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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천가 남산 기슭에 높이 솟은 의병탑
ⓒ 정근영
고향을 오고 갈 적에 반드시 그 앞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의 사당이 있다. 의령천가로 난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의병교 다리를 건너 남산 기슭 푸른 숲 속에 높이 솟은 의병탑이 눈길을 끈다. 물론 충익사는 몇 차례 들리기는 했지만 기록으로 남긴 것은 없다.

고향으로 갈 적에는 갈 적대로 고향집으로 빨리 갈 욕심으로 또 돌아올 적에는 조금이라도 여기서 지체하면 남해 고속도로가 꽉 막히고 말 것 같은 두려움에 눈길만 주고 지나친 길이다. 늘 이렇게 눈길만 스치고 지나는 것이 조일전쟁의 위기에서 고향과 나라를 지켜낸 의병용사들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돌아오는 길에 오늘은 시간을 내서 잠깐 들리기로 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어 좀은 시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삼복의 찌는 더위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차에서 내려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데 벌써 땀방울이 솟고 온몸이 젖는다.

▲ 충익사 정문인 충의문
ⓒ 정근영
의병탑,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동그라미(고리) 열여덟개를 평면으로 눕혀서 18층으로 차곡차곡 쌓은 탑이다. 동그라미(고리)는 의병장 곽재우와 그 휘하의 열여덟 장수들이다. 그 밑에 이름없는 의병들은 그 얼마나 될 것인가. 농사를 짓던 농사꾼들이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마음이 되어 조국을 지켜냈다.

의병탑 앞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붕괴 위험이 있으니 의병탑 옆이나 뒤쪽으로는 가지 말라는 글이다. 바위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면 근본적인 조처를 취해서 참배객은 물론이고 의병탑을 보호해야 할 것이지 않는가. 언제일지 모르는 붕괴의 그날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곽재우 장군은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전장에 나가서 홍의장군으로 불린다. 그는 1552년 명종 7년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서 정시에 2등으로 합격했지만 왕의 시정을 비판한 논지로 뒤늦게 파방이 되었다고 한다. 단성소로 왕의 비위를 뒤틀리게 한 남명의 제자답다. 곽재우는 남명의 손녀사위였으니 어련했으랴. 그는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무술을 단련했던 것이다.

1592년 선조 25년 4월 13일 왜병이 이 나라를 침략하자 나라를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곽재우 장군은 4월 22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한다. 정인홍은 성주에, 김면은 거창에 곽재우는 의령에 거점을 확보하고 주변 고을을 지켰다.

의병대장은 대개 자신의 재산을 털어 부대를 운영했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곽재우 장군은 내로라하는 부자였다고는 하지만 군사비용을 충당하기에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병부대는 군량미와 무기가 달리자 무력으로 토호 양반들의 창고를 헐어 군량비를 확보했다. 재산을 빼앗긴 토호들은 의병을 도둑으로 몰았으나 이들은 “나라가 있어야 너희들도 살아남는다”는 명분으로 이를 억눌렀다.

붉은 옷에 백마를 탄 홍의장군 곽재우는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기강,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진주성, 화왕산성 등의 전투에서 신출귀몰하는 용맹으로 백전백승하여 왜병의 전라도 진출을 막아 냈다고 한다.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성주목사, 진주목사, 경상도 우방어사 등을 지냈다고 하니 이때부터는 의병이 아니라 관군이 아닌가. 또 전란 이후에는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 우․좌윤, 함경도,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죽은 뒤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같은 스승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정인홍은 인조반정으로 역적으로 몰린데 견주어 본다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 18의병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 사당
ⓒ 정근영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을 헤치고 충의문을 들어서니 푸른 잔디밭이 싱그럽다. 발갛게 피어난 백일홍(나무)며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아름답다. 연못가에 부모님 손잡고 놀러온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나라를 지킨 선조들의 나라 사랑의 정신을 체험하게 하는 것은 교육상 좋은 일이지 않을까.

곽재우 장군의 사당 충익사는 1978년 정부에서 세웠다. 1972년 이후 의병을 처음 조직한 4월 22일 추모 행사를 하고 있던 것을 충익사에서 계승하였다.

▲ 의령군의 어느 마을의 당산나무를 옮겨 심은 모과나무, 울퉁불퉁 솟은 나무 등걸에서 신비를 느낀다.
ⓒ 정근영

▲ 충익사의 연못, 하늘로 치솟는 분수가 무더위를 식혀준다.
ⓒ 정근영
이곳 충의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 충의각이다. 1978년 충익사가 세워지기 전 의병탑과 함께 먼저 충의각을 만든 것 같다. 아름다운 꽃상여로 의병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집이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쓴 충의각 현판이 눈에 거슬린다.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충의각 안에는 의병 장수 18명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충익사 사당에 모신 분들이다. 그 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불교에서는 제례시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봉청이라고 하든가.
의병장 곽재우, 영장 윤탁, 도총 박사제, 수병장 오운, 이운장, 배맹신, 심대승, 독후장 정연, 돌격장 권란, 조군 정질, 전군 허연심, 전향 노순 치병 강언룡, 군기 허자대, 기찰 심기일, 복병 안기종, 군관 조사남, 주몽룡 등이다. 삼가 머리 숙여 예를 올린다.

▲ 충의각, 전 국무총리 김종필의 글씨다. 서예가가 쓴 현판엔 쓴 사람의 이름을 적지 않았는데 권력자는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한 듯 낙관을 해 놓았다.
ⓒ 정근영

▲ 충의각 안에 붙여 놓은 18 의병장의 이름
ⓒ 정근영

▲ 충익사 기념관. 곽재우 장군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 정근영
기념관안으로 들어서니 붉은 옷에 백마를 탄 곽재우 장군의 용맹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밖에 의병 창의도, 정암진 승전도,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 대치도 등 각종 전투의 장면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기념관에 보관한 충익공 유물은 보물 67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장검, 마구(안장), 포도연(돌벼루), 화초문 백자 대접(그릇), 갓끈 4종 323련, 사자철인 등이다. 그밖에도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유물로는 망우당 문집(창의록 및 목판)이 있다.

충익공의 묘소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신당에 있다. 의령에서 태어나 의령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한 충익공의 묘소가 어떻게 대구에 자리잡게 된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또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구례에 예연서원이 있는데 이는 1675년 우의정 허목의 계청에 따라 1677년 숙종대왕이 제문과 함께 예연서원이라 사액한 것이다. 이 서원은 본래는 충익공이 돌아가신 뒤 광해 임금 10년에 사림들이 충현사란 사당을 세운 것인데 그 뒤 서원으로 개창한 것이다.

▲ 의령천 남산 기슭의 근린 생활공원, 볼거리, 쉴거리를 주고 있다.
ⓒ 정근영
충익사 옆 의령천 강가에 지금 새로운 명물이 들어서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출렁다리다. 아직 완공이 되지는 않았지만 시험적으로 공개를 하고 있다. 다리 밑바닥을 철망으로 만들어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강물이 흘러가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머리가 어지럽다. 혼례청에 선 새색시 마냥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놓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의령천 위의 출렁다리. 녹색부문은 철망이다. 다리 밑으로 강물이 흐르고 있다.
ⓒ 정근영

덧붙이는 글 | 8월 6일, 고향집에 갔다오다가 의령을 지나면서 충익사 사당에 들렸습니다. 충익사는 임진년에 일어난 조일전쟁 때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과 17 의병장을 모신 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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