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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암태도 남강나루터에 닿았다. 80여 년 전 어느 날 밤 이곳에는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한 서태석을 비롯한 지도부를 검거하기 위해 목포에서 온 경비정들이 붉을 밝히고 있었다. 날이 밝자 암태도 주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남강나루터를 메우고 무언의 시위를 감행했다.

지금 암태 남강나루터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팔금과 연결하는 다리공사의 완공을 앞두고 있어 이 나루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나루터를 기점으로 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드러나며 팔금과 암태 사이에 깊은 갯고랑 사이로 물이 흐른다.

암태는 한때 비금, 도초 그리고 우의도와 흑산도로 이어지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갯일보다는 농사가 더 많은 암태도는 일제강점기 '소작쟁의'로도 유명하다. 이 소작쟁의를 모델로 1979년과 1980년 송기숙(전 전남대교수, 현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씨가 잡지(창작과 비평)에 소설 <암태도>를 연재하면서 암태도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설처럼 일제강점기 대여섯 시간씩 배를 타고 문재철 지주와 경찰, 법원 등이 있는 목포로 시위원정을 했던 그 뱃길은 지금은 1시간으로 단축되었다. 그래도 섬 주민들에게 육지는 멀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암태와 압해를 연결한다는 이야기 나오면서 주민들은 크게 반기고 있다.

▲ 소작쟁의의 중요한 무대 남강나루터.
ⓒ 김준
기골이 장대한 '섬사람들'

일제강점기 암태도는 7천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48.9%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수산업에 종사했던 사람은 0.5%에 불과했다. 1930년대 말 무안군에 50정보 이상의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모두 18명이며 암태도 지주로는 암태면에 사무소를 둔 천길석(103정보)과 천철호(56정보), 목포에 사무소를 둔 문재철(608정보)이 있었다.

특히 문 지주는 전남은 물론 경기도에까지 땅이 있는 전국적인 지주로, 그가 대표이사인 문태중학교와 선일회사 그리고 아들의 명의 땅까지 포함하면 땅은 훨씬 늘어난다. 1930년대 전남지역에 500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는 일본인 10명, 조선인 5명에 불과했다. 농민들의 소작료 인하를 비롯한 소작조건과 관련된 요구를 천 지주는 수용한 반면 문 지주는 문중과 마름으로 지주소작인회를 결성해 강력대응하고 일본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특히 천 지주는 암태 초등학교 설립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지역사업에도 투자를 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얻기도 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초 암태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야학을 설립하고, 주민을 계몽하기 위한 민중극과 강연회를 실시하면서 조직되었다. 1923년 가을걷이 무렵 마름들은 소작인들에게 7-8할의 소작료를 부과하고 납부를 독촉하고 있었다.

▲ 암태도 면사무소 앞에 있는 소작쟁의 기념비
ⓒ 김준
"7, 8할의 무지한 소작료를 물고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소작료를 4할로 내려라. 그렇지 않으면 금년 농사부터 다 지은 농사지만 벼를 베어들이지 않겠다, 이렇게 배수진을 치고 나선 것이다. 이제 소작인들은 말로는 더 겯고 틀 필요가 없다 싶어, 마지막 수단을 쓰리고 한 것이다."(소설 '암태도' 중에서)

송기숙은 최근 산문집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에서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 섬사람들'로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

"섬이나 지리산 피아골 같은 데는 더러 엉뚱하게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장골들의 후예(민중봉기의 주모자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주모자 서태석도 그런 사람의 후손이다."

송 교수는 같은 글에서 동학농민전쟁 전후 민중봉기의 주모자급들은 '섬'으로 도망치고, 다음 급들은 '지리산' 같은 산으로 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도망칠 때 불문율처럼, 부자면 부자, 형제면 형제가 함께 도망치지 않았고, 자손들에게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예 성과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으로 행세를 하기도 했다. 암태도 소작쟁의 지도자인 서태석의 선조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섬으로 피신해 큰 형은 자은도에, 둘째는 암태도에, 셋째는 팔금도에 따로 살았다고 말한다.

필자가 암태도에서 만난 박존순(장고리, 1935년생)은 서태석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7살 때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던 서태석의 '오강 심부름'을 했다. 그가 기억하는 서태석은 키가 훤칠하니 크고, 얼굴이 길쭉했다고 말한다. 감옥에서 나온 서태석을 고향(오산리) 가족이나 친척들도 거두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의 감시 눈초리가 있고 혹시 이를지 모르는 뒷일 때문일 것이라고 박씨는 추측하였다. 결국 암태도에 있는 서당을 돌면서 숙식하며 연명을 하다 여동생이 사는 압해도에서 불행하게 죽음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 오산리 마을 옆에 있는 서태석선생 추모비
ⓒ 김준
암태도 소작쟁의 승리로 이끌다.

암태도의 지주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염(煮鹽) 때문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천일염전이 생기기 전이었던 당시 소금은 매우 귀했으며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암태도의 대표적인 지주 문재철이 태어난 암태도 수곡리는 갯벌이 발달하고, 인근에 땔감이 풍부해 일찍부터 전통소금 생산이 활발했던 곳이다.

갯벌을 소로 갈고 바닷물을 뿌리기를 반복해 얻은 함수를 솥(염분)에 넣고 끓여서 만드는 소금은 서남해역의 지주들이 부를 축적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소금은 인근 영산포, 줄포는 물론 강경과 하동포까지 가지고 나가 판매한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섬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가지고 돌아와 곱절로 거래하는 선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문 지주는 목포항이 개항(1897)되면서 목포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상업자본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문재철의 자본투자 내역을 보면 상업부문에 목포해운, 남일운수, 선일, 목포차고 금융, 전남백화점 등이 있으며, 금융부문에는 호남은행, 전남신탁, 산업자본 부문에에는 동아고무, 목포양주, 전남면화, 남성정미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고리대 즉 선대제를 이용한 토지의 급속한 확대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선친의 지위도 큰 역할을 했다. 박순동의 기록 <암태도 소작쟁의>에 의하면 박복영을 통해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제공했으며 문태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문재철의 땅은 전남의 신안, 무안, 영암, 나주, 진도, 해남, 장성, 광산, 함평, 담양 그리고 전북의 고창, 부안, 충남의 당진 심지어는 강원 철원과 양구, 경기도의 광주, 시흥, 수원까지 분포했다고 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암태도소작인회 외에 암태청년회, 부인회 등의 조직지원이 큰 힘을 발휘하였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목포원정 시위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주목을 받아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하고, 동정금이 재일동포들에게서도 들어왔다. 이 뿐만 아니라 목포에서는 동정음악회를 개최하려다 일제에 의해 제지되기도 했다.

암태도 농민들은 1924년 5월 소작쟁의 과정에서 투옥된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목포지청 입구에서 야영을 하며 12일간 단식투쟁을 감행하며 투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김병로(서울) 등 변호사들이 무료변호에 나섰으며, 재경유지들은 '암대소작인 아사동맹동정단'을 조직하고 김유동과 조봉암 등이 실행위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지지와 성원에 목포경찰은 암태도민을 유화하고, 지주를 보호하기 위해 여론 확산을 막고 쟁의를 무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4년 8월 30일 지주 문재철은 광주노농회 서정희,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장이 입회한 가운데 소작인 대표 박복영과 약정서를 체결하였다. 약정서에 의하면 소작료는 지주 몫 40%, 소작인 몫 50%, 장려농자금 10%로 정하고, 1923년도 미납소작료는 향후 4년간 무이자로 분할 상환하기로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쟁의 과정에서 도괴 철거된 지주 송덕비는 소작인회에서 복구하고, 쌍방이 고소를 취하하며, 지주는 소작인회에 기부금 2,000원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렇게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의 지원을 받은 지주와 마름 등 일가친척의 협박과 회유에 대항해 소작료를 인하시키고 지주로부터 기금까지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소작쟁의 전개과정이 당시 언론매체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되어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고, '전조선노동대회'에 보고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암태도의 소작쟁의에 영향을 받아 지도, 도초, 자은을 비롯한 서남해 지역에서도 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1923년 고율의 소작료에 대항하는 것에서 출발한 암태도 소작쟁의는 초기에는 서택석(소작인회 회장)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나중에는 서창석을 비롯해 청년회 회장이었던 박복영 등이 지도했다. 이들은 이후 신간회,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등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며 지역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관련자들은 물론 가족들도 해방 이후 불행한 삶을 지속해야 했으며, 최근에야 국가유공자로 추서되기도 했다.

▲ 오토바이를 멈추고 암태-압해 공사관련 현수막을 바라보고 있다.
ⓒ 김준

▲ 압해-암태 다리가 계획된다면 그 기점이 될 암태도 오도리 선착장
ⓒ 김준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암태도의 주업은 쌀과 보리 농사였지만, 보리는 점점 줄어들고 최근에는 마늘이 늘어나고 있다. 신안의 대부분 섬들이 보리보다는 마늘을 재배하고 있는데 그 양이 전국 마늘생산량의 8%에 달한다고 한다. 논과 밭 뿐만 아니라 도시로 빠져나간 집터 자리에도 마늘이 심어졌다.

주민들은 육지에 비해서 물류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해풍을 맞고 자라는 마늘이라는 브랜드가 형성되어 판매가 비교적 잘 되기 때문에 보리농사보다는 선호하고 있다. 이외에도 겨울철 소득으로는 당사도, 익금, 송곡, 오상, 해당, 추포 마을 등의 김 양식을 빼 놓을 수 없다. 20여 년 전에는 섬을 빙 둘러 김 양식을 했지만 지금은 당시에 비하면 1/3에도 미치지 못한다. 당사도와 익금을 중심으로 민어와 농어 등을 잡는 어장일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농업 중심 지역이다.

▲ 암태도 김 양식 시설.
ⓒ 김준

▲ 사람이 나간 자리에 마늘이 심어졌다.
ⓒ 김준
암태 남강나루터와 팔금을 연도교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 다리가 개통되면 안좌-팔금-암태-자은이 연결되는 공사가 마무리된다. 암태도에는 남강선착장, 오도리 선착장, 북강선착장 그리고 당사도 선착장으로 객선이 닿았지만 자은과 암태가 다리가 놓이면서 그곳에 있던 북강선착장은 어민들의 작은 배들만 이용하고 있다.

암태도로 들어가는 길 곳곳에 지역단체들이 내건 축하 현수막이 붙어 있다. '압해-암태'간 '새천년대교' 예비타당성 조사를 축하는 것들이다. 어떤 현수막 내용은 공사 시작을 축하하는 것도 있다.

"드디어 시작 한다네" "먼 소리여" "선착장에 프랑이 붙었어, 압해-암태간 공사 시작한다고."

목포여객터미널에서 만난 섬주민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도 주민들이 바람이 담겨있다. 이들 섬이 장산과 신의 그리고 하의, 비금과 도초와 연결되면 신안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결된다. 이미 압해와 목포간 연륙공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압해와 암태가 연결되면, 신안의 섬들은 차를 타고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주민들이 말하는 '천지개벽'(?)이 주민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세심한 어촌과 섬 정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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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