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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선이 쳐진 부분) 이세끼 국장의 '사실상에 있어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는 발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외교통상부가 그동안 논란이 됐던 한일 협정 관련 문서 전체를 공개했다.

이태식 외교통상부 차관은 26일 "정부는 오는 29일부터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서울 양재동 외교안보연구원 안 외교사료 열람실에서 공개한다"며 "지난 1월 이미 공개한 청구권 관련 문서 5권을 제외한 156권3만5352쪽을 이번에 공개함으로써 한일 협정 관련 모든 문서를 일반인들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협정 문서의 투명한 공개를 위해 이번에 민간 전문가 3명이 참가해 활동했다"며 "민관 공동심사관 활동을 통해 국민의 알 권리를 신장하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작업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차관은 "한일협정은 지난 65년 체결된 이래 40년동안 한일관계를 규율하는 기본 법적 틀"이라며 "일부 부족한 면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지만 타결된 협정은 준수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재협상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브라운 각서 교섭과정 및 각서에 명기된 미국 측의 군사·경제원조 사항, 이행 실적 등 베트남전 관련 총 49권, 7400쪽의 문서도 함께 공개했다.

이번에 정부가 공개한 문서는 한일 기본관계,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제, 청구권 문제, 어업문제, 선박 반환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 방대하다. 그러나 문서 내용 가운데 일부는 이미 언론 보도나 학술 저서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은 "한일협정 관련 문서는 과거에도 언론보도와 책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졌다"며 "그러나 이번 공개로 정확한 실상을 국민이 직접 접하게 됐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이번 공개를 통해 당시 교섭 당사자들이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 국익을 위해 어떻게 임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이세키 아주국장 "독도는 무가치한 섬,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자"

이번 문서 공개에서는 논란이 많았던 이른바 '독도 폭파 발언'의 상황이 소상하게 확인됐다.

이 발언은 1961년 5·15 군사 쿠데타 이후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교섭에 나섰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초 독도 폭파 발언을 한 것은 일본 측이었음이 확인됐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62년 8월에 열린 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에서 일본의 이세키 아주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주장했고 한국 측은 국교 정상화 이후 별개 취급하자고 맞섰다.

이후 김종필 중정부장이 독도 폭파 발언을 한 것은 일본에서 기자회견 때 농담으로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그는 1962년 11월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기자들에게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일본은 지난 1962년 초 한일 회담의 쟁점인 청구권 문제가 어느 정도 타결 전망을 보이자 한일 회담의 의제가 아닌 독도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재판소에 제소한다는 입장을 고집했고, 이에 한국은 제3국(사실상 미국) 조정이란 대안을 제시했다. 일본측의 공세를 회피한다는 측면에서 한 말로 이해되지만 이후 일본이 3국 조정안을 반대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결국 1965년 한일은 최종 7차 회담에서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을 만들어 "달리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며,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조정절차 또는 중재절차에 의하여 그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는 식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미온적인 대처가 독도 문제가 여전히 한일간의 쟁점이 되도록 만들었다.

▲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외교사료과에서 공개된 한·일회담 청구권 규모합의에 관한 김종필-오하라 메모(1962.11.12).
ⓒ 오마이뉴스 권우성
청구권 논란에 박정희 정부는 결국 정치적 타결 도모

최종 무상 3억달러, 장기 저리 차관 2억달러, 민간신용 제공 3억달러로 결말이 난 이른바 '청구권 협상'의 전말도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 소상히 알 수 있다.

한국은 1952년 처음 협상 시작 때 조선은행을 통해 일본이 반출해간 지금(地金)의 반환, 채무 변제 청구 등 8개 항목의 청구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거꾸로 사유재산의 경우 원 권리자인 일본인에게 보상청구권이 있다는 이른바 '역 청구권'을 들고나왔다.

양쪽의 주장이 계속 맞서던 중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타결을 도모하게 됐다. 결국 총 8억 달러에 낙착이 됐지만, 일본은 청구권이라는 이름을 극구 회피해 '국교 정상화 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제공했다.

일제 35년동안 우리 민족이 당한 온갖 피해를 겨우 8억달러에 팔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일제 징용 피해 등 개인 청구권이 완전 말살되는 결과를 빚게 됐다.

문화재의 경우 한국은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해 해방때까지 일본 정부, 또는 관헌의 비호 아래 약탈해간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했다. 한국은 불법 수단에 의해 일본에 반출된 문화재 가운데 명목과 소재가 확실한 것만을 선정해 약 3000점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문화재 반출은 합법적이므로 법적반환의 의무가 없으나 문화협력의 하나로 약간의 국유 문화재의 증여를 고려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한일 합의에 따라 1965년 12월부터 1966년 6월까지 도자기 90종, 고고자료 84종, 석조 미술품 2종, 도서 852종, 체신관계 품목 20종 등을 반환 받는데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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