기로 즉각 결정한다. 왕심을 알고 있던 박명원이 "영우원(수은묘)이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 운운하며 상소라는 형식으로 천장의 구실을 만들어줬고, 정조는 내심 미리 정해놓은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옮기라 하며 사도세자의 천장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후손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재물을 뜻한다. 좌청룡이 빈약하다는 것은 왕실의 가장 중요한 왕자생산에 관계되는 것이니 이 보다 더 좋은 구실이 없었다.

천년에 한 번 만나는 명당

원래 이 화산의 융릉 자리는 효종이 죽자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산 윤선도가 현종의 명으로 수원으로 내려가 산세를 본 후, '세종의 영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보고했던 자리였다.

현종은 이곳으로 결정하고 토목공사를 시작했는데 돌연 우암 송시열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동구릉을 추천하자, 노론들은 일제히 동구릉을 명당이라고 맞장구치면서 고산 윤선도를 비난한다. 동구릉은 선조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부상한 후, 대신들의 세력에 밀려 왕실 공동묘지로 변한다.

어쨌든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자신이 추천했던 화산이 무산되고 효종의 복상에 서인과 남인이 맞붙은 예송논쟁에서 밀려나 유배를 간다. 우암이 주장한 곳으로 장사지낸 효종의 파묘자리는 정조에 의해 영조가 묻히게 되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 정자각 앞에 박석이 넓게 깔려 있어 조선 후기 박석의 진수를 볼 수 있다.
ⓒ 한성희
이미 정조는 아버지를 천하명당 자리로 이장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여러 자리를 보아둔 터였다. 효종의 영릉(寧陵) 의궤(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에 후세의 참고로 하기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나 경비 등을 자세하게 적은 책)를 다 훑어본 정조는 윤선도의 실력을 알고 있었고, 윤선도가 남긴 글에서 '화산이 반룡농주(盤龍弄珠·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 리에 다시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라고 했던 말까지 인용한다.

화산에 있는 명당자리는 수원부 객사의 뒷산이었고 영우원 천봉으로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로 200호 민가와 함께 옮겨진다. 화산(花山)이란 말 그대로 지형이 꽃봉오리가 둘러싼 형태다. 꽃심에 해당하는 곳이 융릉 능침이다. 꽃심은 혈이 하나밖에 없기에 융릉은 쌍릉이 아닌 합장릉이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해 순조5년(1815) 죽어 이 꽃심에 합장된다.

어지간한 풍수들은 엄두도 못 낼 박식한 실력을 자랑했던 정조는, 무덤이 자리할 혈(穴)과 좌향(坐向·무덤의 방향), 누워있는 용의 구슬이 안대할 자리까지 일일이 지시해서 그날로 천장 도감이 설치됐다.

▲ 정자각에 제례 때 차임막을 걸거나 등을 달던 못과 고리 등이 남아있다.
ⓒ 한성희
정조가 사도세자의 천장을 위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는 증거는 많다. 그날 영우원 천장 비용을 전교하면서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관리들에게 밥을 싸 가지고 다니라고 했으며 노론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문(營門)에 돈 1만 냥을 내서 경기감영에 쓸 비용으로 주라 한다.

노론의 힘을 저절로 약화시키면서 비용을 충당하려는 정조의 계획된 정책이었다. 이틀 후인 7월 13일 수원부 민가 200호를 옮길 때 드는 비용이 거론되자, 균역청의 돈 10만 냥을 수원에 떼어주어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고, 서울과 지방의 도감은 10만 냥을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가져다 쓰라고 명한다.

영우원 천장에 들어간 비용이 약 18만 냥(약 200억 원)이었으니 정조의 이 계책은 저절로 벽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아버지를 죽게 한 노론에게 복수하는, 이른바 손도 안대고 코 풀어버리는 격이었다.

융릉 천장을 시작으로 정조는 화성축조가 끝나자 훈척세력과 정치,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군정을 문란케 하던 기존의 오군영을 과감히 개편해버리고 왕권을 강화했다.

털끝만큼도 백성의 폐를 끼치지 말라

개혁군주답게 정조는 과거 국장과 천장 공사에 백성을 공짜로 부역시키던 전례를 깨버린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들의 급료, 양식은 물론, 의복까지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했다.

융릉에 쓸 석재는 운반하는 일에 백성이 고생할 것을 염려해 가까운 꾀꼬리봉 및 산성 밖에 떠서 쓰게 했다. 남양·강화 등지의 석재가 질이 좋다는 것은 정조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뜻은 오직 아버지를 자주 찾아보는 데 있다고 밝힌다.

정조 자신이 여러 차례 밝힌 대로 본 원의 일로 털끝만한 폐도 백성들에게 차마 끼칠 수 없다 했고 사대부 집에서 자원이라는 구실로 참여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사대부 집에서 보낼 사람은 어차피 백성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백성들을 쓰지 말게 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엄명했다.

▲ 융릉과 건릉은 수복방은 없으나 제례를 지내는 제물을 준비했던 수라간은 남아있다.
ⓒ 한성희
천장공사가 진행되던 그해 여름과 가을까지 정조는 자주 영우원으로 행차했는데, 정조의 오랜 한이 풀어지는 순간이라 아버지의 억울함이 벅차게 치밀었던가. 행차할 때마다 왕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고 대성통곡을 하게 했으며 통곡을 하다가 격함에 못 이겨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역질까지 했다.

현융원(顯隆園·천장하고 영우원은 현융원으로 바뀐다)이 완공되자 정조는 "원을 옮기는 데 오랫동안 경영하고 조처한 것은,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다. 군대와 의장은 군사들을 썼고 대여를 메는 백성과 잔디를 뜨는 사람, 각종 운반을 하는 백성까지 식량과 비용을 후하게 지급했고, 의복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일을 금하고 호조와 내탕금으로 만들어 지급했다.

발인하는 날 떡과 고기를 마련해 10리마다 상여군에게 먹이고 신방제중단(新方濟衆丹)이라는 피로회복약을 만들어 사람들마다 몇 알씩 먹게 하는 배려까지 했으니 "원(園)을 연 때로부터 원에 안치할 때까지 역사를 감독한 신하들과 호위한 장사들 및 여부(轝夫)·장수(匠手)·역부(役夫)들이 죄다 몸 성히 돌아와, 마치 도와준 사람이 있는 듯하였으니, 참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이다"라는 정조의 말은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 목이 시원하게 뻗은 문인석과 무인석.
ⓒ 한성희
정조가 지극 정성을 들여 아버지를 천장한 융릉은 넓게 퍼져나간 잔디가 포근한 명당자리다. 융릉의 문인석은 기존 왕릉의 문인석을 벗어나 목이 시원하게 뻗은 점이 특징이다.

누가 뭐래도 조선왕릉 중 석물의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걸작품은 영조가 천장한 인조의 장릉이다. 융릉의 난간석과 병풍석은 정조가 “난간석이나 병풍석 등에 대하여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지 최고의 제도를 쓰려다 보니 준수하지 못하였다"고 실토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에게는 조성할 수 없는 것이다.

▲ 인조의 장릉과 똑같은 융릉 병풍석과 상석(박석).
ⓒ 한성희
융릉은 장릉의 석물을 답습했지만 장릉보다는 작품성이 다소 떨어진다. 문화의 절정기에 조성된 장릉의 석물은 이후 홍유릉과 수릉에도 적용된다. 정조의 양부였던 효장세자의 영릉에도 정자각 앞에 넓게 펼쳐진 박석은 후기 조선왕릉의 특징이며 융건릉도 박석이 넓게 깔려 있다. 융릉의 인석은 아름다운 연꽃봉오리로 능상을 둘러싸고 있다.

▲ 조선왕릉 중 유일한 연꽃봉오리 인석이 아름답다.
ⓒ 한성희
융릉은 다른 왕릉의 사각 연못과는 달리 원형이다. 이 또한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특별하게 시원한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용이 누워서 여의주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반룡농주형의 풍수라 여의주의 둥근 모습을 따서 만든 게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정답이라기엔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다.

28세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천년에 한번 나오기 힘들다는 명당으로 이장하며 25년간 참고 참았던 통한을 대성통곡으로 터트렸던 정조의 효심은 융릉과 화성에 집약된다.

이 명당자리는 과연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사도세자는 광무3년(1889) 11월 장종으로 추존돼 왕이 됐고 그해 12월 다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며 현융원은 융릉으로 격상한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후 사도세자의 핏줄로 후기 조선왕조가 마무리됐다.

▲ 둥근 방지원도.
ⓒ 한성희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의 손자가 철종이고 은신군의 후손이 고종이니 사도세자의 아들 세 명의 후손이 왕위를 이은 셈이다. 은신군의 양자였던 남연군은 인평대군의 후손이긴 하지만 족보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였던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과 개혁군주 정조의 이상이 무너지는 원인이 됐던 노론의 나라, 후기 조선의 몰락은 냉정한 역사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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