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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릉
ⓒ 한성희
강추위가 이어지던 지난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이 곳 파주에서 약속장소인 압구정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날 뉴스에서 내일 날씨가 아주 추우니 단단히 각오하라고 경고한 대로 창 밖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인터넷에 들어가 오늘 날씨를 확인해본 순간 '으~' 하는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서울지역 현재 온도 영하 10도? 이런 날 왕릉답사를 가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궁궐 지킴이들과 유적지 답사 전문가들의 융건릉(경기 화성 소재) 답사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이미 한 것이고 전날 다시 확인할 때도 가겠노라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이런 살인적인 추위를 뚫고 왕릉 언덕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중무장을 단단히 해야겠다 싶었다. 장롱 속에 처박아뒀던, 2년 전 친구가 장난삼아 사준 '빨간 내복'이 생각났다. 추운데 빨간색이 문제냐, 더 이상 생각 않고 내복바지를 입었다. 털 달린 바지, 두꺼운 솜조끼 위에 점퍼까지 껴입고 보니 뒤뚱거리는 오리가 따로 없었다.

영하 10도 강추위가 무섭긴 무서웠다. 버스는 당초 예상 인원 40명에서 대폭 줄어든 12명의 참가자들을 싣고 융건릉(隆建陵)을 향해 출발했다.

▲ 동행했던 답사팀이 융릉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한성희
즉위한 왕의 첫 교지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 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25세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28세로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으로 일으킨 임인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

영조 25년(1749)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한다.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려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여기에 어머니 영빈 이씨와 한 배에 태어난 화평옹주, 화완옹주까지 합세했다.

▲ 정자각
ⓒ 한성희
사도세자를 둘러싼 처가와 외척들은 거의 전부가 정치적으로 그의 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비롯하여 영조의 장인 김한구,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씨, 화순옹주의 시아버지 김흥경, 화협옹주의 시아버지 신만, 화평옹주의 시아버지 박사정 등이 모두 노론이었다. 화완옹주를 비롯하여 화령옹주, 화길옹주도 모두 노론 집안으로 시집갔다.

이들 노론세력이 공모해서 세자의 비행을 자주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 꾸짖었고 마침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 등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5월 22일 실록의 일부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영조실록 5월22일)


▲ 정조는 이 금천교를 여러차례 건너 아버지를 보러왔다.
ⓒ 한성희
그 날부터 세자는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고 영조를 뵙기를 청하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이미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는데 20여 일이 지난 윤5월 13일 유언비어가 '안'에서 일어나 영조가 놀라고 세자를 자결하라 명한다.

'안'이라는 것은 궁궐 내란 의미고 유언비어는 바로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생모 영빈 이씨였다. 이 '유언비어' 사건이 없었더라면 사도세자는 폐세자 됐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융릉 장명등 구멍으로 내다본 풍경. 사도세자의 눈으로 본 당시 세상도 이렇게 좁고 답답했을까?
ⓒ 한성희
임금이 칼을 들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영조실록 권100 윤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했고 그날 일을 꺼려해서 감히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개입해서 이렇게 극적으로 진행되었다.

고독한 세자의 비참한 죽음

나경언이 비행 10종목을 적어 올린 날로부터 시작된 사도세자의 비극은 한 달 만인 윤5월 21일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해서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했다 하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융원>이라 쓰인 비석.
ⓒ 한성희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단지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는 전교를 내렸을 뿐이다. 이를 뒤주에 가둬 9일 간 내버려두다가 아들이 죽은 날 후회했다는 말로 누가 납득하겠는가? 단지 의례적인 말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본 아들을 죽인 영조는 후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뒤주에 갇히던 다음날 세자의 장인 좌의정 홍봉한은 "한림(翰林) 윤숙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죄를 주기"를 청했고 영의정 신만, 신회, 김성응 등도 모두 죄주기를 청해 영조의 화를 부추겼다.

이에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켰던 임덕제는 강진으로 유배됐다. 임덕제는 나가지 않고 버티다가 영조의 명으로 시인들에게 끌려 나가게 되자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이었다. 영조 50년 6월, 임덕제가 함평에서 현감으로 죽자 그를 슬퍼하며 좌승지로 증직시켰다.

그날 사관은 말한다. 임덕제는 강직하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던 해) 수립(樹立. 세손을 업고 나온 일)에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사도세자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고 노론이 조정을 채우고 있었으나 당시 언론인 사관의 붓은 날카로웠다.

▲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던 정조대에 만든 융릉은 예술성이 뛰어나다.
ⓒ 한성희
화안옹주와 화평옹주만의 어머니였던 영빈 이씨는 친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딸과 가세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동안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내와 어머니, 아버지 형제에게 모두 버림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목격했던 11세 어린 정조는 마음 깊이 한을 새기고 기억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의 총애를 입은 화안옹주는 양자 정후겸을 앞세워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손잡고 권력을 휘두르며 정조를 압박한다.

▲ 문인석의 눈과 입술 등에 사실감이 살아있으며 시원하게 뻗은 목과 봉황이 새겨진 금관이 인상적이다. 저 봉황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데 대한 정조의 한풀이일까?
ⓒ 한성희
뒤주에서 죽은 세자는 7월 23일 경기 양주 중량포 배봉산(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그날 묘에 가서 곡을 하고 수은묘(垂恩墓)라는 묘호를 내렸으나 죽은 아들은 되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지울 수 없었다. 수은묘는 정조가 등극한 후 현재 화성의 명당 융릉으로 천장해 현융원으로 바뀐다.

두 여자, 왕릉에서 달리다

왕릉 답사를 다닐 때는 혼자 아니면 보통 한두 명 정도 동행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단체로 갔다. 혼자 다니든 단체로 다니든 장단점이 있다. 이번에는 단점이 눈에 띄었다. 미처 단체 일정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융건릉에 오면 사도세자의 융릉을 주로 보고 정조의 건릉은 생략하기 일쑤라 한다.

왕릉 답사가 주목적이 아니라면 석물 등이 더 훌륭한 융릉만을 선택하고 그보다 떨어지는 정조의 건릉은 시간도 많이 걸리기에 생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왕릉답사가 목적이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 정조를 보지 못하다니? 갑자기 조급해져서 융릉 답사 중 빠져 나와 진정임씨와 건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정조의 건릉을 보려고 미친 듯이 달렸다.
ⓒ 한성희
25만 평 넓은 융건릉은 눈이 오면 융건백설이 화성8경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경치를 감상할 운은 없었다. 건릉으로 가는 길에는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다. 건릉까지는 꽤 멀고 게다가 평탄한 길도 아닌 언덕길이 펼쳐진다.

숨을 몰아쉬며 헐레벌떡 올라간 건릉을 답사하고 사진을 찍고 내려오자마자 일행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또 뛰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기에 망정이지 지엄한 왕릉에서 미친 듯 달리기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 숨을 헐떡이며 뛰었던 건릉 언덕길
ⓒ 한성희
허파가 끊어지고 숨이 목 끝에 차오를 때까지 언덕길을 내달렸다. 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한 후 이렇게 장거리를 죽어라 뛰어보긴 처음이었다. 등 뒤에서는 배낭이 덜컹거리며 등을 때리고 잔뜩 껴입은 옷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숨차게 뛰어 버스에 오르자 기다리던 사람들의 떨떠름한 표정이 들어왔다. 단체행동에서는 이탈해 늦는다는 일은 모든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니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연신하며 자리에 앉으니 땀이 솟는다. 강추위도 달리기는 이기지 못해 흐르는 땀을 씻으며 헐떡거리는 숨도 돌리지 못한 채 점퍼와 조끼를 차례차례 벗어 버렸다.

덧붙이는 글 | 사도세자의 융릉은 1,2편으로 기사를 내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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