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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토미 소호(1863~1957)는 기자출신으로 60여년간 일본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패전 뒤에도 살아남아서 일본 내셔널리즘을 부활시킨 일본 우파의 선동가다. 일제 군부에 침략이론을 주입하고 전쟁을 부추긴 극우 내셔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도쿠토미 소호는 누구인가

ⓒ 지식산업사
청일전쟁 때는 그가 창간한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을 통해 '조선출병'을 주장하며 전쟁도발을 충동질하고, 러일전쟁 뒤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보호국화'를 반대하며 한국병탄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1910년 8월 합방이 이루어지자 대한제국 내 모든 신문과 잡지를 없애고 유일하게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만 남긴 '조선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경성일보> 고문으로 취임해 이후 8년 동안 편집과 경영을 총지휘하며 식민통치를 배후 조종한 이론가이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남긴 '민족동화정책'을 창안하고 실행했으며, 경성일보에 <조선통치 요의>라는 교본을 실어 '무단통치'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총독부 직원들에게는 통치요령을 제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는 무력행사를 협박한 글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단순히 신문기자에 머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통치 요의>를 읽어보면 참으로 참담하다. 그 글은 통치술에 대해 교묘하고 치밀하게 적고 있다. 로마제국과 영국 식민정책 사례를 들어 분석하고, 유럽 여러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행한 식민정치는 조선통치와는 다르다고 말하며 세부적인 방법론에도 공들여 설명한다.

조선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편협한 인식에 기초해 우리 민족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는 식민사관이라 불리는 실체를 보여준다. 조선을 정치적 중독 상태라고 칭하고 조선 정치사를 음모사라고 부른다. 음모에는 정쟁과 당화가 따르기 마련이고 붕당 싸움이 조선처럼 극심한 곳도 없다고 하며 세계 악정(惡政)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총론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통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조선인에게 일본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식민통치로 자기에게 이익이 따른다고 생각하게 하고, 셋째는 통치에 만족하여 기꺼이 복종하게 하고 즐겁도록 하는데 있다."

도쿠토미는 언론을 통폐합하면서 우리말 신문을 모두 없애지 않고 <매일신보>를 총독부기관지로 남겨두었다. 여기에는 갈 곳 잃은 언론인과 지식인을 <매일신보>로 끌어 모아 일자리를 주고 조직적 저항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철저한 감시 아래 기사를 쓰게 하되 정치적 문제가 아닌 소설 등을 실을 수 있는 문화마당을 마련해 항일운동을 어느 정도 잠재우려 했고 이러한 전략은 상당 부분 유효했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는 어떻게 포섭되었나

▲ 일제 말기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에 실린 이광수의 사진.
도쿠토미는 현란한 논리로 조선 지식층을 무력감에 빠뜨렸다. 춘원 이광수도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춘원의 글을 종합해 보면 도쿠토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춘원은 일반 사람들이 꼭 읽어야 책 8권을 고른 적이 있는데, 그 필독서 목록에는 도쿠토미의 <소호문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합방된 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작가가 꿈이던 춘원은 일본 유학 후 총독부 기관지에 글을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발행부수가 많고 신문으로는 유일한 <매일신보>가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이때 춘원의 글 솜씨에 감동한 <매일신보> 아베 사장이 도쿠토미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매일신보>에 <무정> 연재를 마친 후, 새로운 여행기 연재를 위한 여행 도중 춘원은 도쿠토미를 접한다. 1917년 8월 부산항에서의 만남. 이때 춘원은 25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고 도쿠토미는 54세였다. 아버지뻘이던 도쿠토미는 춘원의 실력을 치켜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식민통치에 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 춘원이었지만 무기력하게 무너지진 않았다. 2년 뒤 춘원은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쓰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변인이자 <독립신문> 사장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이후 망명 2년 남짓만에 돌아와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낸다. 하지만 이 무렵에도 도쿠토미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1936년 아베가 죽은 뒤 춘원이 도쿠토미를 방문하자 어깨를 안으며 말한다.

"자네도 내 아들이 되어주게. 내 조선 아들이 되어 주게.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되네. 크게 되어 주게"하며 타이르며 감옥에 들어갈 일은 하지 말아달라고 손을 쥐었다. <소호 옹을 둘러싼 감회>에서 춘원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춘원은 이후 '수양 동우회' 사건에서 도산 안창호 등과 검거되어 재판을 받는다. 재판 도중 춘원은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하고 경성부 호적계에 신고한 다음 도쿠토미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내 자식이 되어달라는 선생의 말씀을 들은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민유사에서 친히 문생(門生)의 손을 잡고, 감옥에 가지 말고 문장보국에 정진하라고 타이르셨는데…(중략) 그러나 옥중에서 병을 앓으면서 깊은 반성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조선 민족의 운명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다행한 일입니다. 조선인은 앞으로 텐노의 신민으로서 일본제국의 안락과 근심 걱정을 떠맡고 나아가 그 광영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민 수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야말로 텐노 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이하 생략)"

도쿠토미, 그는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도쿠토미는 94세까지 장수했다. 일생 동안 펴낸 책은 400여 권에 이른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지만 고령으로 처벌을 면한 도쿠토미는 그 후에도 많은 책을 내놓고 '천황제' 존속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지금도 텐노를 일본 국민의 구심체로 내세우는 세력이 주장하는 국민통합 논리는 도쿠토미 사고체계와 그대로 닮아 있다.

도쿠토미의 생각은 오늘날 일본 극우 사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나까소네 전 수상은 직접 쓴 <일본의 총리학>에서 '도쿠토미 선생으로부터 정치생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선생의 탁월한 역사관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에 탄복했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나까소네는 평화헌법을 개정을 추진하는 측에서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여전히 현실 정치에 힘을 행사하고 있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이끄는 고이즈미의 자민당은 일주일 전 실시된 9·11총선에서 압승했다.

개헌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렇게 개헌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어제 선출된 제1야당 민주당 대표 역시 개헌 찬성론자라는 소식이다. 헌법 9조 개정을 주장하는 온 목소리가 절정에 달하는 느낌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터부'로 금기시 되었던 평화헌법 개정은 이제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개헌 추진론자들은 '보통국가'를 지향한다고 주장하지만, 개헌은 군사대국으로 이어져 주변국을 위협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을 우리는 얼마나 감지하고 있을까. 천황중심주의와 군국주의에서 내려오는 일본 우파의 사상적 뿌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알고 있을까. 근대 일본제국주의 팽창정책의 열렬한 신봉자이며 선전가인 도쿠토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 또 다른 춘원을 포섭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신문 기자와 일본 게이오대 객원연구원을 지내며 한·일 관계사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인물을 밝혀 그 생애를 추적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정일성 지음/지식산업사 펴냄


도쿠토미 소호

정일성 지음, 지식산업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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