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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60주년 기념으로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기획연재로 조명해본다. 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특히 강만길 교수의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에 1930년대 전반기에 김일성 주석의 주요한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소왕청유격근거지를 찾아가 보았다.

여기의 날짜와 수치들 그리고 내용들은 모두 중국 연변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리광인 선생과 길림성 왕청현 당안국 역사연구소 최금철 소장의 진술, 그리고 연변항일렬사전 '장백의 투사들'이란 책의 내용에 기초한 것이다. 북한의 주장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n글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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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육문중학교 도서관은 김일성 주석 기념관

▲ 뾰족산, 소왕청 유격근거지 최전방 초소
ⓒ 이창기
아 뾰족산!

차를 소왕청 골짜기로 들어가다 보니 그 유명한 뾰족산이 당당한 모습으로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이 거의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유난히 뾰족해 보였다.

최금철 소장은 저 뾰족산 정상에 망루가 있어 일본 토벌대가 쳐들어오면 산 아래 초소 통신원들이 말을 타고 근거지로 달려가서 알렸다고 한다. 정 급할 경우에는 총을 쏘아서 직접 알렸다.

소규모의 토벌은 이 뾰족산 최전방 초소에서 적들을 물리쳤고 대규모 토벌시에는 골 안으로 적을 계속 유인하여 매복습격전으로 일제에게 무리주검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뾰족산에는 돌무더기를 모아놓고 아름드리 통나무도 찍어두었다가 토벌대가 지나가면 소년단 아이들도 나서서 돌을 굴리고 통나무를 굴려 적을 살상하고 기마대와 군용트럭에 타격을 입혔다.

"뾰족산 방향과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토벌대가 치고 들어오자 저기 산 너머에서 김일성 장군이 그 유명한 개싸움을 붙였지. 저쪽에서 일본 놈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뾰족산의 적을 끌고 가서 저쪽의 적들에게 총을 쏘고 그리고 끌고 간 적들에게도 총을 쏘고는 슬쩍 옆으로 빠졌어.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개싸움이 났어."

이렇게 통쾌한 전투일화를 소개한 최금철 소장은 유격대는 일제 토벌대에게 정치공세도 주동적으로 들이대었다고 말했다.

"소왕청 골짜기 들어가는 어귀의 나무나 돌 밑에 숱한 삐라를 뿌렸지. '너희들의 어머니와 너희들의 아내, 자식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파쇼는 꼭 망하고 말 것이니 이 비정의적인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 그러니 일본군이 군심이 동요, 삐라 주워보느라고 싸움을 제대로 안 한다 말이에요."

결국, 이다가끼쇼(중국식으로 이텐소지)라는 일본 군수대 운전병이 10만발의 탄약이 든 트럭을 끌고 소왕청 유격근거지 주변에 와서 글쪽지를 써놓고 자결하는 일이 발생했다.

"왕청현 유격대 동무들, 나는 일본 어느 부대의 공산당 당원인데 나는 이 파쇼전쟁을 반대한다. 나는 애타게 당신들을 찾았는데 찾지 못해서 여기 10만발의 탄알을 어느 수림에 숨겨놓았으니 일제에 대해서 사격하라!"

중국 정부는 이 국제주의 전사 이다가끼쇼를 추모하는 마음에 동림촌에 있는 소학교의 이름을 '이다' 소학교로 개칭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물에 잠겨서 그 소학교가 사라졌다. 일본 공산당은 이다가끼쇼의 기념비가 있는 숲에 와서 매년 추모를 한다. 물론 일본 시민들은 이다가끼쇼를 역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최금철 소장의 근거지 사수 투쟁 설명은 끝이 없다.

"얻어맞고 나가고 얻어맞고 나가고 하니 이번에는 큰 결심을 하고 내려가지 않았다.(1934년초의 토벌) 3광 정책(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들어가서 밤에는 마을에서 자고 낮에는 토벌을 했다.

그러면 밤에 토벌대 숙영지 근처에서 소년단과 부녀대원들이 와서 꽹과리 치고 총을 쏘고 잠을 못 자게 했다. 그렇게 지친 일본 토벌대를 아름드리나무에 숨어 있다가 습격했다. 포수대 명중률이 높은 사람들을 모아서 권총을 차고 있거나 일본도를 지니고 있는 지휘관들만 저격했다.

눈이 허리까지 왔다. 사람들 기척만 나면 여기 사람들 빨갱이라고 무조건 기관총을 죽였다. 여기서 부녀들이 은폐한 군중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다. 울면 토벌대에 은신처가 탄로 나니 아이를 젖에 물려서 꽉 누르고 있으니 질식해 죽었다. 소비에트 부위원장 리만섭 부인도 그렇게 아이를 죽였다. 그가 그런 아이들이 서넛 된다고 했다.

유격대 군중은 모두 혁명군중이었다. 일본토벌대는 하나 만나면 하나 죽이고 둘 만나면 둘을 죽였다. 일제 비행기까지 떠서 유격근거지 사람을 찾았다.

김일성 장군은 이 초토화 작전을 물리치기 위해 유격대 배후를 쳤다고 한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내려가서 왕청 시내를 쳤다. 그래도 얼마나 작심을 했던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유격대는 이 전투에서 1500여명 토벌대 중에 사흘간에 400여명 소멸해 버린 적도 있다. 전체적으로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골 안에서 일본 군경, 위만 경찰, 자위대 800명 좌우를 살상한 것으로 조사 되고 있다."


1934년 결국 일제는 심각한 희생을 치르고 소왕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유격근거지도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렇게 해서 소왕청 유격근거지의 사람들은 요영구, 대황리 두 유격근거지로 옮겨갔다.

1936년 이후에는 일제의 무력이 간도지역에 집중되고 토벌 역량이 대대적으로 강화되어 근거지를 더는 유지할 수 없어지자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반일유격대는 더욱 광활한 지대로 진출하여 영활한 군사정치 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미 유격대 사수 투쟁을 통해 유격전법을 터득했고 많은 군인들을 키웠으며 주민들도 결속시켰기 때문에 더 큰 대부대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김일성 부대는 장백산 줄기를 타고 백두산으로 넘나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금철 소장은 소왕청 유격근거지는 폐쇄되었지만 김일성 장군의 소부대는 계속 왕청지역에 나타나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1940년대 소련으로 들어갔을 때도 김일과 같은 부하를 파견하여 이런 지역에서 계속 군중사업을 전개하고 전화선을 끊거나 철도. 교량을 폭파하거나 과 일제에 대한 습격을 진행했다고 한다. 김일성 장군도 병든 중국의 동지 위증민을 찾으러 이쪽으로 직접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뾰족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 동림촌과 하마촌인데 왕청의 상수도를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드는 바람에 다 잠겨버리고 마을의 흔적인 봄꽃만 만발해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마촌 마을이 나왔다. 골짜기치고는 꽤 넓은 평지에 밭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에 학교도 있었고 주민들의 보금자리인 귀틀집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일제가 토벌하러 와서 집을 불태우면 다시 짓고 다시 짓고 하면서 기어이 이 근거지를 사수했던 곳이다.

김노인의 정성

그곳에서 골짜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가 아주 큰 버드나무 아래 서 있었다.

▲ 소왕청 유격근거지 기념비의 설명글
ⓒ 이창기
그러나 이 기념비가 있는 버드나무 아래에서는 비감한 민생단 사건도 일어났었다고 한다. 죄도 없이 민생단(일종의 일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 자리에서 14명이 군중재판에 회부되어 13인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양성룡 한 사람은 유격대들이 극구 반대해서 못 죽였다. 후에 그는 이신작칙하고 식량공작을 나갔다가 추격대와의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희생되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민생단일 수 있는가!

전반적으로 민생단으로 2000여명이 하나같이 끌끌한 간부급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죽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 무고한 조선족동포 13인에게 민생단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던 버드나무와 비감에 젖은 조선족 역사학자들
ⓒ 이창기
민생단 누명을 쓴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조선사람이었다.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조선 사람들이 이런 차별을 받았으니 나라 잃은 것도 서러운데 당시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의 가슴이 오죽이나 아팠을지…. 저 버드나무는 모든 것을 다 보았을 터인데 비정하게도 아무런 말이 없다.

▲ 동만특위 소재지 표식판
ⓒ 이창기
조금 더 골 안으로 올라가니 골 오른쪽으로 병기창 기념비가 있고 왼쪽으로 400미터 정도 산기슭 위에 동만특위 소재지 표식비가 서 있었다. 아직도 주춧돌이 남아 있고 땅을 다지면서 박아 넣은 돌축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최금철 소장은 이 동만특위 소재지에 유격대 사령부도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골짜기를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 편에 김노인이라는 동림촌 노인회장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촌 노인회 등 여러 노인들을 추동하여 성 민정청에 가서 중국돈 3만원 얻어 와 '반일유격대유적지'라고 세운 비석이 있다. 최금철 소장은 이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주었다.

▲ 김노인이 세운 반일유격대사령부 기념비
ⓒ 이창기
"북조선 경제무역단이 왕청에 왔을 때 우리가 데리고 가 구경했지, 그러자 그들이 돌아가서 '수령님, 노인회에서 유격대 사령부자리에다가 유적지를 세웠습니다.' 그러니 김일성 주석이 딱 만나보고 싶다고 했지.

김일성 주석이 초청해서 그 김로인이 북조선에서 갔다 왔는데 어느 정도로 대접을 받았는가 하면 나라의 수뇌자와 만났다. 김일성 주석과 단독으로 술을 탁 먹는데 사진 다 찍고, 김일성 주석 앞에서 그 영감 노래하는 거, '만주벌판 강산에 일제의 발톱아래 우리민족 거리 바닥에 시체가 널렸네' 뭐 이런 노래 불렀지, 그 로인이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여간 김일성 주석이 너무 기뻐서 박수치면서 '야 이 노래 다시 듣는구나.'

그러구 조선 인민군 중장이 이 노인을 거느리고 북한 좋은 곳이란 좋은 곳은 서해갑문이요, 판문점, 금강산 다 가봤다 이거에요. 사진 몽땅 있어요. 김일성 주석과 같이 찍은 이만이 큰 사진 이런 거 집에다 쭉 걸어놨어.

강성산 총리도 왔다 갔어. 이 반일유격대 기념비가 있는 이곳에 와서 딱 이것만 보고 김로인 집에서 하룻밤 와서 자고 갔어. 갈 때도 '주머니에 넣은 돈이 많지 않다.' 1000불 주면서 이 돈으로 동네 로인들도 모셔서 술도 마시고 어떻게 하라고 하면서 아주 수령님이 옛날에 혁명하던 지역에 이렇게 유적지를 만들어 놓으니까. 대단히 감사하다."


즉 김노인이 용감하게 반일유격대기념비를 세워 북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념비에 김일성 장군이라는 이름도 없는데 왜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까.

최금철 소장은 "실제 요 자리는 항일유격대 병원 자리야, 그런데 저 비석 글에는 반일유격대라고 썼어에, 조선에서는 반일유격대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항일유격대라고 하지, 그러니 이 위치가 순전히 조선에 대해서 한 게지"라고 지적하고 (중국) 역사연구소에서는 저 기념비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에는 '반일유격대'가 김일성 장군이 지도했던 유격대 이름이고(이후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나 동북항일연군이라고 썼다) 중국의 유격대는 '항일유격대'라고 썼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반일유격대사령부' 자리라고까지 떡 써 붙였으니 이만저만 용감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김일성 장군 사령부 자리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 조직체계를 따진다면 김일성 장군은 동만특위 소속의 한 참모장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전투를 다 지휘하고 동만특위의 동장영 서기보다도 주민들에게 훨씬 더 영웅시 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지만 그들은 중국 공산당 체계 안에 있는 중국의 역사학자인 것이다. 따라서 반일유격대사령부라는 기념비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다.

위치상으로는 동만특위 사무실은 골짜기에서도 산중턱으로 400여m나 더 올라가서 있기 때문에 안전하기는 하지만 대민 사업을 하기에는 들락거리기가 여간 불편해보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김일성 장군이 주민들과 접촉하기를 좋아했다면 골짜기 중간인 이 자리에서 일을 보았다는 것이 더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김일성 장군이 동만특위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민생단 사건을 일으켜 자신의 끌끌한 대원들인 조선 사람들을 수많이 죽인 동만특위 사무실에서 계속 집무를 보기가 껄끄러웠을 수도 있어보였다. 따라서 어느 자리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동만특위 사무실에서 일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김노인이 추리한 장소가 어쩌면 김일성 주석이 집무를 보았던 곳일 수도 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해 보였다.

▲ 김노인이 처음 세운 김일성 장군 기념비. 이것이 쓰러지자 더 큰 기념비를 세웠다.
ⓒ 이창기
김노인이 사령부 자리라고 했던 곳 바로 옆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우물이 지금도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살펴보았더니 우물의 썩은 나무 테두리를 갈아 준 흔적이 있었다. 또 시간이 흘러 처음에 세운 기념비가 쓰러지자 김노인은 더 큰 돌로 기념비를 다시 튼튼하게 세운 흔적도 있었다. 이것은 김노인과 같은 사람들이 와서 이 사령부 유적지를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김노인과 같이 과거 유격대시절에 활동을 한 노인회 사람들은 김일성 장군에 대한 남다른 흠모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해 보인다.

동일촌과 달리 동림촌과 하마촌은 뾰족산 바로 아래에 있는 왕청유격근거지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다. 따라서 동림촌과 마촌 마을의 노인들은 김일성 장군의 전투를 자주 목격하였을 것이며 그 명성도 남달리 많이 들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동림촌이 수원지 조성으로 물에 잠겨버렸다는 것이다. 김노인이 현재 어디로 이사 갔는지 최금철 소장도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역사의 산 목격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거나 흩어지고 있다. 남한의 역사학자들과 진실을 찾아야 할 기자들의 역할이 더욱 절실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의외였던 것은 북한에서도 두어 차례 항일무장투쟁 답사단을 중국에 보내기는 했지만 국제관계상 껄끄러운 것이 있는지 북의 기자들과 역사학자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 기념탑도 겨우 세웠다고 들었다. 중국정부의 견제로 그런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취재는 아직 전면적으로 보장되고 있으니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자주민보와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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