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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시해 주모자중 한 사람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씨.
ⓒ 심규상
"시해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얼마 전 고종의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 범죄자의 후손이 명성황후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 홍릉을 찾아 사죄의 절을 올린 바 있다. 시해사건 후 110년만의 일이었다.

가와노 다쓰미(84. 일 구마모토현 거주)씨. 지난 16일 그를 일본 현지에서 만나 명성황후 묘소 참배이후의 심경을 들어보았다.

가와노씨는 "참배를 다녀온 후 일본인들로부터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비난받을 것을 감수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좋은 일을 했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공모하고 사건 당일 직접 왕궁을 쳐들어간 구니토모 시게아키(1861-1909)의 외손자인 그는 "어머니와 자료를 통해 할아버지가 시해사건의 주모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수많은 자료를 제시하며 외조부의 죄상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외조부인 구니토모는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인 아다치 겐조(구마모모토현 출신)가 불러 한국으로 건너왔고 한성신보사 주필을 맡았다. <한성신보>는 일 공사관의 기관지적 성격의 신문이었다. 구니토모는 어느 날 아다치와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를 만나 명성황후 시해를 위한 일명 '특별부대' 조직을 지시받고 구마모토현 출신의 거류민 20여명을 불러 모았다.

또 시해 당일에는 '특별부대원' 들을 끌고 왕궁으로 직접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아무도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며 "궁녀 10여명이 한 사람을 에워싸 그가 명성황후인 것으로 추정, 일행들이 칼로 찌른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대로라면 여러 설 중 명성황후 및 궁녀를 처음 살해한 사람들은 구니토모 등 낭인들로 구성된 일종의 '특수부대' 소속이었고 이후 일본인 군인들이 들이닥친 것이 된다. 실제 시해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된 일본인 낭인 37명 중 구마모토현 출신이 21명에 달한다.

그는 시해사건의 배후와 미우라 공사의 조종자로 '삿사 도모후사'를 지목하기도 했다. 삿사 도모후사는 구마모토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단체인 '국권당' 수령으로 미우라 공사의 전임인 이노우에 공사와 의논해 <한성신보>를 창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가와노씨는 경성대 의과대에 시험을 친 후 면접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큰 죄를 지어 이를 속죄하며 살기 위해 한국의 대학에 지원했다’고 말했다가 떨어진 바 있다고 밝혔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일본정부가 사죄해야 하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시해 주모자의 손자이기에 그동안 한국은 갈 수 없었다"는 그는 "한국인들이 허락해 준다면 이제 자주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공모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구니토모 시게아키(오른쪽)
ⓒ 심규상
다음은 가와노가 운영하는 현지 병원에서 가진 인터뷰 주요 요지.

-외조부인 구니토모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나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나머지는 관련 자료를 통해 알게 됐다.”

-외조부는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
“한국에 가기 전에는 <일본신문>기자였다. 그러다 한성신보사 사장으로 있던 같은 고향 출신인 '아다치 겐조'가 불러 한국에 갔다. 결혼 후로 33세 또는 34세 때로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한성신보> 주필을 맡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외조부는 어떤 일을 했나
“할아버지와 아다치 겐조가 미우라 공사에게 불러갔다. 미우라가 일반 일본군 병졸로는 왕비를 찾기 힘들다며 일정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 일종의 '특별부대'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미우라는 할아버지와 아다치에게 ‘몇 명을 모을 수 있느냐’ 물었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아다치의 고향인 구마모토 출신의 믿을 만한 거류민 20여명을 모아 일종의 '특별부대'를 꾸렸다.”

-공모 과정에 가담한 또 다른 사람은 없나
“있다. 삿사 도모후사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아다치 겐조의 사부였다. 할아버지와는 친척 관계였다. 삿사 도모후사가 미우라공사를 배후 조종하고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배후 중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외조부가 시해사건 당일 한 일은 뭔가
“나의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편성된 '특별부대'를 끌고 직접 명성황후를 시해하러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궁궐에는 왕비와 비슷한 궁녀들이 10여명 정도 있었다. 궁녀들이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둘러쌌다. 일행들이 그 중 가운데 있는 사람을 왕비로 추정하고 두 세명을 끌어내 칼로 찔렀다.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 진실인지는 모른다.”

-외조부는 누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는지 알고 있었나
“누가 명성황후를 찔렀는지는 모른다고 들었다. 실제 누가 누구를 찔렀는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명성황후의 (얼굴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사건 당일 편지를 통해 '내가 죽인 사람이 왕비인 것 같다'고 다른 사람에게 밝힌 사람(데라자키 야스키치)이 있지만 진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명성황후 시신을 불태우고 연못에 던진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마 그 같은 짓은 일본군 병사들이 했을 것이다.”

-외조부가 명성황후와 관련한 유품은 남기지 않았나
“가지고 있었다. 열쇠 꾸러미가 붙은 향 주머니 같은 것이였다.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내가 직접 소학교 때 가지고 놀았는데 어머니에게서 명성황후의 것이라고 들었다. 본 집에 있었는데 전쟁시기에 전사한 가문을 이을 종가집에 줬다. 그 후로 이 주머니의 행방은 모른다.”

-시해사건 가담 후 재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실제 명성황후를 죽인) 범인을 알 수 없다’며 ‘하지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말했다. 당시 재판에서 이처럼 죄를 인정한 사람은 할아버지를 비롯 모두 11명 이었다. 반면 일본을 위해 한일이니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나중에 사건에 가담했던 조선사람들 중 범인이 나왔다며 히로시마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외조부는 무죄판결 후 어떤 일을 했나
“동아동문회조선부 간사 등을 역임했다. 좋은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혼했다. 또 돈이 없어 조상을 모시지 못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했다. 돌아가실 때 입는 옷조차 없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정치인과 기자는 절대 하지 말고 사람을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라고 했다. 실제 어머니도 의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 영향으로 나도 의사가 됐다.”

▲ 가와노가 어머니로 부터 명성황후의 것이라고 들었다는 열쇠꾸러미가 달린 향주머니.사진은 가와노씨가 잃어버린 후 구입한 모조품
ⓒ 심규상
-외조부에 대한 기억은
“한국을 좋아했던 것으로 안다. 일본이 간도를 중국에 넘길 때 길림성 너머까지 간도는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할아버지 생각은 잘 모르겠다. 사건 후 할머니와 이혼했기 때문이다. 다만 재판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죄를 인정했지만 자랑스러워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로부터도 할아버지가 '할 수 없이 했던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

-명성황후 묘소를 찾아 사죄의 뜻을 밝혔는데 어떤 취지인가.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같이 가지고 했지만 못간다고 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한국 사람들에게 크게 나쁜 일을 했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고 했다. 참여하고 있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사람들이 ‘한국인들은 마음이 좁지 않다’고 설득해 용기를 내 가게 됐다.”

-한국은 이번이 첫 방문이었나.
“아니다. 두 번 째다. 학생시절 경성대 의과대에 시험을 쳤다. 면접때 '할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해 큰 죄를 지어 이를 속죄하며 살기 위해 한국의 대학에 지원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떨어졌다. 그 때 처음 한국에 갔다. 그 뒤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

- 왜 그동안 한국에 가지 않았나.
“중국에는 갔지만 한국은 갈 수 없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장본인의 손자이기 때문이었다. 내 할아버지가 주모자 중 한 사람인 것이 틀림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었겠나. 하지만 한국인들만 허용한다면 이제는 자주 가보고 싶다.”

-명성황후 묘소에 참배할 당시 마음은 어떠 했나.
“그저 눈물만 쏟아져 나왔다. 나도 같이 간 일행도 울고 또 울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사죄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적인 사죄로 그칠 일이 아닌 만큼 사정이 있겠지만 정부가 나서 사죄해야 한다고 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도 일본교과서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서적’에서 만든 교과서에 유일하게 기술돼 있었는데 우경화 과정에서 삭제됐다.”

-참배를 다녀온 후 일본내에서 반응은 어떠했나.
“비난 받을 것이라 각오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일 했다고 평가했다. 아무도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익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시해사건에 가담한 다른 후손들을 만나 본적 있나.
"오랫동안 만나고 있는 후손들이 있다. 삿사 도모후사의 부인과도 만난 적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명성황후 얘기를 하면 참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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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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