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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기사 박기서씨
ⓒ 박도
"우리 나라 독립의 화신이요, 국부(國父)이신 백범 선생을 시해한 그 자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다시는 이 땅의 교육이 안 되지요. 후손을 볼 낯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무렵 저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단죄하였습니다."

백범 선생 56돌 기일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월 17일 오후 2시,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나무 그늘 의자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56·택시기사)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박기서씨는 지난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몽둥이로 절명시켰다.

백범 묘소, 여기만 오면 아주 편해요

▲ 백범 김구 선생 존영
ⓒ 백범기념관
기자는 올 봄 조문기 선생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씨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에게 안두희의 이 세상 마지막 모습과 그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 면담을 부탁드렸는데 박기서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서로 사는 곳이 멀고, 그는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어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 선생의 기일을 넘길 수 없어서 6월 17일로 어렵게 날짜를 잡았다. 우리는 효창원 백범 묘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지인과 점심을 나누면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법치국가에서 개인이 사형으로 보복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와 헤어진 뒤 백범 묘소로 가기 위해 신촌에서 택시를 탔다. "효창동 백범묘소로 갑시다"라고 하자, 기사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는 박기서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안가지만(그 기사의 이름은 안 아무개였다) 그 놈을 제 명대로 못 살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안두희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면 이 땅에 정의와 양심은 모두 다 땅에 묻혔을 테지요. 같은 택시기사로 박기서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 분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합니다."

백범 묘소 앞에서 박기서씨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대담에 앞서 먼저 묘소에 참배코자 산소로 갔다. 내가 앞장서고 박기서씨가 뒤따랐다. 묘소 앞에 이러르자 박기서씨는 묘소 어귀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았다. 마치 당신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는양.

"여기만 오면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편해요."

절을 두 번 드리고 일어난 박기서씨의 첫 마디였다.

"제가 지난번 백범 선생 암살 배후 관련 기사를 연재할 때, 몇몇 네티즌들이 '박기서는 미 정보부 끄나풀이 아니냐?'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쪽의 사주를 받아서 안두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저 세상으로 보낸 거 아니냐? 마치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를 다른 자객들이 죽여 버린 거나 아키노를 암살한 하수인들을 또 다른 총잡이들이 사살해 버린 거와 같이 말입니다."

기자의 말에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우와! 정말, 정반대 생각이네요. 야아 참, 안두희가 미국 정보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이 왜곡된 데는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살려뒀다가 자연사하면 우리의 민족 정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청소부 심정으로 안두희 '처단'했다"

▲ 안두희
- 안두희를 처단한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저는 버스기사였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속에 넣고 안두희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 무렵이더군요.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청 기다려도 아침 내내 문이 안 열려요. 그래서 틀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1시 무렵에야 문이 열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두희 처가 슈퍼에 가려고 문을 따고 나왔다더군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두희 처를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일어나서 노려보더라고요. '네가 백범 선생님을 암살했느냐?'라고 다시 다그치자 안두희가 뭐라고 말하는데 분명치가 않더군요.

사실 그때 나도 무척 흥분돼 있었기에 안두희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도 없었지요. '내가 오늘 너를 처단하러 왔다'고 하는데 안두희 처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 뒤를 쳐다 보더라구요.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그 순간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안두희는 키도 크고 주먹도 크더라고요. 그의 덩치와 큰 손을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지고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적개심이 불타오르더군요. 그래서 몽둥이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안두희 처가 말로 하지 사람을 치느냐고 달려들더라고요.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간 끈으로 안두희의 처 손을 묶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신도 다친다'고 위협한 뒤 다른 방으로 데려가자 안두희 처가 그제야 제 눈에서 살기를 눈치 채고는 벌벌 떨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다시 안두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줄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내려고 작정하고 갔었지요."

"백범 선생 살아계셨다면 6·25 일어나지 않았을 것"

▲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박기서씨
ⓒ 박도
- 그 뒤 안두희가 꿈에 보이거나 응징에 대한 죄의식은 없는지요?
"안두희가 나타난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요. 저도 피와 눈물이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안두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6·25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단정'을 세웠던 이승만 일파가 백범 선생을 암살하자 민심이 7할 이상은 돌아 버린 거예요. 김일성이 그 반이(反李, 반이승만) 정서를 자기 지지로 오판하여 밀고 내려온 거지요. 또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백범 선생이 계셨더라면 아마 전선으로 달려가서 온몸으로 막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백범 선생을 깔아뭉개고 남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안두희와 그 일당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죄를 진 반역자들입니다."

- 그 일로 형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살고 청주에서 6개월 정도 사는데 3·1절 특사로 풀어주더군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외람되지만 이는 마치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독립전사들이 감옥이나 형장에서 느끼는 행복과 같을 거라고 했다. 마침 가까운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원생들을 데리고 왔다. 언저리가 소란하여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 언저리를 거닐었다.

백범이 살아계셨더라면...

▲ 1949. 7. 5. 백범 장의 행렬이 서울 소공동을 지나고 있다.
ⓒNARA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받아준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 (1948. 2. 10.)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 김구 주석 '남북동포에 격(檄)' (1948. 4. 21.)


우리 나라 근현대사를 살펴 보면, 일년 열두 달 가운데 슬프고 아프지 않은 달은 없다. 그 가운데 6월은 가장 슬프고도 가슴 아픈 달이다. 195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일까지 3년여를 끌었던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남북한 동포 5백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울러 1백여만 명의 외국군인(유엔군과 중공군)도 희생되었지만,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여태 쉬고 있는 '휴전' 상태로 있다. 어느 미국인 종군기자는 "한국전쟁 기간 중, 폭격으로 한반도 전역은 마치 석기시대로 되돌아간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되자 백범 선생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미리 예측했다. 백범 선생은 국토의 영구 분단을 막고 동존상잔의 전쟁을 막고자 38선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겨레의 비극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반통일 세력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만일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만은 막아 내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 백범 김구 선생 제56주기 추모식 * 
• 일시 : 2005. 6. 26(일). 10 : 00 
• 장소 :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 묘전(우천시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 6·25 한국전쟁 발발 55주년 기획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오마이뉴스> 독자 등 네티즌의 성금으로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미국국립문서기록청(NARA)에 갔다가 입수하여 온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 사진전 
• 일시 : 2005. 6. 15 - 2005. 6. 30 
• 장소 : 강남 교보문고 문화이벤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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