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탈린 동성애자 퍼레이드에 참가한 동성애자들. 동성애자들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다.
ⓒ 서진석
8월 13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구시가지에는 오후 내내 비가 퍼부었다. 하지만 탈린의 게이바 밀집지역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4시부터 시작될 동성애 퍼레이드 때문이다. 이어 4시가 되자 무지개 깃발과 에스토니아 국기를 든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에스토니아에서 동성애 거리 행진이 조직된 것은 올해가 두번째이다. 이 행사는 '프라이드(pride)'라는 이름으로 유럽 각지에서 열리는 동성애자들의 행사로 2주 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리고 7월 23일에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개최됐다.

에스토니아뿐 아니라 라트비아, 스웨덴, 핀란드 등에서 모인 100명 남짓의 비교적 적은 수가 참가한 행사였지만, 이날 행사는 유럽 여러 나라의 지대한 관심 속에 치러졌다. 열흘 전인 7월 23일에 열렸던 라트비아 최초의 동성애자 거리축제가 폭력과 시위로 범벅된 채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에스토니아에서는 우려했던 폭력사태 재연은 없었다.

반면, 7월 23일 리가에서 개최된 라트비아 동성애자 거리축제는 동성애자 1백 명과 동성애 혐오자들을 비롯한 동성애 거리축제 반대 인파 1천여 명, 이를 구경하려고 모여든 1만여명의 관중이 뒤섞인 채 세계 최악의 동성애 행사로 기록됐다.

실패로 끝난 라트비아 동성애자 퍼레이드

▲ 7월 23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열린 동성애자 거리 축제 행렬
ⓒ apollo.lv
라트비아 동성애자 퍼레이드는 행사 전부터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라트비아 동성애자 연합회는 사전에 퍼레이드 일정을 리가 시청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았으나, 리가 시청은 집회 개최 3일 전인 7월 20일 '안전' 등의 이유를 들어 갑자기 허가를 취소했다. 라트비아 동성애자 협회는 리가 시청을 상대로 법적 소송까지 벌여 행사 하루 전인 7월 22일, 법원으로부터 승소결정을 받아 어렵게 행사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반동성애자들이 행사저지를 위해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모일 예정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행사를 둘러싸고 일찌감치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행사 당일이 되자, 동성애자 퍼레이드 참가자 1백 명과 반동성애자 1천명 등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사장에 모여들었다. 동성애 반대자들은 인간 띠를 형성해 축제 참가자들의 진입을 막았고, 이를 저지하려던 경찰과 마찰이 빚어지면서 혼잡을 빚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성애자들이 자체 미사를 하기 위해 성공회 교회로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반대자들과의 충돌은 극에 달했다.

이날 하루 동안 10여명 정도가 폭력혐의로 체포됐으며, 동성애자들의 행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이 동성애 반대 집회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간 갈등과 알력 속에 지내온 라트비아 현지인과 러시아인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 라트비아 동성애자 거리 축제 행진을 가로막고 있는 반동성애 시위참가자들.
ⓒ apollo.lv
실패로 끝난 라트비아 사상 최초의 게이 퍼레이드를 보는 국제적 시각은 당연히 따갑다. 세계인권협회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런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라트비아 정부에 거세게 불만을 표시했으며, 세계게이레즈비언협회 'ILGA(International Lesbian and Gay Association)' 등 국제동성애 단체들 역시 라트비아 정부에 항의했다. 또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독일 등 서유럽에서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던 단체관광객들의 수도 급감했다.

특히 라트비아 정부 내에서 연합전선을 이루고 있는 정당들까지도 이 문제로 인해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다.

"변태성욕자들의 퍼레이드를 허가했던 리가 시장 사퇴하라"

리가 시청에서 동성애자 퍼레이드를 초기에 허가해준 사실이 여기 저기 알려지면서 정치권 내에서 그 '실수'를 비판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 국무총리인 아이바르스 칼비티스를 비롯한 내무부 장관 에릭스 예캅손스 등 정치계 인사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건설된 라트비아에서 동성애 집회를 허락해 준 것은 큰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 라트비아 참가자들.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에이마르스(Eimars)는 정치인과 종교지도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 서진석
이런 정치적 불화에 휘발유를 부은 것은 현 교통부 장관인 아이나르스 슬레세르스가 "'변태성욕자들의 퍼레이드'를 초기에 허가해준 것에 책임을 지고 리가 시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행사는 처음에 집회허가를 신청 했을 때에도 절대로 허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리가 시에서 나중에 그 결정을 번복하긴 했으나 법정에서 동성애자협회가 승소할 수 있었던 바탕은 바로 리가 시의 초기 허가결정에 있으므로, 그것에 책임을 지고 리가 시장인 아이바르스 악세녹스와 리가 시 행정국장인 에릭스 스카파르스가 퇴임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이런 반응에 대해 라트비아 언론은 "교통부 장관의 발언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모함"이라고 평했다.

교통부 장관 슬레세르스와 내무부 장관 예캅손스는 라트비아 최대 여당인 라트비아 제1정당의 핵심인물로서 리가 시장인 악세녹스와 스카파르스가 활동하고 있는 신세대정당(Jaunais laiks), 그리고 또 다른 2개 정당과 더불어 연합전선을 이루고 있다. 신세대정당은 2004년 초, 잠시 라트비아 국무총리를 역임한 에이나르스 렙세(Einars Repse)가 창립한 당으로 라트비아 내 예산과 세제 개혁 등의 안건에서 라트비아 제1정당과 끊임없는 알력관계에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트비아 제1정당이 신세대정당과의 껄끄러운 분위기를 종결짓기 위해서 동성애자 퍼레이드를 걸고 넘어지면서 연합전선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트비아 최대일간지인 <디에나(Diena)>는 "교통부 장관의 이러한 발언은 '라트비아 내에 만연해 있는 불관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작이며, 이것은 현 상태의 해결이 아닌 악화의 길로 이끌어가는 길'"이라 평했다.

탈린 동성애자 퍼레이드에서 쏟아진 라트비아 비판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8월 13일 탈린 행사에는 라트비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해 많은 눈길을 끌었다.

▲ 세계게이레즈비언협회 유럽사무총장인 유리스 라우리코우스(왼쪽)과 맨 라트비아 행사시 동성애자 미사를 집전했던 마르스 산츠 신부(맨 오른쪽). 마르츠 산츠 신부는 라트비아에서 유일하게 커밍아웃한 신부다.
ⓒ 서진석
특히 7월 23일 당시 동성애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했던 마르스 산츠 신부도 자신의 동성파트너와 함께 참석했다. 마르스 산츠 신부는 "7월 23일 일어났던 폭력행사는 라트비아 내에 존재하는 동성애를 증오하는 세력들이 교회를 부추긴 것"이라 평했다. 그는 "이것은 1933년 나치 독일이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와 손잡은 것과 똑같은 사건이며, 이것은 단지 동성애를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각 차이를 인정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트비아인인 세계게이레즈비언협회 ILGA의 유럽사무총장 유리스 라우리코우스도 라트비아의 동성애 거리 행진이 폭력적으로 끝난 이유에 대해 "정치적 종교적 분위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라트비아에는 완전한 자유주의적 정당이 전혀 없다. 정치는 극도로 부패되어 있으며, 변화 또한 지나치게 잦은 상황에서 라트비아 국민들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정당에 힘을 기울여주는 경향이 있다. 현재 라트비아 최고 여당인 라트비아 제1정당의 당수가 성직자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의 문제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 되어 왔으며, 올해 최초로 열린 동성애 집회는 그런 분위기에 휩싸인 정치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라트비아 헌법에도 분명히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예배 참여의 자유 역시 보장되어야 하며, 성적 취향에 의한 차별 역시 헌법에 위배된다.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라트비아는 모든 정책이 유럽을 따라가고 있지만 인권 문제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같고도 다른 발트3국의 동성애자 인권 현황

▲ 탈린에서 열린 동성애자 거리축제 행사 안내 포스터
ⓒ 서진석
7월 23일과 8월 13일에 열린 두 행사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 모두가 소련에서 독립한 지 15년이 지났고 세 나라 모두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사회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경제발전이나 정치적 자유와는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발트 3국의 나라들은 소련의 일원으로 50여 년 간 존재하던 기간 동안엔 성적 소수문제를 비롯한 장애인, 사회복지에 관한 논의가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유리스 라우리코우스 ILGA의 유럽 사무총장은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의 경우, 북유럽과 가까운 지정학적 이유로 사고방식이 가장 열려있는 반면, 가장 남쪽에 위치한 리투아니아의 경우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크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 동성애 거리축제는 거론할 수조차 없다"고 진단했다. 유럽연합 회원국인 라트비아의 경우도 아직 제한이 많다는 것.

한편 에스토니아의 동성애자 거리 축제의 실무를 담당한 아르디 라발레픽은 "에스토니아도 이 행사에 대해 그렇게 우호적인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에스토니아에서도 행사 시작 1시간 전, 동성애자 거리행진이 시작되는 게이바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허위전화가 걸려와 그 일대 지역이 폐쇄되고 경찰력이 투입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동성애자 퍼레이드 행사는 올해로 독립 15년을 맞는 발트 3국에 '자유'와 '관용'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발트3국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서진석 기자의 커뮤니티를 방문해 보세요 www.freechal.com/BalticKorean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