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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표지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가족은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간다. 고향이라고 해봐야 같은 제주도 내에 있으니 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고향집에서 부모님만 뵙고 오는 건 아니다. 결혼 전 내 삶의 체취들이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가끔 유년과 청년 시절의 나과 대면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고향집에서 모처럼 박노해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꺼내 들고, 어딘지 모른 지하에서 비밀리에 부패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고 있던 청년 박노해는 물론이거니와 몰래 이 금서를 탐독하던 20대 초반의 나 자신도 만나게 되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남한 사회에 들불처럼 타올랐던 노동운동은 남한 자본가는 물론이거니와 전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노동운동이 성장할수록 군사정권은 스스로가 자본의 대리 기구임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정보부, 백골단, 구사대를 동원한 노동탄압은 오히려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명분과 환경적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90년 초, 지금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출범과 민중당의 건설 그리고 사노맹(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의 출현 등으로 대표되는 바와 같이, 민중진영은 금방이라도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것 같은 여세로 빠르게 조직화 되었다.

박노해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1989 노동문학사)는 노동운동의 고양기에 한국의 대표 독점재벌인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을 겨냥한 비판서이기에 현재 상황에서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책의 형식은 김우중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내용을 노동문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박노해씨가 비판하는 형식으로, 자본가와 자본주의의 논리를 반박하고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당시 자본과 권력에 의해 베스트셀러 서적으로 홍보되었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돌풍이 상당했음을 박노해의 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 발간되자마자 서점가에 돌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3일만에 초판 2만부가 품절되고 일주일만에 재판 3만부가 다시 품절되었습니다. 그리고 7주만에 무려 62쇄를 거듭하여 63만부가 팔려 나가 우리 나라 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각 일간지에서도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서 김우중 회장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박노해)”

남한 사회를 지배하는 독점자본가 계급의 대표격인 김우중 회장과 남한사회 변혁 운동의 주역인 노동자 계급의 한 사람인 박노해의 대립을 박노해는 양대 계급 간의 전면적인 사상논쟁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우중 회장의 논리에 박노해가 어떻게 화답하는지 살펴보자.

▲ 본문삽화
“새장 속의 새는 편안하다. 스스로 먹이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고 추위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생명의 위협도 느끼지 않는다.(김우중)”

“김우중 회장,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새들 중에 우리 노동자라는 ‘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새장에 갇혀서 목이 찢기우도록 울어대며 주인을 위하여 봉사하고도 물 한 모금, 종이 한 줌 넉넉히 먹어보지 못한 털 빠진 새…(박노해)”

“어떤 새장이 있었더랍니다. 그 새장 안에서 말이지요. 이석규, 박진석, 이상모, 김학섭, 이춘섭이라는 새들이 새장을 찢으려다 찢으려다 끝내 새장을 찢지 못하고 ‘바베큐 새’처럼 분신하고 ‘으깨어진 새’처럼 추락하더랍니다. 그뿐입니까? 다른 무수한 새들도 산재로 죽어가고 불구가 되어가고, 또 나날이 병들어 푸들거리고 있더랍니다. 바로 대우 김우중이라는 새장 속에서!…‘노동자 새’는 절대로 날지 못하는 불구 새가 아니랍니다. 노동자 새가 지금 당장 날지 못하는 것은 노동자 새 본래 속성이거나 날아가려는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노동자 새를 지금 당장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긴 세월 동안 철장 속에 가두어 놓고 혹사시킴으로써 날개 힘을 빼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새장만 깨부수어 버린다면 우리 노동자 새들은 저 푸른 창공 위를 힘찬 퍼덕임으로 눈부시게 훨훨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박노해)”

“시간을 함부로 쓰는 것은 돈을 함부로 쓰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다시 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파는 가게는 없다.(김우중)”

“우리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에게 판매되는 시간과 노동력을 재생산 하는 시간을 최대로 줄여서,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시간을 확대하고자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24시간 자체가 자유롭고 인간적인 시간으로 가득 차는 사회, 노동 그 자체가 기쁨과 생명의 발현이고 휴식도 즐거움과 창조로 샘솟는 사회,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온 존재와 온 정열, 온 시간을 바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박노해)”


박노해는 대우구룹의 성장배경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었다.

“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김우중 회장은 5백만 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신참 자본주의의 대열에 뛰어들었습니다. 1967년 대우실업을 창설하여 섬유수출업계에 뛰어든 것입니다. 김우중 회장은 그 사신을 키운 한성실업의 바이어들을 몰래 낚아채어 창업 첫 해에 58만 달러 수출이라는 놀라운 실적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무더기 덤핑판매의 성과로 “섬유수출쿼터”를 배정받아 빠른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대우실업은 1972년 창업 6년만에 수출실적 5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과연 김우중 회장은 경영의 귀재이고 타고난 천재이지요, 그러나 실상 이러한 성장 뒤에는 박정희의 막강한 빽이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박정희가 부친의 제자였음을 효자였음을 효과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박정희 또한 여러 가지 통로로 대우에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미국의 수출규제 속에서 ‘섬유수출쿼터’를 배정받은 대우는 ‘땅 집고 헤엄치기’로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대미 섬유류 수출쿼터가 실시된 다음 해에 대우가 5200만 달러로 단숨에 수출 5위로 뛰어 오른 것도 이러한 배경 덕분이었습니다. 게다가 대우가 급속하게 성장한 동력이 된 부실기업 인수는 1, 2차 경제개발계획의 결과에 직접적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박정희의 막강한 후광을 업고 부실기업 인수와 은행자본 대출을 통해 기업을 확장해 나갑니다. 73년 1월 쌍미실업의 주식 65퍼센트를 인수하면서 시작된 확장은 73년 5월 삼주빌딩 인수, 73년 6월 대우기계 인수 등 1년 동안에 9개의 기업체를 인수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한때 김우중 회장은 48개의 계열사를 거느릴 만큼 부실기업 인수에 집념을 보였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인수왕으로 불리울 만큼 부실기업을 인수하였던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바로 박정희의 막강한 배경을 업고 은행돈을 마음대로 융자해서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의 부실기업 인수는 그야말로 돈 한 푼 안 내고 공짜로 집어삼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우중 회장에 대한 금융지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제일은행 돈은 전부 김우중의 것’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인수한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부채원금을 탕감해주고 이자가 감면되며, 여기에다가 종자돈이라는 이름의 손실 보상대출, 조세감면 등의 특혜적 지원이 파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이 책이 쓰여 질 당시의 남한 자본주의 상황을 박노해는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사랑하는 벗들! 이 땅은 20세기 인류를 짓누르고 있는 세계의 모든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집약되어 있는 고난의 땅입니다. 전세계 인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착취와 침략과 분단과 소외로부터 사슬이 겹겹으로 얽매어져 있는 고난의 중심축! 이것이 우리가 처한 냄엄한 현실인 것입니다.”

당사의 투쟁 속에서 체험한 좌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도 엿볼 수 있다.

“40년의 단절과 오욕의 세월을 넘어 척박한 이 반동의 땅을 뚫고 일어선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부족한 역량 때문에 새벽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 투쟁해 왔습니다. 과연 이 고난의 땅에 희망은 없는가? 나는 확신에 차 말합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해방을 열망하는 동지들, 노동해방의 대오에서 끝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물러선 동지들, 아직 전선에 굳게 나서지 못하고 있는 동지들, 우리의 미래는 희망 찹니다. 1800년대 독일의 노동자계급과 1900년대 초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전 세계 해방투쟁의 선봉에 나섰듯이, 1990년대는 우리 남한 노동자계급이 전 세계 해방투쟁을 선도해 나갈 것입니다.(박노해)”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김우중 회장에게 바치는 축시

<세계는 넓다>
전 세계를 누비는 ‘메이드 인 코리아’
자동차도 선박도 전자제품도
거대한 빌딩도 토지도
이 세계 이 조국은 너의 것이다.

<할일은 많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하늘을 날고 국경을 넘어
쉴 새 없이 돌리는 공장의 굉음 속에
늘어가는 자본도 빛나는 명예도
위대한 성취와 영광도 너의 것이다.

너의 자본 너의 세계를 수호하는
저 삼엄한 법망과 감옥도
최루탄과 총칼군대 미제와 분단 철조망도
부루주아지 너의 것이다.

......

<우리들의 사랑>은
가난하고 거친 손을 맞잡아
뜨거운 가슴 불타는 눈동자로
피에 젖은 작업복을 깃발로 일떠세운
아 파도처럼 몰아치는 투쟁이다.

<우리들의 분노>는
치 떨리고 살 떨리는 적개심은
너의 자본과 권력을 적으로 삼아
가차 없이 파괴하는 공격이다.
아 부르주아지에 살육당한
우리들의 꿈 우리들의 존재
다사로움과 푸르름으로 생동치는
가슴 벅찬 해방세상의 건설이다.

......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딛고선
너의 자본 너의 권력 너의 영광은
이제 역사의 무덤에 파묻혀야한다.
성스러운 <노동해방>군대의 발걸음 앞에
부르주아지 너의 세계는 파산해야한다
아아 노동자여 민중형제여
<투쟁의 앞길은 험난해도
전세계는 우리의 것이다.> / 박노해
책의 마지막은 김우중 회장에게 바치는 축시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로 마무리 되고 있다.

2005년 여름 남한 땅에는 더 이상 노동해방을 부르짖는 박노해도 없고, 은행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김우중도 없다. 또 특정 재벌을 비호하기 위해 철권을 휘두르는 군사정권도 없고,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철의 투쟁도 없다.

이 책이 써지고 읽혀졌던 80∼90년대의 치열한 싸움의 결과로 박노해는 자연인으로 돌아갔고, 우리 경제는 IMF 외환위기를 넘어서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놓여 있다. 더 이상 국가 권력이 특정 재벌을 비호하기 위한 물리적 강제도 아니고, 능력 없는 기업과 노동자는 시장에서 자연스레 퇴출되는 야속하고 야박한 세상을 살고 있다. 김우중 회장은 이런 세상이 변화를 읽지 못하는가?

아니면 자신만은 모든 변화의 폭풍을 피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의 방만한 경영과 분식회계, 회사공금 유용 등의 혐의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혐의의 결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과 개미 주주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뼈아픈 고통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는 여전히 과거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이 오랜 해외 도피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였다. 공항에서 귀국 성명서를 발표하려 했던 걸 보면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다. 그의 귀국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동정론과 처벌론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여전히 그는 여론의 중심에 서 있다. 투사 박노해는 없지만 1989년 박노해의 비판이 2005년 여전히 유효한 한국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 노동해방신서 2

박노해, 노동자의벗(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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