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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유족협의회 김영욱 상임고문이 지난 1일 별세했다. 부산 영락공원에 고인의 빈소가 차려져 있으며, 5일 ‘범국민위장’으로 장례식이 열린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평생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헌신했던 김영욱 선생이 별세했다. 올해 83살인 그는 마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던 지난 1일 눈을 감았다.

부산 영락공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이하 범국민위) 등 각계에서 보내온 조화가 줄을 서있고, 범국민위 관계자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범국민위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이화·채의진 선생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식은 5일 범국민위장(葬)으로 치러진다.

고인은 2000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의 단체인 '전국유족협의회' 상임공동대표를 거쳐 최근까지 상임고문으로 있었다. 그는 지난 해 5월 광주에서 열린 광주국제평화캠프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투병해 왔다.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학살당한 아버지 명예 회복에 옥고까지

고 김영욱 선생은 경남 진영 출신이다. 이이화 선생은 <한국사, 나는 이렇게 본다>는 책에서 그에 대한 이력을 정리해놓았는데,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부친(김정태씨)이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부친은 진영 3·1만세시위를 주동했는데, 19살이었던 그는 주모자 가운데 최연소였고 이로 인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진영에서는 우익 계열에서 비상시국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일제시대부터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강모씨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강씨는 제자 강간사건으로 교단에서 쫓겨나 있었던 사람이다. 한국전쟁 전 김정태씨는 운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강씨가 진영에서 마산으로 이사하려 할 때 '일제 때 교사를 하고 제자를 강간했다'는 이유로 트럭을 빌려주지 않았던 것.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나빴다.

▲ 고 김영욱 선생 장남 김광호씨가 이이화 선생의 책을 들어보이며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결국 강씨는 김정태한테 보도연맹원이라는 혐의를 씌웠다. 당시 보도연맹원을 포함해 258명이 진영에서 학살되었고, 학살자들은 이들을 진영 창고에 묻어버렸다. 당시 피학살자들은 진영을 비롯해 인근 창원·진해의 일대 민간인이었다. 당시 진영 학살사건은 '김종원 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4.19 뒤 김영욱 선생은 '금창(김해·창원) 유족회'를 조직했고, 희생자 시신 발굴에 나섰다. 그 뒤 전국유족회가 결성되자 총무간사를 지냈다. 시신 가운데 유일하게 김정태 신원만 확인되었는데, 그는 금이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된 시체는 화장한 뒤 유골함에 담아 진영 나밭(박)고개에 있던 김영욱 선생 소유 밭에 묻었다.

그 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빨갱이 장례식을 치루어주었다"고 그를 몰아붙였다. 나밭고개에 있던 유골 무덤을 모두 없애버렸다. 김 선생의 장남 김광호씨는 "포크레인을 동원해 무덤을 없애고 흔적조차 없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혁명재판소로부터 징역 7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수인번호는 '444'였다. 김광호씨는 "그 수인번호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사형시키겠다는 뜻 아니냐, 그 때 군사정권으로부터 당했던 고통은 말을 다 못할 정도"라고 술회했다. 그는 "경찰이며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에서는 아버지한테 온갖 고문을 가했는데, 오죽했으면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 다 자살하자'는 말까지 하셨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또 당시 김영욱 선생은 부산 영도에 살고 있었는데, 경찰이 집을 수색하면서 '대원군 병풍'과 고가의 바둑판, 증권·채권이 든 가방을 가져갔다고 한다. 김광호씨는 "그 물건들이 어디로 갔겠냐, 지금이라도 돌려받고 싶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서 "그 때 분명히 가져가는 것을 내 눈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의식 거의 잃었어도 '특별법 통과' 소식에 몸 움직였다"

출옥한 김영욱 선생은 부친의 독립유공자 인정과 '좌익혐의' 벗기기에 나섰다. 1986년 정치해금법이 실시된 뒤 부친은 대통령 훈장과 건국훈장을 받았는데, 일제시대 재판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그리고 김영욱 선생은 아버지가 좌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2000년 부산경남유족회 결성을 주도하고, 4.19 뒤 만들어졌다가 5.16 뒤 중단된 전국유족협의회 재창립에 앞장섰고 상임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이화 선생은 책에서 "김영욱은 아버지의 좌익혐의를 벗기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잠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부산경남유족회장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장남 김광호씨는 "아버지께서는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면서 "지난 해 5월 다친 뒤 병상에 있을 동안 의식을 거의 잃었는데 하루는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답니다'라고 소리쳤더니 몸을 움직이셨다, 그만큼 집념이 강했던 분이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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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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