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감상하며 늘 그랬던 대로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지만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던 일제시대에 관한 이야기,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주제인 '친일 논란'이다. '친일'은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최대의 논란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쓰는 이로서는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가 가장 확실하게 지켜야 할 부분은 양심과 신념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는 이는 타당한 상식을 지키는 선에서 누구보다 더 자신의 신념에 철저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간단하다. 내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내 신념에 따라 글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면서 느낀 그대로 말이다. 친일,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그 단어를 돌아보며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완용과 춘원 이광수다. 한때는 친러파였지만,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친일파로 말을 갈아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체결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국권까지 파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주도한다. 그런 그가 당대의 명필이며, 당대의 유학자였다는 사실은 후세를 사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분명히 우리 문학사의 획을 그은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개명한 이름 '가야마 미쓰로'가 말해주듯이, 말년에 갑작스럽게 친일파로 변신하며 학병을 권유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고 그 행동의 영향 때문인지 6.25 전쟁 당시에 납북됐다. 이외에도 총독부에 자금을 헌납했거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위직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당대의 기득권 세력의 인사들이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거론된다. 이들은 총독부와의 그런 거래와 관계를 통해 민중을 수탈하며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결국 우리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친일은 이렇듯 일본 측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했거나, 상식 이하의 거취를 취했던 이들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아직 이렇듯 가장 확실한 '친일'마저도 심판하지 못했다. <청연>의 '박경원 미화'에 관한 논란은 그런 확실한 친일마저 심판하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 대중의 그러한 시선은 찬반 여부를 떠나 지극히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시선이다. 물론 박경원은 미화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된다 영화 <청연>은 보기에 따라 위험한 장면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영화의 초반을 보면, '박경원(장진영)'의 연인 '한지혁(김주혁)'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별다른 고뇌 없이 일본군의 장교가 되는 것처럼 묘사돼 있고, 비행학교에 다니는 박경원과 그 주변인들은 파라다이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복한 학생들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일만 친선 비행'이라는 일본 냄새 물씬 풍기는 비행에 참여하려는 박경원을 보면, 그 이면에 숨어있는 독립투사들의 많은 고난이 느껴진다.
 '박경원' 역은 장진영이 맡았다.
ⓒ 무사이필름

물론 영화를 직접 보게 된다면, 사뭇 다른 논리들도 충분히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박경원은 사회 참여가 완벽하게 차단된 조선의 여성으로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선구자적인 여성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녀가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했던 그 수단을 생각해봤을 때, 그녀는 미화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미처 재조명하지 못한 독립투사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어쨌든 일본의 힘을 업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그녀에 대한 미화는 대단히 위험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권기옥이라는 또 다른 훌륭한 여류비행사를 재조명했다면 <청연>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친일 논란 속에 가려진 식민지 여성의 고단한 삶 "조선이 너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일본군 장교 '한지혁'이 주인공 '박경원'에게 했던 말이다. 조선의 틀에서 부귀를 누리며 다시 일본에 줄을 대 영달을 누리고 있는 아버지를 두었고, 그런 아버지의 영향 아래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온 '한지혁'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염치없는 말이지만, '박경원'이 살아온 삶을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어려운 말은 아니다. 옳은 행동은 아니더라도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는 경우, 우리도 자주 목격하는 상황이다. 박경원, 그녀는 조선의 여성이었고, 일제 치하에서 살던 여성이었다. 그 시절의 여성이라고 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조선의 여성들은 애초부터 꿈을 실현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던 사람들이었다. 여성에게도 충분히 기회를 보장해주는 사회였다면, 그리고 혹시 박경원이 남성이었다면, 박경원에게는 더 이상 이해의 여지가 없다. 이해의 여지는커녕, 강자에게 붙어 손쉽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야심가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박경원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친일'은 그렇기 때문에 일말의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본대로라면 <청연>은 박경원의 친일보다는 꿈을 이룰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이 선택해야 했던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의 이면을 돌아본 영화다. <청연> 결말부분에는 초반부에서 그린 '파라다이스'와는 사뭇 다른,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뇌들이 등장한다. <청연>은 '친일 논란'의 중심인물인 박경원에 대해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영화다. 결국 영화 <청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박경원'이 아니라 '조선의 여성', '식민지의 여성'이다. 박경원은 그 당시의 여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궁궐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왕비와 후궁들을 돌아보자. 그들이 궁극적으로 꾸었던 꿈인 권력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권력자인 왕의 총애를 얻는 방법 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의 사회가 여성들에게 정당한 수단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얼마나 보장했냐는 것이다.
 극중에서 '한지혁(김주혁)'이 입은 일본군 장교복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진다.
ⓒ 무사이필름

<청연>이 범한 결정적인 오류 용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는 가능한 이런 주제를 선택해놓고도 극단적인 찬반 논쟁에 휩싸인 <청연>이 범한 오류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지혁'은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고뇌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관객에게 증명하지만, 그 고뇌의 깊이는 얕아도 한참 얕다. 게다가 아쉽게도 '한지혁'은 가공의 인물이다. 박경원의 사랑과 꿈에 대한 고뇌는 영화 내내 등장하고 있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고뇌는 '고국 방문 비행'등의 장면을 제외하고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그 '고국 방문 비행'도 이미 친일 논란이 불길처럼 번진 지금 시점에서는 대중들의 시선에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고뇌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영화의 초반 장면을 보면, 일본군의 진주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과는 달리 '박경원'은 닌자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모르는 아이의 이야기일 뿐,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어른'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자신이 속했던 나라, 그런 나라가 없어져 많은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살았다면, 극단적인 친일파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국가에 대한 고뇌를 하기 마련이다. 혹시 '박경원'이 극단적인 친일파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고국 방문 비행'을 시도하는 박경원을 보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친일파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영화 <청연>은 그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요소를 지나치게 외면하면서 '친일 논란'이 나오기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고 말았다. 대중들이 제기하는 '친일 논란'은 제작진 의 알 수 없는 의도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꾸준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중이 거론하는 '친일 논란'은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지적의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설득력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어차피 일본을 통해 꿈을 이룬 인물을 다룰 참이었다면, 그 설득력 있는 반론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했어야 했다.
 식민지의 여성으로서 정당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 무사이필름

'친일 논란'은 더욱 뜨거워져야 한다 <청연>에 대한 안티 카페가 생겨나는 등, <청연>은 개봉 전부터 홍역을 치루고 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개봉한 <왕의 남자>가 만만치 않은 기세로 일치된 호평을 얻고 있어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하지만 어찌됐든 <청연>은 <왕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과감하게 터치하면서 논란을 이끌고 있다.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예견된 논란으로 볼 수도 있다. 최근 친일파 자손들의 재산 반환 소송이 꾸준히 일어나면서 '친일'에 대한 대중의 시선 역시 다시 부활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청연>의 '친일 미화 논란'은 그런 대중들에게 확실한 화두를 제공했다는 시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긍정성을 갖는다. 기왕이면 이렇게 불처럼 일어난 논란이 단순히 영화 <청연>에 대한 논란을 넘어 아직 끝나지 않은 친일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 제기로 확대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하지만, 본질적으로 친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위를 더욱 확대해 '더 큰 친일'을 밝혀낼 수 있는 생산적인 문제 제기가 돼야한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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