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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오후 열린 제256회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새로 설치된 개인 컴퓨터를 통해 안건을 살펴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정화원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디지털 본회의장? 엿이나 바꿔먹으세요."

정화원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사무처가 본회의장을 새 단장해 개시한 '디지털 시스템'을 두고 내뱉은 말이다.

국회 사무처는 수개월간의 준비 끝에 이달 1일부터 본회의장 모든 의원석에 '터치 스크린' 방식의 개인용 컴퓨터를 설치했다. 컴퓨터에는 각종 법안과 예산안 등이 입력돼 이젠 종이가 아닌 모니터로 안건을 볼 수 있다. 의안을 처리할 때 외에는 인터넷도 가능하며, 문서 작성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 사무처가 약 83억원을 들여 만든 이 모든 기능이 시각장애인인 정화원 의원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터치 스크린' 무용지물, 점자식 키보드 조차 갖추지 않아

정 의원은 14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새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사용해보곤 "엿이나 바꿔먹으라고 했을 정도로 불편했다"고 호소했다.

정 의원은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본회의 내내 불안했다"며 "오류도 많이 발생해 거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본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정 의원의 곁에는 그의 비서와 국회 직원, 시스템 개발자 등 세 사람이 매달려 쩔쩔 맸다.

정 의원에게 가장 큰 '난관'은 '터치 스크린' 방식의 컴퓨터다. 비장애인 의원에겐 '키보드식'보다 모니터를 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화면을 쳐서 아이콘을 선택할 수 있는 '터치 스크린식'이 훨씬 간편하지만 정 의원에겐 그렇지 않다.

▲ 지난 1일 오후 열린 제256회 정기국회 개회식이 끝난 뒤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 등이 본회의장에 새로 설치된 컴퓨터 사용법을 익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정 의원은 "앞을 볼 수 있는 다른 의원들은 손가락만 대면 원하는 화면이 보이지만 나는 눈을 볼 수 없으니 손가락을 갖다 댈 수도 없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터치 스크린의 대용으로 정 의원을 위해 따로 설치된 '센스 리더'도 말썽이었다. 센스 리더란,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읽기 프로그램'으로 센스 리더의 소리 안내에 따라 키보드를 누르면 원하는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정 의원은 이날 센스 리더가 제대로 화면설명을 해주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정 의원은 "센스 리더의 안내에 따라 키보드를 눌러 메뉴를 선택해도 정작 컴퓨터에는 늦게 전달이 돼 오류가 많이 발생했다"며 "메뉴 선택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키보드도 점자식이 아니었다. 미리 시연을 해본 정 의원의 비서진이 뒤늦게 이를 확인하고서야 키보드 위에 일일이 '점자 스티커'를 갖다 붙였다.

'파워 포인트' 이용한 자유발언 때도 '우두커니'

바뀐 시스템에 따라 의원들은 본회의장 전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이용해 '파워 포인트'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대정부 질문이나 자유발언을 할 수 있지만 이것도 정 의원에게는 쓸모 없는 장치다.

이 날도 이주호 한나라당 의원이 자유발언 시간에 '파워 포인트'를 이용했지만 정 의원은 우두커니 소리만 듣고 있어야 했다. 반면 비장애인 의원들은 이 의원의 발언을 들으면서 파워 포인트로 작성된 표나 그래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정 의원에게 가장 간편한 것은 '표결 시스템'이었다. 정 의원은 "센스 리더의 설명에 따라 찬, 반, 기권에 해당하는 키를 누르면 되는 표결 시스템은 다행히 이용에 별 문제가 없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처, 시각장애인 의원 존재도 잊었나" 분통

이날 어렵사리 본회의를 마친 정 의원은 "국회 사무처가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이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알았는지 의문스럽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정 의원은 "애초 사무처에서 비장애인 의원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만들었다"며 "나에게 맞춰 따로 시스템을 바꾸려면 약 6~7천 만원이 추가로 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정 의원은 "시스템을 완비하기 전에 어떤 장치가 필요한지 우리 측과 충분한 협의가 있었다면 이런 불편은 없었을 것"이라며 "시각장애인 의원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장치"라고 일갈했다.

'독수리 타법'이면 어때
디지털 본회의장 공부에 열심인 의원들... 인터넷 검색 '인기'

14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된 디지털 시스템을 접한 의원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의원들은 자리에 설치된 개인용 컴퓨터 시스템에 호기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메뉴를 선택해 보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젊은 의원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메뉴는 인터넷. '이용훈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에 대한 무기명 비밀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의원들은 인터넷을 통해 각자 즐겨 찾는 사이트 서핑에 열심이었다. 안건을 처리할 때가 아니면 의원들은 자유로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언론인 출신의 한 초선 의원은 메모까지 해가며 신문사 닷컴 사이트와 통신사 사이트를 잇따라 방문해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또 다른 초선 의원도 포털 사이트의 뉴스 코너를 찾아 뉴스 검색을 하느라 바빴다.

이아무개 의원은 '축구기사' 삼매경에 빠졌다. 한 남성의원은 만화를 열독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3선인 한 의원도 안경을 바짝 당겨 쓴 채 모니터와 키보드를 번갈아 보면서 사용법을 익혔다. 그는 '독수리 타법'이었다.

반면, 한 영남권 중진 의원은 컴퓨터가 익숙치 않은 듯 여전히 연신 서류뭉치를 들췄다.

아예 모니터 구동을 하지 않은 의원도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모니터가 책상 위로 올라오게 돼있는데도 모니터를 작동시키지 않은 것.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에 임하던 그 의원은 회의 중반이 지나서야 모니터를 켰지만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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