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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열렸던 라트비아 사상 최대의 동성애자 거리축제가 폭력과 반대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데 이어 이번에는 라트비아 입법부가 동성 결혼 금지조항을 헌법에 추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라트비아 동성애자 거리축제는 지난 7월 23일, 리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이를 반대하는 동성애 혐오자 등 1만여 명이 몰려 실패한 바 있다.

현재 동성결혼 금지조항을 헌법에 추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조직은 7월말 동성애 거리축제 이후 라트비아 정치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제1정당. 이 정당은 전 총수 에릭스 예캅손스가 성직자라는 점 등 종교적 성격이 매우 강한 정당으로, 라트비아 최대 보수정당으로 꼽히고 있다. 제1정당은 이미 지난 9월 15일 의회에 법안을 상정해 재적의원 100명 중 55명으로부터 찬성을 이끌어내며 '동성애자 마녀사냥'을 본격화했다.

제1정당 "헌법으로 동성애자 결혼 막겠다"

▲ 라트비아 헌법 표지
라트비아 민법 내에 이미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헌법조항으로 끌어올려 '허물어져가고 있는 라트비아의 전통적 가족관계와 가치를 지켜내자'는 것이 제1정당의 목표.

제1정당은 '동성 간 결혼을 금지한다'는 직접적인 문구 대신 "결혼의 의미를 '성이 다른 남녀의 결합'으로 정의하자"고 말하고 있으나, 지난 9월 15일 법안 발의 시 낭독한 연설문을 통해 동성애자들의 결혼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했다.

이 법안의 발의자인 이네세 슬레세레는 제1정당 소속 여성 국회의원. 이네세 슬레세레는 <발틱타임스(Baltic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이미 유럽에서는 점점 많은 나라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나는 라트비아에서 아직 그러한 결혼이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걸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네세 슬레세레는 지난 7월말 동성애 거리축제 직후 "변태성욕자들에게 거리 축제를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준 리가시장을 해임하라"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아리나르스 슬레세레스 교통부장관의 부인이기도 하다.

라트비아의 이런 움직임은 사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라트비아 내의 동성애자에 대한 핍박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돼왔다.

핍박과 폭력으로 점철된 '라트비아 동성애 역사'

▲ 지난 7월 라트비아 동성애 거리축제를 방해하기 위해 열린 반동성애시위.
라트비아의 동성애 역사는 1991년 소련 독립 이후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945년 소련공화국의 일원이 된 이후, 라트비아에서 동성애는 명백히 법적 금지사항기도 했지만 심각한 정신병의 일종으로 치부됐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지 1년이 지난 1992년까지 라트비아 민법에는 동성애가 범죄행위로 지정돼 있었으며, 이에 따라 18세 이상 성인들이 동성파트너와 갖는 성관계에 대해 최고 5년까지 징역을 선고하기도 했다.

구소련 시절부터 이어져온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적 불관용으로 인해 라트비아 내에서는 이와 관련된 크고 작은 폭력이나 차별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라트비아 루터교가 1995년 실제로 성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동성애자들을 공식적으로 파문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라트비아는 독립 이후 성적소수자들의 권익에 대한 문제에 관대하지 못했다. 국회 소속의 '인권 및 사회참여 발전위원회'는 1995년 라트비아 동성애자협회의 의견을 공공연히 묵살하고, 성적취향으로 인한 직장 내 차별금지를 법적으로 인정하라는 여러 단체의 요구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악명 높다.

1996년까지도 동성애자 모임장소가 이유 없이 공격당하는 일도 잦았으며, 1998년에는 한 게이바에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또 같은 해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고백한 경찰관은 백주대낮에 집단 폭력을 당하기도 했으며, 동성애자 클럽에 대한 급습 심문과 연행사례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2000년엔 라트비아 현직 정치인이 아동성추행 사건에 휘말리는 일이 발생, 그가 동성애자로 의심받으면서 전 사회적으로 반동성애자 감정에 불이 붙었다.

라트비아 성평등위원회(현 라트비아동성애협회의 전신)는 라트비아가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90년에 설립됐다. 이어 1995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으나 공개활동 보다는 인터넷이나 개인적 친분관계를 통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라트비아 동성애자 탄압의 진짜 속셈?

그러나 현재 라트비아 제1정당이 추진 중인 '동성애자 결혼금지' 조항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이 조항이 라트비아 헌법에 첨가되려면, 적어도 의회 내에서 세 번의 의결을 거쳐야한다. 또 총 100명의 의결인원에게서 67표 이상의 찬성표를 획득해야 한다. 이밖에 라트비아 내의 동성애자들의 반대와 사회적 소수권익 증진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유럽연합의 반대도 넘어야 할 산이다.

특히 라트비아는 EU회원국 중 현재까지 '반차별법 법률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유일한 국가로서 이것이 빨리 해결되지 못할 경우 유럽인권위원회에 상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유리스 라우리코우스 세계게이레즈비언협회의 유럽 총사무국장은 웹진 ILGA를 통해 "현재 라트비아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연합의 규정과 명백히 위배되는 일"이라며 "유럽에서 실시된 조사 자료에 의하면 라트비아는 유럽 전체에서 동성애 혐오도가 가장 높은 편인데 라트비아 노동인구 중 6.7%가 자신의 성적취향의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고, 9.3%가 물리적인 공격을 당할 위험에 처한 적이 있으며, 17%가 직장에서 공공연한 핍박을 당한 적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라트비아 제1정당이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성결혼 금지법안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에 대해 라트비아 언론들은 "종교적 차원이라기보다 내년에 열릴 라트비아 총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전통적 사회질서와 가치를 유지하는 보수정당이 득세하고 있는 라트비아의 분위기를 잘 타고 내년 총선에서 많은 표를 얻어 보자는 계획이 숨어있다는 것.

또 라트비아 내의 동성애 혐오증이 라트비아에 산재한 여러 사회적 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한 차원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라트비아는 독립 이후 전체 인구의 약 45%와 수도 리가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문제와 정치적 부패, 불안정 등의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성애자들이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라는 것. 지난 7월 라트비아 동성애 축제가 실패로 끝난 뒤 일간지 <디에나(Diena)>는 "현재 정치권내에서의 노골적인 동성애 차별적 발언은 동성애자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려는 저의"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동성애 탄압, 인근 국가로 번질 조짐

▲ 리투아니아에서 여린 반동성애 시위에 참가한 청소년의 모습. 루마니아, 폴란드, 리가, 탈린, 그리고 실패로 끝난 불가리아 등에서 열린 동성애자 거리축제 날짜가 적혀 있고 맨 마지막에 "빌뉴스?(빌뉴스도 시간문제다!)"라고 적혀있다.
이런 가운데, 라트비아와 이웃하고 있는 리투아니아에서도 라트비아의 움직임이 재현되는 듯한 행사가 개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성향이 강해 동성애 거리축제 계획조차 세운 적이 없는 리투아니아에서 지난 9월 30일, 아직 개최되지도, 계획되지도 않은 리투아니아 동성애자들의 거리축제를 반대하는 집회가 개최된 것.

이날, '윤리와 조국연합'이라는 단체 회원 50여명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최대쇼핑센터 앞에 위치한 유럽광장에서 리투아니아 동성애자 비판 시위를 열었다. '윤리와 조국연합'은 '건전한 가족, 젊음, 그리고 아이들'을 모토로 '마약반대, 사회보장 강화, 포르노 반대' 등의 활동을 벌이는 단체다. 이들은 대외활동의 첫 시위로 동성애자 반대시위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는 "리투아니아의 동성애자들은 유럽연합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십 만 유로의 지원금을 받기 시작했다"며 "그들은 독일 쾰른에서 교황을 만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유럽의 지지를 모으려 하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만간 리투아니아에서 거리축제를 벌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을 동성애자 반대시위의 이유로 들었다.

시위대는 이어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클럽이나 침대에서 하는 개인적인 일들에 간섭할 목적은 전혀 없다"면서 "그러나 그것을 거리로 끌고 나와 그런 모습을 보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할 이유가 없으며,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 켠에서는 이것이 리투아니아 사회의 잘못을 덮어씌울 희생양을 찾는 행동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으나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을 휘감은 보수화의 목소리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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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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