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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도 포로수용소 기념관 일부
ⓒ 정만진
1950년 7월 8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 포로가 5명 대전형무소에 들어온다. 불과 1주일 뒤,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포로수용소는 대구 효성초등학교로 옮겨진다. 그 후 포로수용소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부산에 포로수용본소를 설치하여 가동하게 된다. 이곳에는 무려 14만명의 포로가 수용된다.

51년 1월 6일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내 14만명이나 되는 포로가 전장(낙동강)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데 대한 우려와 포로를 경비하고 관리하는데 너무 많은 병력이 소모된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포로들을 미국 본토나 미국령의 어디로 옮기느냐(록키 산맥을 넘는 도로를 독일군 포로들이 닦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제주도로 옮기느냐 논란하다가 결국 거제도로 결정된다. 부산에는 병원 수용소만 남고, 그 이후 '전방에서 수집된(거제시 발행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표현)' 포로들은 최종적으로 거제도로 이송된다.

▲ 포로들이 용변을 보고 있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등에 페인트로 포로임을 표시하는 "PW"가 적혀 있다.
ⓒ 정만진
포로들의 집단적 저항 움직임은 51년 6월 18일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던 제72 소구역에서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3명의 포로가 죽고 8명이 중상을 입는다. 다음달 휴전협정이 열리고, 곧 전쟁이 끝나면 포로 송환이 현실적 과제로 등장할 전망이 대두되자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간의 마찰이 표면화된다. 이때 북한에서는 고위 간부를 비롯 다수의 조직원을 포로로 위장시켜 수용소로 들여보냈고, 이들은 조직적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대립은 점점 노골화되어 51년 8월 7일 반공포로들이 대한반공청년단을 결성하지만, 9월 17일에는 3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이 형식적인 인민재판을 받은 끝에 무참하게 학살된다. 12월 18일에도 14명이 죽는다. 52년 2월 18일 송환 심사 과정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77명이 죽고 140명이 부상한다. 미군도 1명 죽는다. 4월 10일에는 한국군 경비대 4명이 죽고 포로 30여 명이 피살되는 사건도 일어난다. 심지어 5월 7일에는 포로수용소 소장 돗드(Francis T.Dodd)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여 전세계적 주목을 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포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이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들을 잘 관리만 하다가 종전이 되었을 때 송환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 결과 포로수용소장에게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은 점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거제 포로수용소>는 이렇게 분석한다.

'통제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포로가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위험한 일이었다. 무기다운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하더라도 숫자가 많다는 그 자체가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었다.'

마침내 유엔군사령부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를 분리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친공포로들은 분리 심사를 거부하며 격렬히 저항한다. 이 과정에서 포로 31명과 미군 1명이 죽는다. 이윽고 송환 거부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 약 8만명은 제주도, 광주, 논산, 마산, 영천, 동래, 모슬포 등지에, 송환 희망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 약 4만명은 저구리, 용초도, 봉암도 등지에 소규모로 신설된 수용소로 분산 수용된다. 한때 17만명의 포로를 수용했던 거제도에는 이제 약 5만명의 친공포로만 남게 된다.

▲ 포로수용소 경비초소의 밤 이미지
ⓒ 정만진
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은 53년 6월 8일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포로 교환 문제에 합의한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 3만4천명 중 2만7천명을 6월 8일을 기하여 독단적으로 석방해 버린다. 미국은 "한국이 유엔의 권한을 침범하였다"고 항의하고, 북한과 중공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모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면서 휴전회담을 무기한 연기시킨다. 우여곡절 끝에 포로 송환 업무는 53년 9월 6일 완료되고, 거제 포로수용소는 바로 폐쇄된다.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포로의 수는 남북 체제 중 어느쪽이 우월한가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그 탓에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치열한 사상 공작이 이루어졌는데, 무자비한 사형(私刑)의 난무로 돌로 머리를 쪼아서 죽이는 등 반인간적인 살인이 예사였고, 시신은 변소나 철조망 밖으로 유기되거나 암매장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학살은 그 참상을 확인하는 후대인에게 '남의 장단에 놀아서 동포끼리 서로 살육한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어두워진다'는 (김성칠, <역사 앞에서>)의 진술에 진정으로 공감하게 해준다. 역시 '전쟁의 기억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인권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면서 국가라는 물신화된 단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공동체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김동춘, <전쟁과 사회>)' 하는 까닭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주간 대구시민신문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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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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