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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들려오는 한국인 피해 소식과 인종차별적 판결은, 소위 문명화되었다는 사회의 가장 큰 치부는 인종주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다. 다른 나라에서 산 경험이 있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특히 영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 혹은 체류했던 사람들로부터 그들 사회의 이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경멸에 대한 소감을 나는 조금 더 많이 듣게 된 듯하다.

그런 말들을 통해 그 사회의 불건전함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은 한편으로,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당한 비인간적 대우와 차별에 대해서도 같은 민족으로 공동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다름'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다문화주의라는 인류애적 이상을 공유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거나 그 속도가 아주 더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반인종주의라든가 다문화주의가 보통의 사회에서는 관념화 될 수밖에 없는데, 인종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사건이 없고 현장들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국가들에서 인종의 문제는 다문화주의의 구현은 고사하고 인권문제로 바로 직결되는 것이리라. 따라서 다양한 인종을 포함하고 있는 사회는 다문화주의의 이상을 구현시켜볼 수 있는 일차적인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캐나다의 다문화주의를 향한 간단없는 노력과 투자, 국민들의 의식을 내가 본 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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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는 피의 산물인가

이민자들이 함께 뒤섞여 사는 서구의 어느 사회보다 캐나다는 아주 보기 드물게 모범적인 다문화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 비율을 가지고 있는 두 나라 가운데 캐나다를 '인종의 모자이크'로, 미국을 '인종의 도가니'(melting pot)라고 흔히 표현한다. 그러나 미국의 문화를 인종 간의 차이가 다 녹아져 있는 문화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데, 미국 사회는 백인들이 장악한 사회정책으로 백인 주류의 일관되고 조용한 흐름을 지키고 있는 사회일 뿐이다.

그에 비해 캐나다는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아온 역사와 함께 인종주의의 문제가 가장 이슈화된 국가이다. '다문화주의'는, 1971년 트뤼도 수상 시에 국시로 정해놓았을 만큼 캐나다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캐나다가 다인종국가가 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이상적이면서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역사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캐나다 안의 프랑스'인 퀘벡과의 오랜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이민자에 의해 형성된 퀘벡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캐나다인들과 이질감도 크지만, 유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 없이도 독립 경제가 가능할 정도로 부유하기도 하고 또한 문화적인 이유로도 그 안에는 분리주의자들이 존재해 왔다.

이 프랑스로의 분리 열풍은 1967년 드골이 퀘벡에 와서 했던 호전적인 연설로 인해 불붙여졌는데 그 당시 그런 퀘벡인들을 보는 캐나다인들의 분노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재까지도 프랑스는 퀘벡 주 출신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에게 아파트와 연금을 제공하면서 프랑스에서 살기를 부추기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아테네 올림픽의 캐나다 국기 봉송자인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에게 프랑스는 상당한 제안을 했지만 그가 'No' 했던 사실도 있었다.

작년 10월, 폴 마틴 캐나다 수상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방송국 앵커가 체첸의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의 베슬란(Beslan)에서 어린이들까지 포함하여 300명 넘게 학살한 사건을 들어, "퀘벡이 그렇게 분리하려고 하는데도 왜 캐나다에는 테러조직이 없는가"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했으리만큼 퀘벡의 분리주의 운동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가 다른 주변 연방들에 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문화적인 탄압과 인권유린 같은 사건과 쟁점들이 퀘벡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퀘벡의 프랑스인들의 독립의지는 상당히 집요하고 강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을 목표로 하는 테러조직이 없지도 않았던 것으로, 1970년에 퀘벡의 테러조직인 '퀘벡독립전선'(FLQ)이 영국의 무역부 장관과 퀘벡의 노동부 장관을 납치해 결국 영국 장관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수상이었던 트뤼도로 하여금 몬트리올까지 군대를 보내 500명의 프랑스인들을 체포하게 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는데, 퀘벡의 프랑스인들은 틈만 나면 퀘벡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1980년과 1995년에는 주민투표까지 행했지만 결과는 두 번 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분리를 원치 않는 주민의 숫자가 많아 그럭저럭 지나오고 있는 것이다. 1990년에도 몬트리올에 수십만 명의 퀘벡인들이 모여 퀘벡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종 분리주의가 나라의 중요한 의제가 되어 왔다.

캐나다가 유독 다문화주의를 숭상하는 국가가 된 것은 퀘벡의 프랑스인들과의 끈질긴 싸움에서 흘린 피의 결과라고 나는 본다. 트뤼도 수상이 죽자 사자 분리를 외치는 퀘벡의 프랑스인들의 권리와 프랑스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국가의 질서를 세우고 안녕을 확보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는 최후의 타협으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국시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원주민인 인디언과 이뉴이트, 독일 이주민, 이탈리아 이주민 등 이민자들의 문화를 장려하고 그들이 받는 불이익이나 언어 장벽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살리고 인정받기 위한 기본 조건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정신문화적인 힘과 함께 경제적 힘이라는 것을 다시 본다. 인간이 추구하는 상호호혜와 인류애적인 정신들은 그러한 힘의 비축이 없이는 관념에 불과하게 되거나 또 다른 사조나 패권주의의 무력경쟁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력해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 캐나다의 큰 사회 정치적 이슈 가운데 하나인 다문화주의와 반인종주의는 그 사회 유지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다문화주의의 정착과정은 캐나다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백인들의 관점도 많이 교정시켰음에 분명하다. "우리 역시 이민자다. 이 땅에 이민자 아닌 사람은 이뉴이트와 인디언들밖에 없다"라는 말을 그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안에 인종주의자들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리비아 출신의 회교도와 결혼한 내가 아는 한 백인 여성은, 어느 하루 회교도 복장으로 길을 가다 "여기서 꺼져!"하는 동족 젊은이들의 야유를 들었다. 그녀는 몹시 분개하며 쫒아가, "네 부모도 이민자야!"라는 소리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편, 이것은 토론토라는 거대한 이민자 도시 안에서 함께 사는 백인들에게 한정된 정서일지 모르며, 이 모든 정서들이 합하여 토론토라는 거대한 다문화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내 동생이 사는 시골 마을의 백인들은 세상에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이해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부부를 식품점에서 발견하면 저들은 무얼 먹고 사나 호기심에 가득 차 은근히 쇼핑 수레를 넘겨다보기도 했다.

다문화주의 구현을 위한 비용

토론토는 다문화적 사회의 구현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많은 비용이 드는가 하는 실험장이기도 하다. 그들이 들이는 사회적 비용은 보통 다른 나라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토론토는 '응급상황신고 번호'(911)의 수신을 한국어를 비롯하여 세계 100여개국의 언어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작년 9월에 갖추었다.

집에 놀러온 이웃집 아이가 풀장에 빠진 것을 신고한 한국 할머니는 영어로 어떻게 말할 수가 없었다. 구조가 늦어 결국 한 아이의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은 이렇게 사회의 기본을 구축하는 하나의 초석이 된 것이다.

토론토는 학교 안에서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학생의 비율이 50%가 넘고, 모든 직장마다 이민자들이 넘치고, 거기에 교육위원과 시의원들, 또 공무원들이 이민자이거나 그 후예들이다. 이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아무리 영어를 잘 해도 그들의 피부색과 얼굴형, 눈동자는 그들을 소위 백인 사회와 늘 구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종주의는 인생의 가장 큰 화두다.

그들이 교육을 받고 어느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들은 무엇보다 인종문제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젠가, 남편이 "학교에서 찾아보는 사회학 서적이나 논문들은 인종주의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다"라고 하는 말에서, 캐나다가 인종과 인권 문제에 관한 연구들이 가장 앞서 있다는 말이 다시 확인되었다.

토론토 교육위원회는 2004년 11월, 인종에 근거한 모든 통계를 수집하기로 결정했다. 토론토 교육위원회는 '온타리오 인권위원회'와 함께 성, 인종, 민족, 모국어, 수입, 그리고 거주지역 등이 학생의 학업 성취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모든 예산을 지원하기로 승인했다. 이 쟁점은 1, 2년 사이의 요구가 아니고 '물경 30년 동안이나 교육위원회의 테이블 위해 놓여졌던 코끼리'로, 이들은 '이 코끼리가 날뛰도록 내몰지 않고 그것을 타기로' 그제야 결정을 한 것이다.

"인종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말하고 안 하고 싶고를 떠나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다섯 시간이라는 긴 논쟁 끝에 11 대 10으로 가결한 이 정책에 대해 교육위원회 대변인이 한 말이다. 그 토론에는, "그 통계조사의 목적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알고 싶은 것이라면, 그 조사에 인종 관계뿐만이 아니라 뚱뚱한지, 개구장이인지, 못생겼는지, 괴짜인지, 유태인인지, 무슬림인지, 종교적 근본주의자인지, 아니면 터번을 두르고 다니는 시크교도인지도 함께 포함시켜야 된다"고 우긴 위원이 있었다. 학교에서 내내 눈이 작은 것을 가지고 놀림을 당했고 지금까지도 무시하는 말을 듣는다는 일본인 여성위원이었는데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캐나다의 인권상

또 작년 8월에는 한 여배우가 예술가 협회에서 주는 인권상을 받았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예술가 협회가 이런 일도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얼마 뒤 10월에는 '인종관계 도시동맹'(Urban Alliance on Race Relation)이라는 단체가 올해의 인권상 시상식을 했다.

토론토 안에 항구적이고 건강한 다인종적, 다윤리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도시동맹'으로부터 올해의 인권상을 받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이들이 수상 소감으로 한 말은, 인종주의라는 장벽은 아무리 캐나다 토론토라고 해도 앞으로도 단시간에 혹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당신들 개개인 모두는 우리 사회의 활력과, 다양화 작업과 관련한 초기의 경험을 만드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다. 만약 미디어가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주저하지 말고 그들에게 알려주어라. 침묵하기에는 그 손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캐나다 진보적 일간지 <토론토 스타>의 전 발행인 존 혼더리치)

"평등을 위한 투쟁은 단거리 시합이 아니다. 이는 마라톤 경주와 같다. 우리 인종은 하나이기 때문에 인종주의는 극복될 수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나는 우리가 일층 진보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인종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일하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하나의 인종으로 이 지구를 함께 나누어 산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다." (인권 변호사 줄리안 팔코너)


또한, 캐나다의 신문들에는 빠짐없이 인종 문제에 대한 사건들, 칼럼,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큰 비중으로 실리는데, 심지어는 80년 전에 있었던 그리스인 식당의 폭행 사건을 구구절절 밝혀놓고,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언제 또 다시 일어날지 모르니까"라고 결론을 맺은 글도 있다.

이 모두를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인종문제에 민감하며 책임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많은 이민자들을 흡수하면서도 인종문제를 거의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영국 안의 소수 민족들의 억울함과 분노와 희생이 그 사회의 인종주의의 빗장을 여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우리나라에서 고생하고 차별 당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눈물과 하소연이 우리 사회의 인종편견과 무관심을 무너뜨리는 큰 촉매제가 되리라고 믿으며 글을 맺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북지역 인터넷 뉴스인 '참소리'(cham-sori)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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