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특급 투수의 대명사 커트 실링. BK의 최전성기였다 할 수 있는 2002년 23승 7패 방어율 3.23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팀을 월드시리즈에 이끌고 월드시리즈 7차전 최종전 선발로 나섬으로써 명승부를 매조지 했던 실링! 많은 박찬호 안티팬들이 박찬호의 높은 연봉에 불만을 갖고 비교 대상을 얘기할 때 커트 실링을 들곤한다. 이처럼 엄청난 대투수의 커리어를 갖고 있는 커트 실링조차 2005년 받게 된 연봉이 $14,500,000. 1천만불을 넘은 것도 2002년에야 들어서야 가능했다. 2002년이면 그의 나이 36세. 1988년에 ML에 데뷔했으니 자그만치 14년이 걸린셈이다. 우리의 박찬호는 단 6년만에 990만불을 받아내고 7년째에는 6500만불짜리 잭팟을 터뜨렸는데 실링은 4년차에야 겨우(?) 1천만불을 돌파하고 이제야 박찬호와 비슷한 연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아마 박찬호의 안티팬들에게는 성토의 대상이 된 것 같다. '박찬호가 실링보다 낫냐고?'라며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커트 실링의 기록을 한 번 잘 살펴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할 것만 같은 그의 통산기록(Career Stats)은 사실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아니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진정한 롤러코스터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박찬호에게 롤러코스터라고 말들 하는데, 진정한 롤러코스터란 커트 실링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실링에 비한다면 박찬호는, 쑥쑥 커나가다 지난 3년 잠시 주춤하고 다시 상승하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신장 130cm 이상은 탈 수 없는 유아용 놀이기구 수준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커트 실링은 모놀이동산의 그 유명한 롤러코스터 '독수리요새'급에 비할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98년에 볼티모어에서 데뷔한 그는 91년 휴스턴으로 옮기고 나서야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고 본격적인 선발 등판을 시작한 것은 92년 필라델피아 시절부터이다. 26세때야 비로소 선발의 자리를 잡기 시작한 평범한 투수였던 것이다. 92년 선발과 구원을 오가는 스팟 스타터(Spot Starter)로서 226이닝이라는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14승 11패 방어율 2.35의 수준급 성적을 올리며 커트 실링은 붙박이 선발의 입지를 비로소 확보하게 된다. 93년 처음으로 풀타임으로 고정 선발을 맡게 되며 34경기에 선발등판, 16승 7패 4.02의 방어율을 기록 첫 장기 계약을 이끌어낸다. 2년 460만불의 당시로서는 꽤 괜찮은 조건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는? 드러눕기. 2년 동안 총 30경기에 등판 198이닝을 던지면서(2년 동안의 기록이다!) 9승 13패를 기록해버린다. 최악의 먹튀로 기록될 만한 높은 연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다. 물론 그 다음해의 연봉은 60만불 FA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연봉으로 다시 필라델피아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곤 곧바로 부활 17승을 올리며 다음해 350만 달러의 연봉을 받게 된다. 98년 역시 15승 14패의 호성적으로 시즌을 마감 99년 525만 달러 2000년 565만 달러의 연봉이 보장되어 있는 구단주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역시 99년 15승을 거둔 후 일찌감치 드러누운 실링은 그해에 24게임만 출전하는 DL의 단골이 된다. 2000년 트라비스 리 등과 함께 애리조나로 트레이드된 커트 실링은 그 해 11승(애리조나서는 5승)을 올리며 장기 잭팟을 터뜨리게 된다. 3년간 3650만불 연평균 1200만불에 달하는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혹자는 박찬호에 비교할지 모르나 글 읽어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한 번도 DL에 오른적이 없던 찬호와 비슷하지도 않다. 오히려 계약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박찬호의 계약은 쉽게 납득이 가는 반면 커트 실링의 계약은 조금 도박성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어쨌건 이런 저런 기대와 우려 속에 그는 2001년과 2002년 랜디존슨과 공포의 1, 2펀치를 이루면서 22승과 23승이라는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방어율 또한 2.98과 3.23으로 매우 훌륭했다. 물론 두 시즌 모두 사이영은 랜디 존슨에게 밀린다. 그리고 계약 마지막 해인 2003년에는 또 드러눕는다. 성적은 8승 9패. 하지만 그의 포스를 높이 산 보스턴은 그에게 초유의 장기계약을 하게 되는데 바로 월드시리즈 챕피온십 옵션이 그것이다. 2004년 1200만불로 시작한 그의 연봉은 월드 시리즈에 우승할 경우 2005년 연봉을 1450만불로 인상 받게 되고 2007년까지 1300만불의 팀 옵션으로 되어 있는 연봉을 자동으로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2004년 핏빛 투혼으로 전미국을 센세이션에 몰아 넣으며 보스턴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물론 그의 연봉은 2007년까지 4000만불에 달하는 금액이 보장되었다. 그는 월드시리즈때 실제로 일부러 양말이 피로 물들도록 방치해두었고, 자신의 양말이 TV에 자주 비치는 것을 이용해 신발에는 'KALS'(ALS -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루게릭병)라는 메시지를 적어 넣음으로써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자선단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센스'까지 보여주었다(여기서 K란 다들 알겠지만 Strike Out이나 Knock Out을 뜻하는 약자로 루게릭병 잡아버리자 뭐 이런 뜻이다). 피칭 연습을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 '떠벌이'로 유명한 그답게 그가 남긴 어록도 참 많다. 김병현이 양키스에 홈런 맞고 몰렸을 때 그를 두둔하며 'BK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 없었다'라고 말해 팀의 리더로서 넓은 포용력을 과시했고, 우승 확정 후에는 TV에 대고 'Let's go D-Backs'를 외쳐 애리조나 전역을 감동먹였다. 보스턴에 와서는 그 수위가 더해져서 핏빛 투혼에 관한 수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내가 투구하는 것에 가장 놀라는 사람은 아내일 것이다'로 교묘하게 자신의 부상 정도를 강조했다. 또한 '나는 아파서 던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전을 하며 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보고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등 그가 남긴 주옥 같은 명언들은 정말 많다. 하지만 되짚어 생각해본다면 그처럼 쇼맨십이 강하고 언론에서 좋아할 타입의 선수 또한 없는 것 같다. 언론은 항상 헤드라인 카피를 뽑아줄 선수를 원하고 있는데 실링은 그것을 언제나 충족시켰다. BK가 카메라를 부시고 기자를 도망다닐 때 커트실링은 지역 기자들과 밥먹고 술먹으며 친분관계를 지냈던 것이다. 실제로 커트 실링의 정치력은 ML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는 원투펀치로서 애리조나를 평정할 당시에도 랜디존슨과의 리더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지역 언론을 이용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의 눈 밖에 난 선수들은 기자를 이용해 측면에서 비난함으로써 입지를 좁게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병현이라 할 수 있겠다. 보스턴에서 김병현이 부상으로 고생할 때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너 죽을 만큼 아프냐?' 물론 와전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듯이 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선수들은 클럽하우스에서 알게 모르게 왕따 시키는 것이 바로 커트 실링의 장기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는 김병현 말고도 많으며 그는 시즌 중에 직접 간접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선수를 비난하고 나선 예가 많이 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나 랜디존슨 모두 커트실링을 피해서 각각 메츠와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했다는 것은 그리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다. 솔직히 그는 뛰어난 선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코 위대한 선수는 아니다. 39살의 나이까지 현역으로 있으면서 200승도 올리지 못한 선수를 위대한 선수로 칭하긴 부족한 감이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팬은 그를 위대한,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투수로 생각하고 있다. 실링이 갖고 있는 명성의 절반 정도는 그가 떠벌린 입에서 비롯된 거품일지도 모른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커리어(Career)를 마무리 하는지 한 번 지켜보자. 필자는 아직 인정하지 못하겠다. 야구는 제쳐두고라도 그는 방송에서 전쟁광 부시를 대놓고 지지했던 '놈' 아닌가.

덧붙이는 글 2007년까지 400억이 넘는 연봉이 보장된 커트실링은 올해 1승 2패 8.15의 방어율로 단 3번의 경기만 등판했으며 현재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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