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논란'이 있는 여류 비행사 박경원을 그린 영화 <청연>.
ⓒ 코리아픽처스

아버님이, 70년대 원양어업을 국가주도산업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었던 수산개발공사의 직원이셨기에 전 70년대를 대부분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보냈습니다. 70년대를 남의 나라에서 보냈던 그 꼬마가 조국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식당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포크나 나이프에 새겨진 'Made in Korea'가 모두였습니다.

동북아시아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던 그 동네 아이들에겐 거의 무시의 대상이었죠. 그랬던 그 꼬마가, 시집 장가 일찍 간 친구들이 그 나이의 아이들을 가지게 되니까 '한류'랍니다…. 세월 참 무섭다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Dynamic Korea'라고 밖엔 부를 말이 없구나 싶더군요.

섬 아닌 섬나라에 살고 있는 장삼이사가 그 한류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그 때의 그 꼬마가 겪었던 웃기는 상황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겠구나, 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전 작년 한 해의 거의 모두를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국제 관계에 대한 책을 준비하는데 보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들었기 때문이죠. 장삼이사에 불과한 제가 상당히 거창한 내용을 쓰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가졌던 심리적인 압박도 꽤 심했습니다만, 무엇보다 정말 많이 아프더군요.

축구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98년 월드컵에서 당시 히딩크가 이끌던 네덜란드에게 5:0으로 지던 경기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그걸 거의 1년 동안 반복해서 봤다고 생각하시면 그 아픔을 조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남이나 북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슬픔을 아무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에게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뭐 식민지로 현대사에 끌려 나온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그 아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도 없잖아 좀 있긴 합니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들이 그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가 보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떤 'Sympathy(동감)'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좀 들더라고요. 그 '한류'라는 것이 일종의 할리우드 대체재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혼자서 이런 개꿈을 꿔봤었습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현대 아산이 금강산 개발을 하고, 개성 공단을 만들었던 그 과정은 완전히 남북 합작 드라마였습니다. 온갖 갈등 요소들이 다 섞여 있을 수밖에 없죠. 시간이 돈이라는 생각이 아주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대기업 직원들과 체제에 대한 자부심밖엔 없는 북한 군인들이 처음 만나서 같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습니까?

전 그 이야기를 <영웅시대>처럼 '전하께서 승하하셨다' 분위기로 풀지 말고, 그 현장에 있었던 직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봤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쪽은 월남한 서북 청년단 출신의 할아버지를 두고 있는 우익 성향의 현대 아산 직원을 주인공으로, 북쪽은 민생단 사건으로 고아가 되었다가 혁명 유자녀 학원에서 크고 60년대의 북한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아버지를 둔 당성 좋은 군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거죠. 금강산을 배경으로 말입니다.

덧붙여 중국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고생 꽤나 한 부모를 두고 있는 연변 처녀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피 장처럼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제3국행을 택한 이들의 후손이 관찰자로 나서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싶었습니다.

북의 인민 배우들이 출연하고, 이쪽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한 50부작 정도의 기획 시리즈가 만들어져 우리를 울리고 웃긴다면 할리우드의 대체재를 찾는 수많은 나라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지 않겠느냐, 뭐 그런 개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을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중동의 사람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수많은 외교관들도 할 수 없었던 성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겠냐 싶었던 겁니다.

미국의 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고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죠. "교과서나 매체의 어느 선전보다 그러한 입체적이고 감성적인 선전물이 큰 효과를 지닌다"고. 지금의 이 복잡한 상황을 대중문화로 풀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물론 남북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선 조갑제 영감님 같은 분들은 혈압 올라서 넘어지는 에피소드들도 꽤 많이 들어가야 할 겁니다. 그리고 주변 열강들에 의해 흔들리는 상황을 오버하지 않고 깔끔하게 감정 처리를 해야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죠. 물론 그 드라마는 북한에서 방영되긴 힘들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상호주의를 부르짖는 모 정당에선 핏대 올리구요.

하지만 <웰컴 투 동막골>을 <웰컴 투 김일성 왕국>이라고 불렀던 조선일보의 그 난리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성공했고 '적기가'가 나온다고 우익 영감님들 혈압 올리던 <실미도>도 성공했잖습니까? 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사실 혼자서 꾸면 개꿈이나 망상이지만 여럿이 꾼다면 그건 희망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영화 <청연> 한 장면
ⓒ 코리아픽처스

전 그래서 <청연>을 보고 싶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꿈을 가졌다는 죄로 자신의 조국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느냐에 따라 제 꿈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공만큼이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자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반일'이니까요.

이인화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점이 좀 걸리긴 했지만, 제작 시스템이 정신만 제대로 차리고 있다면 쓸데없는 이데올로기들을 걷어내고 우리의 아픈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겁니다. 솔직히 저의 그 기대는 100%, 아니 200% 충족시켰습니다. 무엇 하나 흠 잡을 수 없이 깔끔하게 나왔으니까요.

또한 제가 대학 다녔던 80년대 말에 학교가 털려도 쇠파이프 들고 나오던 이들이 열에 하나 될까 말까 했던 경험 때문에 주인공의 엷은 항일 의식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립투사들을 존경하는 것은 그 분들이 그만큼 힘든 선택을 했던 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잖습니까?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 아무래도 그 '파란 제비'는 얼어붙은 반일 이데올로기의 땅에 너무 일찍 날아온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온갖 이유를 들어 이 영화를 일본의 우익들이 보면 좋아할 것이라고들 하더군요. 이거까지야 좀 심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의 근거로 드는 것이 일본 문화청의 문화부장 데라와키 켄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는 기사인 것을 보곤 정말 경악했습니다.

데라와키 켄은 그가 문부과학성(우리로 치면 교육인적자원부)에 있던 시절 "평등", "박애", "주권재민"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교사 노조와 함께 학습 지체 장애를 겪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개혁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일본의 우익에게 찍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본 주류 언론에게 공산당 아니냐고 공격받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우익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 그 우익과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하시나 봅니다.

물론 자기 멋대로 사물을 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일본의 우익들이 좋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 혼자서 무려 2천만 명의 목숨을 빼앗은 2차대전의 경험을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음에도 중국과 우리만 일본의 저팬 머니가 더 이상 아쉽지 않은 까닭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들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모든 가치 판단을 그들의 호/불호에 맡겨야 할까요? 그러면 그럴수록 갉아 먹히는 것은 우리의 자의식밖엔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일본의 우익들의 야심작이었던 후소샤판 불량 교과서의 채택률을 0.4%로 만들었던 것은 데라와키 켄과 같이 한일 관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일본의 시민단체 그리고 그들과 손을 잡았던 우리의 시민단체들이었습니다. 일본 대사관 경비한다고 애매한 전경에게 폭력을 가했던 HID 아저씨들이나 키보드를 혹사시키던 네티즌들이 아니라.

솔직히 친일혐의가 있는 인물을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줬다거나 친일파 찬양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에게 연상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화 <황산벌>을 보고 흥분하던 조갑제 영감님 그리고 또 하나는 80년대에 <빽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를 근친상간을 묘사했다고 몇 년 동안 수입 금지시킨 심의기관입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오버하는 것이 다르게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큰 시각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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