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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에는 크고 작은 바자르(시장)들이 많다. 우리 나라의 재래 시장을 연상시키는 이 바자르들은 먹거리 위주이기는 한데, 그뿐 아니라 옷이나 기타 생활 도구들도 많이 취급한다.

이곳에서 파는 먹거리의 가격은 싸다. 주먹만한 토마토 10개에 300숨, 큰 수박 하나에 600숨, 포도 1kg에 400숨, 1.5L짜리 음료수가 400숨, 쟁반만한 빵이 200숨. 이런 식이다('숨'은 우즈벡의 공식 화폐 단위, 1숨은 한화 약 1원).

이런 바자르 중에서도 가장 큰 바자르가 타슈켄트 남쪽 외곽에 위치한 꾸일륙 바자르다. 이곳에 고려인 상인들이 많다고 하고 김병화 박물관에 가는 길가에 위치해 있기에 난 이곳을 먼저 들렀다.

최대의 바자르에 걸맞게 꾸일륙 바자르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을 들어 주겠다는 일꾼들도 많고 입구에는 호객을 하는 택시 운전사들로 정신이 없었다. 이곳에 고려인 상인들이 많다고 했지만 외모로는 고려인인지 우즈벡인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덮어 놓고 다가가서 "혹시 고려인이세요?"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냥 걸어다니며 구경을 했다. 이곳 상인들의 모습은 다른 바자르와 별 차이가 없었고, 파는 음식의 종류는 다양했다. 배추김치를 비닐에 넣어 팔고 있었고 오이무침과 당근과 각종 채소, 그리고 수많은 빵과 소시지와 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토마토와 수박도 많았고 한쪽의 샤슬릭 가게에서는 샤슬릭을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가게에서는 오전인데도 테이블에 앉아서 샤슬릭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현지인들이 보였다.

▲ 꾸일륙 바자르의 모습
ⓒ 김준희
한쪽에서는 즉석에서 만든 차가운 청량음료를 팔고 있었다. 한 컵에 50숨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그 음료를 마시는 현지인들이 많았다. 나도 한 잔 사서 마셨다. 1회용 종이컵에 담아 주는 것이 아니라, 유리컵에 담아 주는 것이라서 그 자리에서 원샷을 하고 다시 컵을 돌려 주어야 한다.

구운 양고기를 적당히 썰어서 손바닥만한 빵에 끼운 후에 케첩 같은 소스를 뿌려서 팔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가격은 1000숨. 먹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고 주위에 그 빵을 앉아서 먹을 만한 테이블도 보이지 않았다. 걸으면서 그걸 먹다 보면 고기와 소스가 흘러서 어떤 몰골로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바자르를 구경하고 나와서 김병화 박물관으로 향했다. 걸어서는 가기 힘든 거리고 정확한 위치도 시내 지도에는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우즈베키스탄에는 택시가 많다. 하지만 택시 마크를 붙여 놓은 정식 택시는 많지 않다. 그냥 거리에서 아무 차한테나 손을 흔들면 차가 서고, 탄 다음에 목적지를 말하고 가격을 흥정하면 된다.

꾸일륙 바자르에서 김병화 박물관까지 2000숨에 가기로 합의하고 차를 탔다. 검문소를 지나 먼 거리를 달린 후에 김병화 농장 입구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맞은 편으로는 목화밭이 펼쳐져 있었다. 목화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효자 노릇을 하는 주요 수출품이지만, 바로 이 목화 경작 때문에 우즈벡은 아랄해를 망가뜨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운이 좋다면 그 아랄해에도 가볼 수 있을 것이다.

▲ 김병화 농장 맞은 편의 목화밭
ⓒ 김준희
김병화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05년 연해주에서 태어나서 공산당 활동을 한 김병화는, 다른 연해주의 한인들 처럼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 그리고 강제이주 직후에 황무지에 물길을 놓고 수백만 평의 벌판을 논밭으로 개간하고 식량을 지원한 공로로 구소련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서 노력영웅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김병화가 일했던 농장은 원래 '북극성 농장'이라는 이름이었는데, 1974년 김병화가 죽으면서 '김병화 농장'으로 변경됐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이 바로 그 김병화 농장이다. 김병화가 1940년부터 35년간 농장장으로 있을 당시에, 이 농장은 뛰어난 생산 능력 때문에 구소련으로부터 수차례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양 옆에 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걸어들어가자 김병화 농장이 나왔고, 그 오른쪽으로 김병화 박물관이 있었다. 안에서는 뭔가를 보수 중인 인부들과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 김병화 박물관의 전경
ⓒ 김준희
"들어가도 되요?"

이렇게 말을 하고 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니, 지금 어디에서 왔냐고. 타슈켄트에서 왔어?"
"예, 타슈켄트에서 택시 타고 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건 당연하지, 여기는 한국사람들밖에 안 와."

김병화 박물관은 작은 1층짜리 건물이다. 그 옆에는 김병화의 동상이 있고 '이중사회주의 로력영웅'이라고 써 있다.

▲ 이중사회주의 노력영웅, 김병화의 동상.
ⓒ 김준희
박물관 안은 가운데의 벽 사이로 좌우측이 나뉘어져 있었다. 왼쪽에는 김병화가 사용했다는 테이블과 의자와 각종 집기들, 방명록이 있었고 벽에는 당시의 생활을 담은 사진들이 있었다. 한쪽에는 '우리와 함께 하던 한 사람, 그는 우리의 영원한 영웅이다'라고 써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이 농장의 역대 농장장들 사진과 노력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사진, 구소련으로부터 받은 상장과 훈장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역대 농장장과 노력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려인들이었다.

그 벽 한쪽에는 강제이주 직후에 갈대로 지은 집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집'이라고 명시해 놓지 않았다면 도저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맞은 편 벽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빨래통과 국자, 물바가지, 신발, 그릇들이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김영삼 전대통령이 기증했다는 큰 시계가 있지만, 그 시계는 죽었는지 멈춰져 있다.

난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이 농장에는 몇 명이 있습니까?"
"지금? 지금은 한 3000명 되지."
"고려인은 얼마나 됩니까?"
"고려인은 얼마 안돼. 한 700명 정도? 많이 줄었지. 그것도 노인하고 애들이 많아. 젊은 사람들은 전부 모스크바나 카자흐스탄으로 일하러 가고 없어."
"왜 여기서 일을 안하고 모스크바나 카자흐스탄으로 가지요?"
"돈이 안되니까 그렇지. 지금 이 농장에서 일해서는 돈 못 벌거든."

▲ 김병화 박물관 내부, 김병화가 사용하던 테이블과 의자
ⓒ 김준희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는 비밀리에 진행됐다. 출발하기 하루나 반나절 전에 사람들에게 알렸고, 한 객차에 4가족씩 탄 채 약 18만 명의 한인들이 기차로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고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많은 아이와 노인들이 죽었다. 기차가 이동 중에 멈추면 죽은 사람들을 땅에 묻고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항의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딘가로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이동한 후에 도착한 곳이 바로 중앙아시아였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의 우스토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인근이 그 주된 지역이다.

네 가족씩 탔다는 객차. 화장실도 없는 그 객차는 답답하고 더럽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이 어디로 왜 이동하는지, 언제까지 기차를 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였을 것이다.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김병화는 그 이동 도중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불안한 생각과 감정들을 그냥 묻어 두었을까.

난 김병화의 동상 앞에 섰다.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었다. 박물관 안에서 본 글귀처럼 김병화는 분노를 억누른 채 이곳을 새로운 조국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당시에 김병화가 보았을 그 벌판을 지금 나도 보고 있다. 전에는 황무지였던 이곳에 이제는 목화밭과 포장도로와 전봇대가 들어서 있다.

한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오직 벌판과 갈대밭뿐이었던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한인들은 절망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의 한인들이 집을 짓고 물길을 대고 농사를 하고 결국 노력영웅이 되기까지 지탱해 준 힘은 바로 그 분노였을 것이다.

박물관의 바깥에서 몇몇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우즈벡인인지 고려인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라도 이 아이들이 한글을 알까 싶어서 우리말로 말을 붙여 보았지만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어리둥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넓은 농장은 웬지 썰렁한 분위기였고, 아주머니의 말처럼 아이들만 눈에 보였다. 판잣집과 현대식 양옥과 교회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는 이 농장. 한쪽에는 학교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있었다. 한때 구소련으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다는 이곳은 이제는 젊은이들이 떠나가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곳의 고려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갈까? 후에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이 지역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우즈벡이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해당 국가에서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차별을 받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들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고.

▲ 점심으로 먹은 국수와 차이
ⓒ 김준희
농장을 나와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국수와 차이로 늦은 점심을 먹고 이후의 계획을 세웠다. 타슈켄트에는 술집과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스트립바가 많았다. 돈 쓰면서 놀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배낭 여행자가 오래 머물 만한 곳은 못된다. 난 일정을 빨리 잡았다. 역사 도시인 사마르칸트에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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