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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
ⓒ 한성희
조선 제9대 왕 성종(1457~1494)의 선릉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빽빽한 고층건물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번잡한 강남구 삼성동 테허란로 뒤편에 자리잡은 왕릉이고 초현대식 건물들이 왕릉을 둘러싸고 있으니 말이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내려 5분만 걸으면 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1462~1530)가 잠든 선릉(宣陵)이 나온다.

왕과 왕비 무덤이 세 개 있다 해서 삼릉공원이라 하기도 한다. 선릉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왕릉이고 정릉은 중종의 단릉이니 두 개의 능이 있다는 게 정확하지만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불러온 명칭에서 유래한 듯싶다.

선·정릉은 9대 성종(선릉)과 11대 중종(정릉) 부자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왕릉이다. 번화한 도심 한복판에 7만2000여 평의 숲이 남아있는 것은 선·정릉 덕분이긴 하지만 생각 외로 이곳은 한적하고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다.

▲ 선릉은 강남 도심에 있으며 흙을 밟을 수 있고 조용한 숲을 즐길 수 있는 사적지이기도 하다.
ⓒ 한성희
"여긴 하지 말라는 게 많잖아요."

이 정도 자연 숲의 공간은 번화한 도심에서 보기 드물기에 시민들이 휴식 삼아 많이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 밖으로 인적이 드물어 왜 그럴까 했더니, 안내하던 공익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점심 때 점심을 먹으러 간혹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정도란다. 숲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나이든 연령대로 운동 삼아, 산책 삼아 나온 것으로 보였다.

하긴, 사적지인 왕릉은 술도 못 마시게 하지, 담배도 못 피우게 하지, 운동기구도 반입 금지지, 고성방가는 물론 휴지 하나 버리지 못하게 하는 등의 제재가 많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개나 고양이 등 동물을 데리고 올 수도 없다. 그렇지만 빌딩 숲 속의 푸른 섬 같은 왕릉에 와서 도시생활에 찌든 마음과 육신에 휴식을 취하고 조용히 걸어봐도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 500년을 넘게 왕의 무덤을 지켜온 무인석의 눈에 보이는 현대의 도시는 어떤 것일까?
ⓒ 한성희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재위 25년만에 승하한 성종의 국장행렬은 1495년 4월 2일 밤 12시에 발인하여 동대문을 지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이곳 장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시(오전11시~13시)였으니 12시간이 걸린 셈이다. 성종의 국장행렬이 배를 타고 건너간 자리는 오늘날 영동대교가 놓여졌고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으로 현재도 사극의 인기 단골 소재가 되고 있으며 조선 최대의 불륜 스캔들을 뿌렸던 어우동과의 관계설까지 화려한 여성 섭렵으로 유명하다. 12명의 비·후궁을 두고 16남12녀의 자녀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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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잠깐, 우리가 역사를 보는 무의식적 편견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성종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으나 오히려 39세로 죽은 문종이 병약해서 일찍 죽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아들이라곤 달랑 단종 하나 두고 죽었고 단종이 너무 어려서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사건이 너무 깊이 각인된 연유일 듯싶다. 반면 성종은 13세의 소년왕으로 등극했고 25년 간 재위했으며 장성한 아들 연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줬기 때문일 것이다.

성종의 여성 편력이 대단했다고 보는 시각도 그렇다. 사실 그렇기도 했지만 당시 왕에게는 아들 생산이 주요한 의무였고 궁궐의 궁녀들은 모조리 왕의 여자니 여자 섭렵 같은 건 장려의 대상이지,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성종이 16남12녀를 두었다지만 그중 숙의 홍씨가 낳은 자녀가 7남3녀나 된다.

성종의 아들 중종 역시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등 세 명의 왕비와 경빈 박씨, 창빈 안씨 등 7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9남11녀를 둔다. 자녀와 비빈 수를 따져본다면 아버지 못지 않은 여성 섭렵이 되겠지만 정작 왕조실록에는 사냥과 음악,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성종의 치적과 사림의 등장

성종은 다 알려진 대로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비롯해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을 완성하고 집대성했기에 성종(成宗)이라는 묘호가 붙었다. 개국공신들이 추구하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와 정책은 15세기 후반인 성종대에 이르면 집권층인 훈구 세력이 중앙관직을 독점하고 귀족화, 보수화 하는 경향을 보인다.

▲ 불교를 배척하고 도학정치의 바탕을 이룬 성종의 문인석은 당시 조정 대신을 상징한다.
ⓒ 한성희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고려 말 신흥사족의 후예들인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성리학자들이 성종의 인재 등용책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영남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향촌 사회의 사림세력이었다.

성종대는 세종대에 시작된 문물제도의 정비사업을 완결 지음으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전진시켜 갔던 시기였고, 성종은 원로대신이 참여했던 원상제도를 폐지하고 세조대에 형성된 권신들의 훈구세력을 사림을 등용시켜 견제한다.

성종이 훈구파의 견제구 역할로 키운 사림은 중소지주 계급이었고 향촌에 경제기반을 두었다. 사림의 경제기반을 위협하는 존재인 훈구 세력을 비판하고 지방 지주들의 안정과 입장을 대변하며 농민지배를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해 실시해 향촌사회질서 확립에 노력한다.

사림은 주자성리학의 학문에 기초를 두고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며, 성종대에 새로운 정치집단으로 등장하여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변모하며 조선후기의 유일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성종이 등용한 사림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중심으로 언관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며 성종의 홍문관 확충으로 중앙정계 진출이 유리해졌으나 그때만 해도 대부분 언론활동에 머물렀다. 중앙고위 관료직은 여전히 훈구 세력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성종의 인재등용책으로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 물꼬가 터진 것이다. 성종은 훈구와 사림의 두 세력 균형을 잘 맞추었고 태평성대를 이루는 치적을 남겼다.

어쨌거나 조선후기 사림의 정치독점은 조선을 망친 가장 큰 원인이었으나 성종이 사림을 등용함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 정치세력 변화에 중요한 기점이 됐다. 훗날 연산군이 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한 것도 신권의 부상과 왕권의 다짐을 두고 권력투쟁을 벌인 파워게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 도굴로 사라진 왕의 유해

도시의 비둘기가 왕릉에도 어김없이 모습을 보인다. 문정왕후가 우격다짐으로 죽은 중종을 파내 이곳으로 옮겼을 때 정자각까지 물이 들어차는 흉당 자리로 판명됐었다. 선릉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 병풍석이 있는 성종의 능상은 잔디가 잘 자라지 못한다.
ⓒ 한성희
같은 지역에 있는 흉당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도시의 공해에 찌들어서 그럴까. 알 수 없지만 선·정릉에 있는 세 능상마다 잔디가 빈약할 정도로 자라지 못하고 흙이 다 드러나 있었다. 석물들은 조선전기 양식을 띠고 있고 부자간이라 왕릉이 조성된 시대차이가 그리 나지 않아 세 능이 거의 비슷비슷 닮은 꼴이다.

성종의 능상은 하루에 세 번 30분씩 개방하고 있어 들어가서 시민들이 석물을 볼 수 있다. 공익청년이 지키고 있고 석물을 만지거나 훼손하는 행위는 엄금하고 있지만 이런 수고를 하면서 시민에게 개방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 선릉 정자각 앞 잔디에서 놀고 있는 비둘기들.
ⓒ 한성희
성종의 능에는 현재 성종의 유해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무덤이 도굴 당하고 재궁(관) 마저 불타버렸으며 왕의 시신 행방은 간 곳이 없었다. 조선왕릉 부장품이라야 파낸 수고에 비하면 챙길 것도 없는데 전쟁을 기화로 금은보화라도 들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왜병들은 이런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후에 유해를 찾아봐도 끝내 찾지 못하자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불태워 새로 관을 짜서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했다. 성종의 무덤 속에는 수의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만 관에 들어 있다. 성종의 넋은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성종의 원비는 이 왕릉연재의 출발점인 공·순·영릉 중 순릉의 공혜왕후이고 19살의 나이로 자손 없이 죽었다. 그 다음 왕비가 폐비 윤씨이며, 윤씨가 폐비가 된 후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들이고 진성대군(중종)을 낳았으니 16명의 아들 중 세 명의 왕비에게서 겨우 아들 둘을 본 셈이다.

▲ 병풍석이 없는 정현왕후 능상. 역시 잔디가 빈약하다.
ⓒ 한성희
성종의 능상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석곽을 쓰지 말고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는 세조의 명 이후 난데없이 나타난 양식이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성종의 국장은 윤필상과 노사신, 인수대비의 입김이 컸고, 윤필상의 건의로 성종의 작은 할아버지뻘인 광평대군(세종의 5자) 묘소를 이장시켜 버리고 이곳을 택지했다. 왕릉 택지로 결정되면 왕의 할아버지라도 가차없이 내쫓겨야 했다.

병풍석을 두르자는 건의도 윤필상에 의해 이뤄졌고 인수대비의 승낙이 내려 두른 것이지만 당시 윤필상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중종 25년 경복궁 동궁의 정전에서 승하한 정현왕후의 능상에는 병풍석이 없다.

▲ 정현왕후 능
ⓒ 한성희
예종이 죽은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이었던 13세 소년왕자는 예종이 죽은지 몇 시간 뒤에 왕위에 오른다. 전례를 깨고 당일로 소년왕으로 등극했던 성종의 일생은 출발부터 드라마틱했다. 성종이 죽은 후에 큰 아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작은 아들 중종이 왕으로 등극하며 왜병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해가 없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인조 3년(1625) 11월 15일 선릉 홍살문에 불이 나서 완전히 타버리자 능참봉과 능수호군을 옥에 가뒀다. 다음해 2월 4일 능상에 불이 났으며 2월 15일 다시 능상에 화재가 나는 화를 당하기도 했다.

선릉의 병풍석이나 석물들은 도시의 공해에 찌들려 시커멓게 변하고 있었다. 마모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능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이제 조선조에 많은 것을 이루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진 제왕, 성종의 사후 수난은 끝났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사방을 돌아보니 하늘로 솟은 현대식 빌딩들이 여기저기서 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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