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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인 용사의 묘, 그러나 실제는 14인의 용사가 싸웠다.
ⓒ 이창기
어랑촌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진한 갈색빛이 도는 봉밀하라는 작은 강이 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임산배수의 형태를 지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처음 보는 순간 ‘이런 곳에 어떻게 유격근거지라는 해방구를 만들어놓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왕청 유격근거지에 비해서는 꽤 넓은 들판이 마을 앞에 펼쳐져 있었으며 산도 왕청에 비해서 그리 높지 않다. 한눈에 봐도 일본 토벌대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러나 마을 뒤에 우뚝 서 있는 13인의 용사비와 그에 얽힌 무용담을 듣고 보니 유격대원들이 어떻게 이 마을을 지켰으며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용감한 민족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전 연변일보 기자인 리광인 선생을 기초로 당시 전투 상황을 재현해 보자.

1933년 2월 12일, 늘 그렇듯이 나뭇잎도 떨어져 유격대를 찾기에 좋은 겨울을 이용하여 악독한 일제는 용정, 투도구, 이도구, 화룡 3도구 등 각지에서 모아 온 근 400여명이나 되는 토벌대를 이끌고 새벽 어둠을 틈타 마을을 3면으로 포위한 채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마을의 유격대는 2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제2소대는 마을 입구의 길을 지키고 있었고 제1소대 14명의 대원만 근거지 안에 있었다. 일본토벌대는 마을 초입에서 지키고 있는 2소대는 건드리지도 않고 퇴로로(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하나의 퇴로는 열어두고 포위공격하는 것이 군사전법의 기본이다) 서산 쪽만 열어둔 채 마을 3면을 포위하고 산을 넘어 직통으로 마을 앞 벌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마을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최대한 일거에 모두 학살하겠다는 속셈이었다.

▲ 일제 토벌대가 저 남산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어랑촌 마을로 박격포를 쏘아댄 것이다.
ⓒ 이창기
그리고 마을 정면에 있는 남산에 박격포까지 걸어 놓고 포탄도 퍼붓고 기관총을 볶아대며 1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유격대가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포위에 든 마을 주민들은 생명이 끝장날 판이었다. 상황은 실로 급박하였다.

“피로써 근거지를 사수하고 주민들의 퇴로를 확보하라!”

김세 중대장의 쩌렁쩌렁한 명령이 떨어졌다. 김세 중대장 자신이 제일 먼저 몇몇 대원을 데리고 북쪽 들판에 매복하여 기어들어오는 일제토벌대를 맞받아쳤다. 그러자 그 앞쪽으로 리구희 소대장이 몇몇 대원들을 데리고 달려와 들판에 엎드려 기어들어오는 적들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적들이 무리로 쓰러지자 놈들도 주춤한다.

그때 방상범 군사부과 4명의 전투원들이 마을로 기관총과 박격포를 쏘아대는 적들과 응전하며 재빨리 유격대 주민들을 서산쪽으로 대피시켰다. 주민들이 무사히 다 빠져나가자 유격대사무실을 엄폐물로 삼아 적들에게 본격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토벌대도 유격대실에 기관총 집중사격을 가한다. 흙벽이 숭숭 뚫리자, 방상범 군사분장은 대원들에게 구들장을 뜯어 벽에 세우게 한 채 맹렬한 반격을 가한다. 그러자 놈들이 이번에는 박격포탄 집중적으로 퍼붓는다. 기어이 포탄에 맞아 지붕에 불이 달린다.

방상범 군사부장과 대원들은 주저 없이 앞집으로 옮겨 끈질기게 적들에게 사격을 가한다.

벌써 새벽부터 시작한 전투가 한 낮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마을 앞 들판으로 나간 김세 중대장과 대원들의 이제 실탄이 거의 다 떨어졌다.

이곳 저곳 초소에서 총소리가 끊어져간다.

김세중 대장은 최후를 결심한다. 마지막 남은 실탄을 모두 두 개의 싸창(권총)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사격을 멈추고 적들이 가까이 올 때를 기다렸다. 악질 일제 토벌대 다섯 놈이 가까이 접근해오는 것이 보인다. 그 때 김세 중대장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이 일어난다. 나라를 빼앗아간 것 도 모자라, 여기 만주까지 쫒아와 고결한 혁명가이자 동지였던 사랑하는 아내마저 학살한 일제에 대해 분노의 포효를 터트린다.

“내 총을 받아라!”

쌍권총이 겨끔내기로 연이어 불을 뿜는다. 그 자리에서 토벌대 다섯 놈이 꼬꾸라져 파득거리다 축 늘어진다.

그러자 적진에서도 김세 중대장을 향해 기관총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나의 권총이 일본놈들에게 빼앗겨 동지들 가슴을 향하게 할 수 없다.”
그는 적탄에 맞아 쓰러져 죽어가면서 두 권총을 돌로 쳐서 다 부숴버린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10리까지 들린다던 김세 중대장은 이웃집에 맡겨둔 다섯 살 딸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눈앞에 그려보며 그렇게 순결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것을 본 8명명의 대원들도 총알이 떨어진 자신의 총을 다 돌로 쳐서 부숴버렸다. 들판에서 유격대의 총소리가 멎자 토벌대는 굶주린 승냥이처럼 달려든다. 그렇게 1차 저지선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모두 장열하게 희생되었다.

마을 초입에 있던 2소대 대원들은 산을 에돌아 서산쪽으로 해서 마을 뒤에까지 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멀리서 총알이 없어 더 싸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지들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을 뿐 이미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적들의 포위망은 이제 5명만이 남은 싸우고 있는 유격대실 앞집으로 집중된다.

유격대실 앞집으로 옮겨와 다시 구들장돌을 뜯어 벽에 세우고 싸우던 방상범 군사부장은 황포군관학교 출신답게 어떻게든지 네 명의 대원만이라도 살릴 묘책을 찾으려 총알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사색을 거듭하였다. 그 때 그의 눈에 마당가에 쌓아놓은 짚더미가 보였다. 순간 머리에 반짝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는 적들이 대열을 정비하느라 잠시 사격이 뜸해지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방상범 군사부장은 대원에게 짚더미에 불을 놓으라고 지시했다. 연기가 마당에 가득차자 그는 대원들에게 단호히 연기 속을 뚫고 뒷산 골짜기로 해서 서산으로 빠지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신속하게 연기 속에 몸을 감춘 채 마을을 빠져나와 배밀이로 뒷산 골짜기로 간 다음에 서산 쪽으로 이동하였다. 가슴을 치고 있던 1소대 대원들과 유격구 주민들은 이 기적처럼 살아난 5명의 동료들을 보자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리광인 선생이 말해준 그날의 피어린 전투 내용이다. 리광인 선생은 85년도 연변일보 기자 시절에 이제는 할머니가 다 된 김세 중대장의 딸을 용정에서 만나 취재한 적이 있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의 인상은 잊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화룡현 유격대 중대장을 하던 아버지께서 한번은 동불사에 왔더랍니다. 김세 중대장은 아내가 이미 일제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기 때문에 딸을 동불사에 있는 남의 집에 위탁해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딸을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한참 어루만지더니 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내 한줌 쥐어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마지막이었습니다. 참 눈물 나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리광린 선생은 취재 후일담을 들려주다 그새 눈이 젖어든다. 만주에서는 이렇게 어린 자식을 남의 집에 맡겨놓고 일제와 목숨 받쳐 싸운 독립투사들이 많이 있다. 과연 죽을 때 삼삼히 눈에 밟히는 어린 자식 때문에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이들이 좌익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경원시 되어야 하며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아니 독립운동역사책의 기록에서마저 제외시켜야만 하는 것인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 영웅적으로 전사한 김세 중대장의 묘, 돌도 아니고 콘크리트로 만든 비석과 벽돌 제단이 한눈에도 허술해 보인다.
ⓒ 이창기
북한에서는 과거 독립운동의 유공자들과 나라를 위해 희생된 영웅에 대해서 정말 포상을 주는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중국에는 워낙 정비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문화혁명 때 유격구에서 적통치구역으로 내려갔네 어쨌네 하며 다시 극좌적인 제2의 민생단과 사건과 같은 탄압이 가해지기도 해서 독립운동 경험을 아예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토벌이 비행기 탱크까지 동원하는 형태로 더욱 악랄해지자, 나중에는 유격근거지를 지킬 수가 없어 결국 해산하고 산에서 유격대가 되어 싸울 수 없는 나이든 사람들과 어린이들은 모두 적 통치 구역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어떻게 변절이고 죄가 될 수 있는가. 문화대혁명이 사실 이 정도로 비인간적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우리들이라도 낱낱이 그 후손들을 찾아 상을 주고 그 뜻을 기리는 것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 우리 고향처럼 정겨운 어랑촌 근처 왕밀하의 나무다리. 그러나 이 마을에 조선족이 이제 거의 없다.
ⓒ 이창기
전투가 끝나고 2-3일 후 방상범 군사부장은 유격구 주민들과 9명 전사자들에 대한 추도식을 할 때 “어랑촌에 13인의 용사가 나타났다!”고 유격대원을 칭찬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칭찬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빼고 말을 한 것이다. 그 말이 전해지고 전해져서 후손들은 김세 중대장의 묘지 옆에 ‘13인의 용사비’를 세운 것이다. 사실은 14인의 용사가 옳은 표현이라고 리광인 선생은 설명한다.

어랑촌 14인의 용사가 소속된 화룡현 유격대이다. 리광인 선생은 “이 화룡현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3퇀(3연대)으로 되었고 이것이 후에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 이것이 후에 6사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화룡현유격대가 김일성 부대로 알려진 6사의 기초를 이루는 시초이자 발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 유격대원들이 일제가 패망하는 그날까지 주력군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리광인 선생은 구체적으로 그런 대원들의 몇몇의 이름까지 들어주었다.

“이후 항일연군 제 2방면군, 김일성부대 부관일을 했던 유명한 김주현이가 이 화룡현 유격대 출신이고 6사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비서역할을 했던 대통영감으로 유명한 이동백이가 이 활룡현 유격대출신이며 박포수로 이름났고, 근거지에서 병기공장을 운영했던 박영순도 화룡현 유격대 출신이다. 박영순은 훗날 해방 이후 북한의 항일유적답사단을 이끌고 만주를 다시 찾아와 많은 자료를 조사해 가서 북한의 항일 투쟁 출판물의 기본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요즘 어랑촌 마을에는 조선족은 거의 없고 한족만 살고 있었다. 그 마을에 당시의 기억을 떠올릴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른 열사비보다 훨씬 크게 세워놓은 13인의 용사비의 비문과 그리고 김세 중대장 묘지에 만발한 민들레만이 쓸쓸한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부디 잊지 마시라 이국땅에 잠든 조·중 친선의 열사·우리민족의 열사를.”

덧붙이는 글 | 자주민보와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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