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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교육헌장.
ⓒ 역사문제연구소 제공
1968년 12월 5일 출생. 1890년 제정돼 군국주의 교육의 모태가 된 일본의 '교육칙어'를 빼닮았다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태어나자마자 모든 초·중·고 교과서의 첫 장을 장식. 학생들은 예외없이 암송해야 했고 못 외우는 학생들에겐 '매타작의 추억'을 선사.

국민교육헌장의 이력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393자는 30대 이상 대다수에게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지난 68년 당시 최고 권력자,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세상에 나와 '왕' 대접을 받았으나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국민교육헌장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반포일인 12월 5일은 교육계 최고의 국가기념일로 대접받았으나 1994년부터는 더 이상 정부 차원의 기념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2003년 10월에는 국가기념일에서도 삭제됐다.

국민교육헌장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오는 24일 오후 서울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에서 이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여는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서중석) 관계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국민교육헌장이 변형된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학교에서 국민교육헌장을 강제로 교육받았기에 그 이념이 집단의식 형태로 잠재돼 있다는 것.

아울러 박정희 군부독재가 남긴 부정적 유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그 시대 통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이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승만에서 전두환까지, 독재 뒷받침한 철학자들

5명의 주제발표자 중 김석수(철학) 경북대 교수는 국민교육헌장에 담긴 파시즘적 성격 및 북한 주체사상과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사전배포한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적 배경과 참여철학자들의 역할'이라는 글에서 "국민교육헌장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마찬가지로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인간 개조를 목적으로 정신세계를 훈련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국민교육헌장에 국민정신 개조라는 목적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대학을 비롯한 일선학교에서 국민윤리 교육이 필수가 될 정도로 강화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한 권력자의 거대한 기획에 철학계 중추적 학자들이 참여한 결과, 이들의 파시즘적 경향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특히 주목한 인물은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 이은상 등과 더불어 국민교육헌장 초안 작업에 깊숙이 관여한 박 전 교수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내면서 유신체제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한 인물이다.

김 교수는 "박 전 교수는 '민족주의=반공주의=산업화주의=무력주의' 등식을 강조하고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를 제창한 인물"이라며 "그의 철학관에는 파시즘적인 경향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박 전 교수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은 한국 현대사에서 돌출적인 흐름이 아니며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진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안호상을 박 전 교수와 대동소이한 경우로 제시하며 "이들의 사상이 정치권 안에서 권력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서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의 기반이 됐다"고 주장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은 국민들에게 무력투쟁·경제전쟁·정치전쟁뿐 아니라 사상전쟁을 치르게 해 이승만의 영도 아래 국가를 재편해야 한다는 이른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김 교수는 더불어 5공화국 당시 문교부 장관을 지내며 '국민윤리'로 대표되는 정치교육을 강조한 이규호를 비슷한 경우로 제시했다.

"국민교육헌장, 순종적인 병사와 노동자 생산하려 했다"

또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국민교육헌장과 박정희 정권의 지배담론'이라는 글에서 "박정희는 경제발전계획 추진을 위해 국민 개개인의 정신무장이 절실하다고 봤으며 국민교육헌장 제정도 그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황 연구사가 주목하는 것은 1968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통령이 주창한 '제2경제론'. 모든 국민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그에 걸맞은 정신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당시 문교부는 '제2경제론'을 받아 그해 말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했다.

황 연구사는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생산하고자 한 국민적 주체의 기본 양상은 국가와 자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병사와 노동자였다"며 "같은 시기 만들어진 향토예비군의 '싸우면서 일하자'는 슬로건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황 연구사는 "'민족중흥'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의 핵심 슬로건은 반공이라는 부정적 이데올로기와 발전주의라는 적극적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양상"이라며 이를 박 전 대통령의 개인사적 경험과 관련지었다.

황국신민주의·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일제 식민지 경험에서 파시즘적 지배질서의 메커니즘을, 남로당에서 활동한 해방 후 경험에서 대중동원에 대한 감각을 익혔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밖에도 심포지엄에서는 '학교교육활동을 통한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보급', '국민교육헌장 교육교재 내용 변화' 등의 주제도 다뤄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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